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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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의 위기, 성 소수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인생, 최근 출판사로부터 퇴짜맞은 원고, 9년간 함께 해온 파트너로부터 청첩장을 받은 사람... 우리의 주인공 레스를 수식하는 이 문구들을 마주했을 때, 소설의 분위기가 어딘지 우울하고 자기 반성적이고 삶에 대한 자학적 반성과 심오한 깨달음을 담고 있지는 않을까 상상했던 독자라면 작가에게 배신당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너무나 유쾌하고 따뜻한 B급 감성이기 때문이다.

 

   풋풋한 젊음의 시간이 영원할 줄 알았던 한 인간이 오십살의 생일을 눈 앞에 둔 어느 때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놓쳐버린 사랑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라는 것이 사실은 이것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파란색 정장을 떠돌이 개한테 뺏기고 결국 회색 정장을 입어야하는 것이라는 것, 또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벽을 깁스를 할 위험을 각오하고 부수고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여행을 떠나기 전의 레스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껍질이 없는 사람', '피터팬'이라는 별명이 알려주듯, 레스는 순진하고 허술하고 계산적이지 않은 캐릭터이다. 그런 캐릭터가 자신의 유일한 강점이라고 생각했던 젊음이 사라지고 사랑도 떠나고 세상이 홀로 남겨졌을 때의 그 상실감을 이겨낼 수 있을까. '오십'이라는 숫자를 자신의 인생 안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의식의 흐름을 따라 쓰여진 듯한 리듬이 있는 문장들에 적응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저 단락이 바뀌었을 뿐인데, 작가는 독자들을 타임머신 없이 다른 장소와 시간대로 이동시킨다. 이야기의 화자가 열두살 때 레스를 만난 짧은 에피소드가 등장하면서 존재를 드러냈다가 그냥 사라진다. 그래서 처음에는 레스의 여행을 따라잡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했지만 나중에는 이 예측할 수 없음이 이 소설의 강점임을 깨닫게 된다. 게다가 중간중간 등장하는 신랄한 일종의 까대기 식 유머는 어찌나 공감이 가는지, 특히 택스 리펀을 못받게 하는게 목적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유럽의 세관원들에 관한 이야기와 해외여행에 가서 옷 쇼핑을 하는 관광객들에 대한 그 아름다운 통찰이란! 아뭏튼 '2018 퓰리처상 수상작'이라는 엄청난 수식어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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