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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런 소설을 읽어본 지는 꽤나 오래 전이다. 출간된지 20년도 넘은 한국소설에 시간적 배경은 60년대. 어딘지 어둡고 한맺힌 글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의외로 작품은 시니컬하고 건조하고 그러면서도 유머와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열두살 여자아이가 화자인 탓도 있으리라.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너무 일찍 성숙했고 그러기에 일찍부터 삶을 알게 된 만큼 삶에서 빨리 밑지기 시작했다
다분히 성장소설의 분위기를 갖는 작품은 69년에 열두살이 된 진희라는 아이를 화자로 하여 주변인물들에 대한 관찰과 묘사 그리고 그 시대, 그 공간만이 가능했던 일상들을 포착한 작품이다. 한정적 시간과 공간이지만 다양한 군상들에 대한 예리한 묘사는 이미 열두살에 성장을 끝내버린 한 소녀의 비밀스런 관찰일기를 넘어선, 만약 먼 훗날 모든 것이 사라진 지구에서 외계인들이 그 시대와 공간에 대한 자료를 찾고자 했을 때 사료적 가치로도 충분할만큼 시대적 진실과 맞닿아있다.
진희는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다. 자신이 여섯살에 엄마가 미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그것도 주변 사람들의 입방아일 뿐이다. 그런 진희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삶'이 주는 불리함을 빨리 깨닫고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만의 방식을 터득한 것이다. 바로 삶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매 순간마다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자아를 분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삶에 거리를 두고 상처의 내압에 의해 갈갈이 찢기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매는 것이다.
세 채의 집 한가운데 우물이 있는 집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 우선 부모없는 진희를 안타깝게 여기며 진희에게 뭐든 해주고 싶어하는 할머니와 매일처럼 할머니에게 잔소리를 듣는 철없는 이모 그리고 서울대 법대생인 삼촌이 있다. 거기에 진희 또래의 장군이와 장군이 엄마, 그리고 거기에 하숙하는 최선생과 이선생. 장군이 엄마는 전형적인 우물가 소문의 진원지이고 최선생은 여색을 밝히고 이선생은 그 속을 알 수 없는 존재감 없는 인물로 등장한다. 거기에 광진테라라는 양복점 식구들인 광진테라 아저씨와 아줌마 그리고 갓난아이 재성이가 있고 가겟집 네칸에는 뉴스타일양장점, 광진테라, 우리미장원, 문화사진관이 들어서있다.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 이외에도 소설 속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많은 사람들의 개별적 특징을 잡아내어 서술하는 작가의 묘사력이 압도적이다. 진희가 열두살을 지내었던 시간들은 열세살이 되고 눈이 오던 어느 날 밤 이야기에서 끝이 나는데 그 짧은 일년동안 성장한 사람은 비단 진희만이 아니다.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삶은 농담이고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삶은 계속된다는 삶의 본질을 이미 열두살에 알아버린 진희의 냉소적 태도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소설이 나온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삶의 철학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