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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 이야기 - 역사를 바꾼 은밀한 무역 ㅣ 예문아카이브 역사 사리즈
사이먼 하비 지음, 김후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밀수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언가 은밀하고 불법적인 것이 떠오른다, 이를테면 마약밀수, 금괴밀수, 무기밀매, 노예밀매 같은 것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우리 민족의 의생활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던 문익점의 목화씨 밀반입도, 중국으로부터 차를 밀수해 들어온 김대렴의 행위도 엄연한 밀수다. 그것 뿐인가, 해외 여행을 다녀올 때, 600불이 넘는 물품을 신고하지 않고 가져오는 것도 밀수이고 밀수로 구매된 제품을 다시 구매하는 행위도 넓은 범위의 밀수에 해당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먼 과거의 역사 속 밀수 행위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고 낭만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게 되는데, 저자는 왜 역사속 밀수가 그러한 이미지를 갖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밀수가 어떻게 각 나라의 국익에 이바지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밀수와 국가의 상호 의존적 역사를 풀어낸다.
이 책에서 다루는 밀수는 대항해 시대의 향신료에서부터 시작한다. 즉 유럽의 식민지 역사와 밀수의 역사는 운명을 같이 했다는 뜻이다. 유럽의 식민지 정책으로 세계 질서가 새롭게 재편되었고 유럽 열강들이 서로 빼앗고 뺏기는 역사를 되풀이 할 수 있었던 것의 배후에는 바로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의 독점으로 벌어들이는 부가 있었는데, 이러한 독점 체재는 오히려 밀수를 활성화하는 동기로 작용한다. 그렇다 보니 밀수가 갖는 지정학적 중요성이 점점 높아지게 되는데, 이는 제국의 판도를 뒤집는 것이 바로 독점 물품에 대한 밀수였기 때문이다.
향신료로 시작된 밀수의 역사는 소금, 금, 은, 담배, 차, 아편, 무기 등으로 점차 범위가 확대되고 한번 밀수가 주는 달콤함에 맛들린 나라들은 사략선의 해적 행위를 비공식적으로 지원하고 장려함으로써 어느 새 밀수는 세계의 운명을 바꾸는 위치까지 오르게 된다. 이런 세상에서 밀수꾼들은 오히려 애국자가 되었고 심지어는 처음부터 상류사회에 속했던 사람들이 밀수에 참여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하지만 밀수가 혁명과 저항의 아이콘이 되는 경우도 있었으니, 바로 밀수가 실어나른 고귀한 사상과 책들이 그것이다. 미국의 독립운동과 남북전쟁의 노예 해방의 역사에서 사상과 책들의 밀수는 변화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었고 그런 책들은 금서로 지정되어 그 어떠한 무기보다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였다. 즉 밀수에도 품격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 책은 '밀수'에 윤리적인 잣대를 대어 판단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밀수의 역사가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이 세상은 밀수가 성행하고 수요가 있는 곳이라면 밀수는 어디든지 재빠르게 달려간다. 밀수품 전쟁에서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끝나지 않는 거래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형태를 바꿔가며 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있을 것이다. 밀수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계의 역사는 세계사를 쓰는 매우 흥미로운 또 하나의 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