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e짠돌이 - 평생 가장 확실한 재테크 = 절약습관
다음카페 '짠돌이' 엮음, 이보슬 글·구성 / 영진.com(영진닷컴)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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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으면 실제로 '짠돌이'에 대한 개념이 바뀌는 것이 사실이다. 예전엔 '짠돌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뉘앙스, 즉 인색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줄을 모르는 사람이란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별명이 짠돌이라 붙는다면 왠지 불쾌하고 자신의 행동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그런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짠돌이를 아낄 때 아끼고 쓸 때 쓰는 그런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다.

물론 여기 소개된 짠돌이들의 아낀다는 것의 강도는 보통 사람들과 현격히 다르다. 동전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10원짜리부터 차곡차곡 모으고, 폐품이나 폐지 수집까지 한다. 어렸을 때부터 세배돈을 모아 10년만에 유럽배낭여행의 꿈을 이룬 사람도 있고, 젊은 새댁들도 남편들의 적은 수입에 부응하여 알뜰살뜰 아끼는 살림을 한다. 솔직히 주방용품들의 재활용을 소개할 때는 실속있는 살림법에 메모를 해두기도 하고, 당장 실행해보기도 하고 그랬다^^

하지만 간간이 약간은 이런 신세대식 짠돌이 개념에 어긋나는 부분이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휴대폰을 분실신고 했다가 1달마다 다시 찾았다고 말하고, 또 다시 금방 분실신고를 해서 한달에 3000원 가량의 핸드폰료를 낸다는 건... 솔직히 아낀다는 생각이 들기보단 편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통신사들 역시 여러가지 서비스로 부당이익을 취하는 걸 생각하면 나도 그 방법을 이용하고 싶지만 말이다, 쩝.

이 책을 구입하기 전에 이 까페에 먼저 가입해 보았다. 거기 회원들이 올리는 글 중에는 궁상맞은 짠돌이, 인색한 짠돌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짠돌이는 되지 말자는 글이 다수 올라온다. 아끼더라도 지혜롭게 아끼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 때는 아낌없이 베풀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투자에도 아낌이 없으라는 조언은 정말 현명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또한 신용카드 때문에 빚독촉에 시달리거나 생활고를 겪은 사람들이 올리는 자신의 체험담 또한 젊은 사람들의 자각심을 일깨우기에 충분한 것 같다. 그 고통의 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도 많고, 또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공감이 가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여튼, 요즘 소비생활의 주축이 되고 있는 젊은 사람들이 읽으면 뭔가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책이다. 쓰는데 여념이 없는 남동생과 남자친구에게도 권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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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천에는 똥이 많다
이창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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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지금은 문화부 장관이 된 그가 세상을 보는 시선은 뭐랄까... 참 생긴 것 답지 않게 시니컬하다. 생긴 건 마치 어느 시골 학교의 마음 좋은 선생님처럼 생겼으면서 말이다(실제로 국어 선생님이기도 했지만). 오아시스를 보면서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모든 걸 너무나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구나. 너무나 치졸하고 너무나 부끄러워서 숨기고 싶은 것을 잔인하리만큼 집어내어 적나라하게 말하고 있구나라고.

특히 '진짜 사나이'에 등장하는, 평범한 노동자였다가 점점 투사로 변모해 가는 사람의 이야기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건 그의 변신이 놀라워서라든가 행동은 하지 못한 채 그저 머릿속으로만 치열한 인텔리 화자의 비겁함이 부끄러워서라든가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 짧은 이야기 속에서 나에게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건 화자의 후배였다.

그 후배는 처음에 그 노동자의 변신을 적극적으로 돕고 그에 대한 기사까지 싣겠다고 하지만, 곧 그에 대해 약간은 경멸적인 시선을 갖게 된다. 무작정 설치는 것이 눈에 거슬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그런 후배의 태도에 굉장히 공감했다. 내가 후배였더라도 그런 태도를 갖게 되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본질적인 문제는 알지 못한 채 그저 어디에나 나대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설사 그가 본질적 문제까지 알았다 하더라도 상황이 그리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렇게 그는 너무 부끄러워서 차마 인정하기 싫은 그런 부분을 너무나 정확하게 집어내어 적나라 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마치 그의 책을 읽고 그의 소설을 읽는 건 자학에 가깝다. 인정하기 싫은 나의 치졸함, 비겁함까지도 모두 들켜버리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하늘등'은 약간 실망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주인공이 자신의 개인주의(부정적인 의미의)를 깨닫는 부분이 너무나 예리한 지적이라고 말하지만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그건... 너무나 뻔한 결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전체를, 역사를, 우리를 인식하지 못하던 개인이 결국은 자신 안에 갇혀있었음을 깨달으며 조금 더 큰 자아로 나아가는 건 좀 식상한 끝맺음이 아닌가...

하지만 '역사 속에 서 있는 나'로서의 깨달음을 얻게 해 준 그것만으로도 가치있는 글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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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나라의 앨리스 네버랜드 클래식 1
루이스 캐럴 지음, 존 테니엘 그림, 손영미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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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은 느낌은 뭐랄까... 마치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야기를 짜집기한 듯한 느낌이었다. 우선 작가의 그 전 작품인 너무나 유명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비롯하여, 이름을 잃어버리는 숲 이야기도 왠지 들어본 듯한 이야기고... 왠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만큼의 흥미진진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그 나라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일 수도 있겠고, 번역상의 문제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만큼의 흥미진진함이 없다는 게 조금은 아쉬웠다. 하지만 물론 기억에 남는 장면들은 있다. 하얀 여왕이 양으로 변하고, 양이 주인으로 있는 가게가 배로 변하고, 뜨개질 바늘은 노로 변하고, 다시 가게로 변하고... 속도감 있는 전개는 정말 흥미진진했고 이 장면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정말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열광할 수 있는 장면이 될 수도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거울이란 매개는 언제나 미스테리한 무언가를 지닌 듯이 생각된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나 혹은 책을 쓰는 사람에게 거울은 상당한 매력을 가진 물건이 아닌가 싶다. 거울 속의 세계라는 설정, 그리고 거울에 비친 모습이라는 설정은 그 설정만으로도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나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거울 속의 세계는 뭔가 더 나을 것이라는, 혹은 반대이기 때문에 현재의 나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까? 혹은 나의 모습은 그대로일지라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혹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인가 환상적이고 특이한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일까? 여튼 거울 속에 비친 거꾸로 된 세상은 뭔가 매력적임에 틀림없다.

정말 거울 속 세상이 있다면, 거울 속에 비친 내 방 문을 열면 그 밖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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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owcat의 혼자놀기
권윤주 글, 그림 / 열린책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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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너무 뻔뻔해진다고 했더니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그건 세상의 시선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글쎄 그런걸까?

나의 뻔뻔함의 강도가 남들보다 유별난 건 인정한다. 지하철에 목이 끼고서도-_-(난 이런게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다. 게다가 목이 끼다니!!) 뭐 별 일 없었던 듯 그 지하철을 탔다면 믿을까? 가끔은 이런 나의 뻔뻔함에 걱정도 조금은 했었는데, 뭐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나만 괜찮다면 다 괜찮은 것 아니냐는 식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정말 그럼 다 괜찮은 것 아니야?

뻔뻔해 지는게 세상의 시선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라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건 아닌 것 같다. 뻔뻔해 진다는 건... 세상의 시선을 더이상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세상이 날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는 것, 세상이 나에게 씌운 그물을 끊어버리는 것, 스노우캣처럼 그냥 박스를 뒤집어 쓰고 있는 것.

내가 처음 접한 스노우캣은 그렇게 박스를 뒤집어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런 고양이의 모습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지금도 세상은 다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목숨을 건 듯 보인다. 나오는 책들마다 화술의 기술이니 협상의 법칙이니 그렇게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님을 강조하는 내용들 뿐이고, 뭐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너무나 강조해대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느긋느긋 살아가는 스노우캣의 모습은 서울 한복판에서 몇년 만에 처음보는 친구를 만났을 때의 느낌이랄까.

남들이 뭐라하든 그냥 자신의 공간 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하는 스노캣의 모습은 어쩌면 아둥바둥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저 가슴 속에서 진심으로 바라는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스노우캣 다이어리가 연재되고 있는 홈페이지에 들러보곤 한다. 모처럼 마음에 드는 조용한 까페를 찾았다가 갑자기 나타난 시끄러운 손님들 때문에 아쉬워하며 나오고, 좋아하는 빵을 먹기 위해 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오는 스노우캣. 가끔은 게으른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도 불구하고(실은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만) 내 할 일 하는 귀차니스트 스노우캣. 언젠가는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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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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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불가능한 것들로 가득차 있다. 당장 할 수 없는 것, 내일도 할 수 없는 것, 먼 미래에도 할 수 없는 것. 불가능은 그 기간에 비례하여 그 견고함을 더해가고, 결국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으로 바뀌어 버린다. 영원한 불가능. 이 얼마나 숨막히는 말인지-

오현우가 꿈꾸었던 세상.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이 꿈꾸었던 세상(이렇게 말하면 마치 내가,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마치 방관자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지만). 그들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세상에 희망을 걸었던 것이리라. 그 세상이 얼마나 먼 미래에 올 지 그들도 알 수 없었을 것이고, 그 세상이 올 지조차 확신 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내 아이의 아이의 아이 그 먼 미래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그 믿음으로 자신을 내던질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소설에서 가장 생생하게 떠오르는 건 오현우가 감옥에서 길들이던 비둘기들이다. 하얀 절름발이 암컷 순이, 그리고 순이를 흉내내던 다른 하얀 암컷 비둘기. 결국 아끼던 순이가 죽어버려 다시 한번 애착의 무상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결국 세상은 그런 게 아닌 듯 싶다. 모델이 되는 이가 있으면 이를 따라하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 물론 오현우와 그 동료를 모델로 따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면 세상은 더 빨리 더 많이 더 바람직하게 변화되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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