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국화
매리 린 브락트 지음, 이다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1943년 여름. 올해 열여섯 살이 된 하나는 어부인 아버지와 해녀인 어머니 그리고 이제 아홉살이 된 여동생 아미와 함께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 하나 역시 엄마처럼 물질을 하는 해녀이다. 엄마와 하나가 물질을 하는 동안 아직 물질을 하기에 어린 아미는 해변가에서 엄마와 언니가 잡은 수확물을 지키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날도 그랬다. 엄마가 아직 물 속에 있을 때 커다란 고동을 잡은 하나가 동생을 부르려고 할 때 한 일본 군인이 동생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는 걸 본다.

 

이제 네가 동생을 지켜야 한다
응, 엄마. 내가 지켜줄게. 약속해.
약속은 변하지 않는 거다. 잊지 마
기억할게, 엄마. 항상.

 

   동생 아미가 태어났을 때 엄마와 했던 약속을 하나는 그렇게 지켜낸다. 동생이 발각되지 않도록 일본군의 주의를 끌고 열여섯의 하나는 그렇게 해서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만주로 끌려간다.

   2011년 겨울 제주도. 77세의 아미는 일년에 한번 자식들을 만나러 서울에 간다. 늘 배편을 이용해 서울로 가는 아미이지만 이번만큼은 비행기를 탄다. 그녀가 서울에 가는 건 자식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가 서울에 갈 때마다 참석하는 수요집회는 올해 1천번째 열리는 집회로, 그녀는 집회에서 누군가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아니 적어도 누군가의 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참석한다. 올해는 1천번째를 기념하여 두 작가가 평화의 소녀상을 제작했다고 한다.

   이야기는 1943년 하나의 이야기와 2011년 아미의 이야기를 교차해서 들려준다. 이야기는 고통스럽다. 끌려간 자와 남은 자, 그리고 그 둘을 바라보는 독자에게도 고통스럽다. 그래도 마주해야한다. 그래도 동생을 지켜냈다는 사실을 위안 삼아 죽을 것 같은 아픔과 두려움을 깊은 심연에 남겨놓고 마침내 물 위로 솟구쳐 오르는 하나처럼, 언니가 사라진 후 제주 4.3 사건으로 아버지와 엄마마저 비극적 죽음을 당하고 본인 역시 죽는 날까지 자식들에게 숨겨야 했던 그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소녀상과 마주한 후 털어놓을 수 있었던 아미처럼, 이 책을 읽는 독자 역시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과거로부터 눈과 마음을 돌리지 말고 똑바로 응시해야만 한다.

   이 소설은 짐승같은 일본의 파렴치함이나 해방 후 같은 민족에게 저지른 나라의 만행에 초점을 맞춘다기 보다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두 여성의 삶 자체에 독자를 집중하게 만든다. 이야기 속에서 관광객들이 해녀들을 동물원의 짐승을 보듯이 한다는 아미의 푸념에 대꾸하는 진희의 말은 바로 저자가 이 소설을 쓴 이유이자 독자들에게 하는 부탁이기도 하다.

 

누군가 우리 이야기를 한다면 우리가 영영 사라질 일은 없지 않겠냐

 

   이 잔혹했던 어둠으로부터 탈출한 이제 몇분 남지 않은 그분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일본과 이 나라가 충분한 사죄를 할 때까지 그분들의 이야기가 계속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남은 우리들의 의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특히 한국인 어머니를 둔 미국계 여성 작가가 영어로 쓴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된다. 전쟁을 핑계로 한 단순한 성폭행 사건으로 왜곡되거나 희생자들에 대한 과장된 감상주의로 흐르지 않는 정말 제대로 된 수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