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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장
윤흥길 지음 / 현대문학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는 집에 오랫동안 모셔만 놓고 읽지 않고 있는 책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순간의 충동구매나 책 소개글에 현혹되어 들여놓기는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읽지 않고 방치해놓은 책들이 많다. 그런데 일단 읽어야 소장가치가 있는지 그냥 다른 곳으로 보내도 좋은 지 판단을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책장 속 저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걸려있던 <완장>을 꺼내 들었다.
배경은 일제 강점기와 6.25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살아있는 그 어느 때, 이곡리라는 시골 마을이다. 마을에 있는 판금 저수지는 어종이 풍부해서 마을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혹은 오락을 위해 낚시를 하는 그런 곳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마을 출신의 한 사업가가 그 저수지에서 낚시터를 운영하는 사업허가권을 얻었다면서 마을 사람들이 더 이상 낚시를 하지 못하도록 감시원을 두려고 한다. 그런데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사람을 부리려고 하니 선뜻 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사업가 최씨의 조카인 마을 이장은 동네에서 마냥 할일없고 행패만 부리고 다니는 종술에게 '완장'을 채워주겠다며 자존심을 슬슬 부추기면서 감시원 역할을 맡게 만든다. 완장이라고는 했지만 저수지에서 몰래 낚시를 하는 사람들을 저지하는 것일 뿐 그 어떤 법률적 구속이나 권력과 하등 상관없음에도 종술은 완장을 차고서는 의기양양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폼새를 내며 마을 사람들의 빈축과 두려움을 동시에 산다. 종술이가 평소 짝사랑으로 애태우던 술집 여자 부월이만이 종술이의 완장 허세에 굴복하지 않다니 참 아이러니다. 종술이가 완장으로 얻으려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바로 부월이의 마음일 것인데 말이다.
저자는 종술의 국민학교 적 담임 선생님의 입을 빌어 완장이라는 것이 '왜놈들 찌끄레기'임을 폭로한다. 우리나라에 완장 비스무레한 것이 있었다면 그저 상중에 팔에 두르던 상장이라는 것인데, 이는 집안 어르신을 돌아가시게 만든 죄를 자복하고 매사에 근신한다는 의미로 일반인과 구분을 짓기 위해 팔에 둘렀던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종술이 팔에 두르고 무슨 큰 권력을 얻은 것처럼 나불대는 그 완장은 일본에 우리에게 남겨 준 '침 뱉어 마땅한 유산'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금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완장을 두르고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잘난 척 하는 무리들과 매일 마주친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너 따위가..내가 가만 두나 봐라..소위 그런 완장들이 '갑질'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저자는 종술이와 부월이를 통해 '완장'의 허세를 쫓는 인간 부류에게 일침을 놓는다. 위의 내용으로만 보면 어쩐지 어둡고 암울할 것 같지만 저자의 해학 덕분에 책은 예상외로 유머와 감동 코드가 있고 재치있는 문장들에 깜짝깜짝 놀라게된다. 이런 문장은 줄 쳐놓아야해 하면서 표시해놓았던 문장들 몇개를 인용해본다. <완장>은 소장용 책으로 낙찰!
종술은 밥에 섞인 모래알 모양으로 빠드득 씹히는 옛날 일 한도막을 문득 어금니 사이에서 찾아내었다. (p60)
좋은 생각이 떠오르라고 그는 누운 채로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그 담배가 다 타기 전에 그는 어제 먹다가 시렁 위에 얹어둔 좋은 생각 한 도막을 얼핏 찾아냈다. (p124)
종술은 발자국 소리를 호주머니 안에다 깊숙이 감춘 채로 살금살금 감시소까지 다가가서 다짜고짜 문을 열어젓혔다. (p155)
최사장이 당한 망신은 익삼씨의 안중에 별로 없었다. 그것은 아저씨의 몫이었다. 그는 자기 몫으로 자기가 당한 망신만을 소중스레 따로 챙겨 지니고 있었다. (p210)
실비주점이 적선이라도 하듯이 길바닥에 덜어주는 옹색한 불빛 속으로 (p264)
관상대의 예보가 들어맞아 모처럼만에 비가 내렸다. 관상대는 구름 또는 우산 표시뿐만 아니라 실로 오랜만에 내리는 그 비가 농사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까지 신통하게 알아맞힘으로써 오히려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p278)
메칠새 도라꾸를 두 대 저수지로 보내주셔야 되겄구만요.
왜, 저수지가 호남 고속도로를 타고 이사라도 가고 잡다냐? (p285)
실비주점을 방문하기엔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벌건 대낮을 피하자면 호박씨만큼이나 자잘하게 깔린 시간의 낱알들을 어디서 일삼아 까먹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마을 안 구석구석을 하릴없이 기웃거리고 돌아다니는 참이었다. (p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