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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평점 :
도리스 레싱의 작품은 처음이다. 약 십여년 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떠들썩했을 때에도 어쩐지 무겁게 가라앉은 듯한 그녀의 작품들에 대한 편견으로 쉽사리 들게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소설집은 표제작 <19호실로 가다>를 포함하여 레싱의 1960년대 단편소설 총 1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작품에는 당시의 여성들에게 당연하게 덧씌워졌던 가면들에 대한 분노와, 한쪽으로 치우친 남녀관계의 시소에서 어떻게든 관계균형을 바로잡아보려고 애쓰는 여성들과 그런 그녀들에 대한 노골적 불편함을 느끼는 남성들이 다양한 배경과 방식으로 등장한다. 자신이 성장해 온 아프리카에서의 인종적, 성적 차별을 직접 목격하고 1960년대에 유럽과 미국에서 탄생한 급진적 페미니즘인 '여성해방운동'의 영향을 주고 받았으리라 짐작되는 그녀의 작품들 대부분이 강도 높은 페미니즘을 표출하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아직 읽어보지 않은 그녀의 다른 작품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 11편의 단편들은 의외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 속의 여성들이 어떤 대승적인 권리를 주장하면서 여성 해방 운동을 강력하게 주창한다기 보다는 여성들의 일상 속에서의 소소한 일탈과 작은 반항으로 남성들을 쪼잔하게 보이게끔 하는 굴욕감을 안겨주는 식이라고나 할까. 예를 들어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에서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한 여성을 강제로 점령하려는 남자에게, 여자는 강하게 반항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굴복하지도 않는다. 그저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식의 태도로 일관하고 결국 목적 달성을 하지 못한 남자가 다음 날 그녀의 일터까지 바래다 주면서 그 주변의 사람들이 그녀와 그의 관계를 궁금해하거나 그녀가 그와 함께 밤을 지낼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기를 바라는데, 거기 있는 그 누구도 그의 저질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무시로 일관할 뿐이다. 그녀의 완승이다. <옥상 위의 여자>에서는 옥상에서 작업을 해야하는 인부 중 한명인 스탠리는 바로 옆의 다른 옥상에서 매일 비키니를 입고 일광욕을 하는 여성을 발견하고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휘파람을 불어대고 고함을 지른다. 그의 이런 싸구려 관심에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그녀에게 분노를 표출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녀가 일광욕을 하지 못하도록 비가 오길 바라는 쪼잔한 오기까지 부린다.
반면 여성 스스로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기도 한다. <영국 대 영국>에서 찰리의 엄마는 일을 효율적으로 하게 되면 반나절의 쉬는 시간이 생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시간을 모욕으로 받아들인다거나, 일주일에 두세번씩 과자 공장에서 과자 포장하는 일을 '밖에 나가서 바람을 쐬'는 일로 여긴다. 표제작인 <19호실로 가다>는 광고 회사의 재능있는 직원이었던 수전의 행복한 결혼 생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수전은 결혼 후 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와 살림에 전념하는데, 수년이 지난 후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여 낮동안은 충분히 개인적 자유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잠시 쉬었던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음엔 어떤 집안일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자신만의 생활로 돌아오지 못한다.
"남자와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 왜 여자라는 성(性)을 잃어버리는지는 하느님만 아실 거에요"
- <남자와 남자 사이>
11편의 모든 작품이 공감되지는 않았지만 당연시 되던 여성의 일상이 페미니즘 소설로 탈바꿈 할 수 있었던 건 그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필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의 맨 뒤에 첨부된 그녀의 연보를 보면 꽤나 다작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다룬 중,단편이 많았는데 (심지어 SF 시리즈물도 있다!) 그녀의 풍자적이면서도 노골적인 시선이 담긴 다른 작품들도 지금이라면 피하지 않고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