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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 이야기
팜 제노프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전쟁은 많은 이들의 본성을 똑바로 볼 수 있게 해주기도 하고 많은 이들이 평상시라면 발휘하기 어려운 종류의 용기를 저 아래 깊은 곳으로부터 짜내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소설도 본질적으로는 인간의 용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의 처음은 현재의 파리, '서커스 매직 200년의 역사'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곳에 아흔이 넘은 나이의 한 노인이 그 곳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오래된 낡은 포스터가 있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이름을 날리던 유럽 서커스의 계보들의 이름이 눈에 띈다. 서커스 단원들이 사용하던 각종 의상과 장식품들을 지나 단원들의 이동 수단이자 숙소로 사용된 침실용 객차도 보인다. 할머니는 얼른 객차 아래 붙은 공구용 상자를 더듬어 무언가를 찾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수십년의 세월동안 묻고 또 물었지만 대답을 알 수 없었던 질문과 한가닥의 희망이 사라짐을 느끼면서 1944년 독일로 시공간이 옮겨진다.
이야기는 두 여성인 노아와 아스트리드의 시점이 번갈아가면서 진행된다. 독일군의 아이를 임신한 채 집에서 쫓겨난 노아는 네덜란드계로 순수 아리아 혈통이다. 집에서 쫓겨난 후 보호소에서 아이를 출산하지만 아이는 기대했던 순수 아리아 혈통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노아는 아이를 잃게 된다. 기차역에서 청소부로 일하면서 어느 날 객차 한 칸이 전부 갓난 아이들로만 채워진 것을 발견하는데, 충동적으로 아직 살아있는 한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고 노이호프 서커스단의 피터에 의해 발견되면서 서커스단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된다. 아스트리드는 유대인 혈통으로 노이호프와 양대산맥을 이룬 클렘트 서커스단장의 딸이었는데, 전쟁이 시작되기 전 독일 군인과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히틀러의 인종청소가 시작되면서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가족들도 찾을 수 없어 노이호프 서커스단으로 들어간다.
소설의 소재는 저자가 자료 조사를 하다 접한 실제 이야기들이 모티브가 되었는데 실제 한 서커스단은 유대인들에게 거처를 제공해주고 그들을 보호해주는 위험을 감수하였다고 한다. 소재는 좋았는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 꼼꼼함이나 치밀한 구성이 아쉬운 작품이다. 분명 가슴 아픈 이야기이고, 당시 유대인들의 고통과 그들과 그들을 보호해 준 이들의 용기에 놀라게 되는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독자의 공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에는 어딘지 허술한 부분이 있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노이호프 서커스 단장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의 핵심 부분이 빠져있는 듯 하고 마지막의 그림 한장을 위해 만들어낸 노아와 루크의 이야기는 어딘지 억지스러웠다. 또한 순수 아리아 혈통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야 했던 수많은 아이들에 관한 비극 역시 테오라는 아이를 통해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어 시대적 공간적 비극을 느끼기에는 부족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