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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위대한 일들
조디 피코 지음, 노진선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12월
평점 :
품절
국내에서 조디 피코의 작품을 꾸준히 읽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그녀의 작품을 애정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일거다. <쌍둥이 별>과 <19분> 그리고 작년에 읽었던 <코끼리의 무덤은 없다>까지, 그녀의 작품들은 모두 '작은 힘'에 관한 이야기이다. 흑과 백의 이분법적 논리가 지배하는 극단적인 세상에서 가진 자들이 느끼지 못하는 편견을 이야기하고, 우리가 들이대는 윤리와 도덕의 잣대가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를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루스는 분만 병동에서 일하는 경력 20년차 간호사이다. 그녀는 환자들과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난 실력좋은 간호사이고 뉴욕의 제법 좋은 동네에서 살면서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고등학생 아들을 둔 엄마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녀의 모습이 어떻게 그려지는가? 여기까지만 듣고서 그녀를 흑인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데 거의 백퍼센트 확신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스스로 자각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본능적으로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평소와 다름 없는 어느 날, 터크와 브릿 부부가 루스가 일하는 병원에서 아이를 낳는다. 아이의 이름은 데이비스. 분만 다음 날, 루스는 아이와 산모의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 그들의 병실로 들어가는데, 거기서 자신의 아이를 흑인 간호사에게 맡길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별의 별 환자들이 다 있는데,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에 따라 자신들의 아이가 특정 간호사에게 치료받기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무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데이비스의 차트를 보다가 수간호사 마리가 붙여놓은 포스트잇을 보게 되는데,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다.
아프라카계 미국인 간호사는 이 환자를 돌보지 말 것
그 날은 다른 간호사 코린이 그 아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코린이 갑자기 호출을 받고 루스는 접근 금지령이 내린 아이와 단 둘이 병실에 있게 된다. 아이는 포경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잿빛으로 변하면서 숨을 쉬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딜레마다. 상사의 명령에 따를 것인가, 나이팅게일의 선서를 따를 것인가. 아이는 죽었고 병원측은 이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 루스 개인의 잘못으로 몰고 가고 극단적 백인 우월주의 부부인 터크와 브릿 역시 루스가 자신들의 아이를 죽인 살인자라고 생각한다.
루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황당하지만, 가장 어이없는 건,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생긴 일로 기소된 사건임에도 재판에서 인종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담당 변호사에서 듣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최종 변론에서 루스의 변호사, 케네디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특정 인종을 미워하고 조롱하고 테러하는 것만이 인종차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능동적 인종차별 말고도 이 세상에는 수동적 인종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회사에 유색인 직원이 한 명뿐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상사에게 이유를 묻지 않는 것', '흑인역사 수업이라고는 고작 노예 시절만 다루는 걸 보고도 학교 측에 이유를 묻지 않는 것', 그리고 '인종 때문에 기소된 여자를 법정에서 변호하면서도 인종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진실을 얼버무린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 역시 인종차별이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포경 수술 후 데이비스를 돌보던 간호사 코린은 90분간 아기를 지켜봐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호출이 왔다는 이유로 자리를 뜨고 데이비스를 돌보는 게 금지된 루스에게 아기를 맡겼다. 규칙을 2개나 어겼음에도 그 어느 누구도 코린에게 아기를 죽인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건 코린이 백인이기 때문이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에 태어난 사람이 나머지 요일에 태어난 사람보다 월등하다면서 그들만을 차별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그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인종 차별은 어디에나 있고 모든 걸 한꺼번에 해결하는 해답은 안타깝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조디 피코처럼 그 사실을 외면하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가 언젠가는 세상을 바꾸기를 희망하면서 작가의 이번 작품에도 많은 독자들이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