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드디어 옥타비아 버틀러에 입문! 사실 그녀의 단편집 <블러드 차일드>를 먼저 추천받았지만 어쩌다보니 <킨>을 먼저 읽게 되었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타임슬립이라는 방식이 비교적 진부하게 생각되지만 그녀가 이 소설을 쓴 시기가 1979년이니 꽤나 진보적이라고 해야하나. 

 

   주인공 다나는 1970년대 미국에서 사는 흑인여성이다. 굳이 '흑인여성'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점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다나는 어느 날 자신의 집에서 책을 정리하다가 현기증을 느끼고 기절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장소에서 어떤 아이가 물에 빠져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듣게 되고 엉겹결에 그 아이를 구하게 된다. 그리고 소년의 아버지로 생각되는 남자가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순간 다시 현기증을 느끼면서 현재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다. 소년을 구하고 소년의 부모들과 마주하기까지의 시간이 현실에서는 겨우 십여초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그녀는 소년의 앞에 나타난다. 그런데 이미 그 소년의 시대에서는 몇년이 흐른 후이다.

 

   다나는 루퍼스가 살고 있는 1800년대와 현재를 오가게 되는데, 그녀가 현재에서 과거로 타임슬립을 하게 되는 계기는 루퍼스의 목숨이 위험할 때이고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것은 그녀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이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은 일대일로 매칭되지 않는다. 과거의 시간이 훨씬 빨리 흘러간다. 그녀와 루퍼스는 이야기의 처음에서는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루퍼스가 살고 있는 시대의 미국 남부는 여전히 노예제도가 합법이고 많은 흑인들이 인간이 아니라 검둥이라고 불리우면서 비참한 생활을 하던 때이다. 그러니 다나가 그 시대 그 장소로 타입슬립 할 때마다 맞닥뜨렸던 위험과 고통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다나보다 더 중요한 인물인 '앨리스'라는 흑인여성이 당시의 악질적 관습에 저항하던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원래는 자유인이었지만 루퍼스에 의해 강제적으로 그의 노예로 전락하고 그의 아이까지 낳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자살을 통해 그녀의 몸과 정신이 백인의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는데 이 부분이 아마도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생각한다.

 

   타임슬립이라는 SF 소설의 방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무언가 거창한 미래의 모습이 아닌 되풀이되지 않아야 할 과거의 상처를 이야기한다. 다나가 루퍼스에 의해 원하지 않음에도 자꾸 노예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마도 당시에 원하지 않았지만 백인들에 의해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흑인들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이들은 앨리스처럼 끝까지 저항하고자 했고 어떤 이들은 그 상황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자꾸 아픈 과거를 상처를 헤집는 마음으로 되돌아보는 이유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리석어서 언제든지 그러한 역사를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형식은 SF이지만 마치 역사 소설 같은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