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루키가 쓴 단편‘이라는 기대를 버리고, 어깨에 힘을 뺀 채로, 신인 작가의 책을 읽는다는 기분으로 읽었다. 그렇게 읽으니 정말 재미있었다. 깊이가 얕을 수는 있겠지, 동어 반복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 정도의 퀄리티로 이 정도의 재미를 주는 단편을 쓰는 작가는 흔치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이는 보호 받아야 할 약자가 아니라는 것.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라는 것. 이 전복적인 생각을 김소영 작가는 따뜻하고 정중하게 전한다.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한 사회의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다면, 김소영의 책이 이렇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작은 희망을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철왕국 프로이센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 박병화 옮김 / 마티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로 예전부터 프로이센의 역사에 호기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한 책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마티 출판사에서 <강철왕국 프로이센>이 출간되었다. 첫 페이지를 읽기 전부터 나는 내가 이 책을 사랑하게 될 것임을 확신했다.

 

그 예감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이 책은 프로이센의 역사에 대한 완벽한 입문서이다. 17세기 초중반의 30년 전쟁으로 인한 폐허를 극복하고 서서히 국력을 키움으로써 유럽의 주요 플레이어로 등극했다가, 나폴레옹에게 처참하게 짓밟힌 뒤 다시 힘을 길러 프랑스와의 복수전에서 승리하고 독일 제국을 완성하며 부활한 국가, 그러나 끝내 제 힘을 주체하지 못해 스스로 무덤을 판 국가의 흥망성쇠가 마치 한 인물의 일대기처럼 펼쳐진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의 장점은 분량에 있다. 두꺼운 벽돌책처럼 보이지만 생각보다 읽을 때 여유를 준다. 하나의 챕터를 너무 세밀하게 다루지도 않고, 그렇다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넘어가지도 않는다. 역사 채널에서 방송되는 2시간짜리 다큐멘터리처럼 늘어지지도 않고, 10~20분짜리 영상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있지도 않다. 그 감각에 있어서 40~50분 정도 분량의 넷플릭스 드라마와 유사하다. 긴장감이 유지되는 동시에 풍성한 정보도 얻게 된다.  

 

특히 이 책은 줄 간격을 어느 정도 확보함으로써 독자에게 여유와 숨 쉴 틈을 제공한다. 줄 간격을 좁혔다면 책이 지금처럼 두꺼워지진 않았으리라. 그래서 책을 읽다가 밀려드는 역사와 시간의 흐름에 조금 지쳐도 숲속 벤치에 앉듯이 쉴 수 있다. 그 여유로움이 이 벽돌책의 매력이다.

 

다 읽고 나면 유럽 역사에 대해 정말 많은 것들을 이해하게 된다. 프로이센의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곧 근대 유럽의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과 같다. 프로이센이라는 국가를 통해서 프랑스, 러시아, 영국 등 다른 나라의 역사와 만나게 된다. 프로이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17세기 유럽, 18세기 유럽, 19세기 유럽, 20세기 유럽이 구별된다. 


또 어떤 대목에서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떠오른다역사를 공부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다른 나라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이 책을 읽다보면 프랑스영국러시아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로마제국처럼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프로이센이 우리나라처럼 느껴진다프로이센의 어느 국왕은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 영조-사도세자를 연상시키고어느 국왕은 세종대왕 혹은 정조와 닮았다. 그것이 참 반갑고 재미있다.


저자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호주 출신의 역사가이다. 이미 <몽유병자들> 같은 작품으로 국내외로 인정받은 실력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통해 이 작가와 처음 만났는데, 서술이 굉장히 균형 잡혀 있다. 프로이센을 위대한 국가처럼 찬양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악마의 국가라고 깎아내리지도 않는다. 프로이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 남성적인 특성, 전쟁광 같은 것들을 수용하면서도 그 이미지 이면에 다른 무언가도 있었음을 콕 짚어낸다. 어떤 도그마에 빠져들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진실에 다가가려는 자세가 느껴진다. 

 

이 책은 그야말로 교과서 같은 책이고, 오래 읽힐 책이며, 전문가와 일반 대중 모두를 사로잡을만한 책이다. 이 책과 만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 이 서평은 마티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하지만 100퍼센트 진심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 - 사르트르와 하이데거, 그리고 그들 옆 실존주의자들의 이야기
사라 베이크웰 지음, 조영 옮김 / 이론과실천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보통 책을 읽을 때 85% 정도에 다다르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체크해본다. 책과의 대화가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마음의 준비를 하는 느낌으로. 사라 베이크웰의 이 작품을 읽을 땐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중언부언 하나 없이 알맹이로 가득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주는 민주화운동에 삶을 걸었던 아버지, 그래서 늘 부재했던 아버지, 뒷모습만 남긴 아버지의 앞모습을 그려내려는 딸의 마음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민주화운동은 보통 사람들에게 영광의 역사로 기억되지만, 민주화운동으로 삶이 찢긴 사람도 있었다. 이 책은 영광의 그림자에 가려진 이들을 조명한다. 그런데 장혜령 작가가 쓰는 조명이 참 기묘하다. 흐릿하고 깜박깜박하는데 선명하기도 하다. 한 문장, 한 페이지는 물음표를 던지는데 다 읽고 나면 마침표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쉽게 보지 못한 주제와 표현 방식이 결합되어 탄생한 이 책, 진주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2009527. 광장에는 우리가 당신을 지켜주지 못했으며 당신 없는 세상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냐며 가슴 치며 우는 여자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 속에서, 독재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통곡하던 그날 그 거리의 여인들이 있음을 알아보았다.’ p.35

 

장혜령 작가의 진주는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 때 흰 옷을 입고 눈물 흘리던 여인들과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 때 애도하던 여인들이 같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시작한다. 마치 이렇게 선언하는 것 같다. ‘이 책은 특정한 정파를 비난하거나 옹호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진주는 정파를 넘어선 인간 자체에 대해 말한다. 환상을 쉽게 믿어버리는 어리석은 인간, 그 신념을 위해 삶과 가족 모두를 저버리는 숭고한 인간, 환상이 깨지는 순간 차갑게 뒤돌아서는 잔인한 인간(), 무너진 환상의 폐허에서, 그리고 그 옆에 지어진 새로운 환상의 그림자 속에서 눈물 흘리는 슬픈 인간. 그리고 그 눈물을 바라보며 하나의 작품을 엮어내는 인간.

 

시 한 편에, 오랜 시간과 감정을 다 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진주라는 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책이 세상에 나와 이 자리의 여러분을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p.289

 

진주는 장혜령 작가가 썼던 이방인이라는 시로부터 탄생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272페이지로 된 긴 서정시 같다. 진주를 읽으면 시를 읽는 기분이 들까? 시적인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에 수많은 답이 있겠으나, 나는 간격이라고 답하고 싶다. 간격은 전류를 흐르게 하고 어떤 힘을 만들어낸다. 고무줄을 양 옆으로 당길 때의 긴장감,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강렬해지는 연인에 대한 사랑을 떠올려보면 될 듯하다. 진주에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 내용과 내용 사이의 간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딸과 아버지 사이의 간격이 있다.

 

1. 문장과 문장 사이


문체는 말 그대로 글의 육체이다. 인간에게 육체가 중요한 만큼 문체도 글에서 큰 역할을 한다. 진주라는 글의 육체는 독특하다. 한 번도 이런 글을 읽어본 적이 없다. 내용은 짧은 호흡으로 금방 끊기는데, 그 끊기는 흐름은 쭉 이어진다. 마치 바다와 같아서, 파도는 단속적으로 몰아닥치는데 그 몰아닥치는 흐름 자체는 영원하다.

 

이 작품에는 명확한 기승전결이 없다. 시제가 자주 바뀌기도 하고, 글이 다루는 대상도 시시각각 변한다. 딱딱한 신문 기사 다음에 바로 동화를 들려주는 식이다. 문장들도 산문처럼 빡빡하게 연결되지 않고 시처럼 느슨하고 은근하게 연결된다. 글의 알맹이를 이해하려면 문장과 문장 사이에 머물러야 한다. 처음 진주를 읽을 때는 텅 빈 공항 활주로를 걷는 조그만 사람처럼, 이 광막한 공집합에 당혹스러웠다. 원래 나는 칸막이가 딱딱 쳐져 있는, 이를테면 김훈의 글이 지닌 엄격함을 좋아한다. 김훈의 문장이 폐소공포증과 가깝다면 장혜령의 문장은 광장공포증과 이웃한다. 나에게는 광장보다 작은 방이 더 편하기에, 고백컨대 90페이지 정도까지 진주를 읽다가 포기했다.

 

며칠이 흐른 어느 날 이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날은 왠지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정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장혜령 작가가 건네는 감각들의 흐름에 나를 온전히 맡겼다. 그 결과, 공항 활주로나 밤바다에서만 느낄 수 있는 광활함과 무한함, 영원히 지속되는 시간성을 체감할 수 있었다. 기존의 독서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낯선 기쁨이었다.

 

2. 내용과 내용 사이


진주안의 이야기들은 성스러움과 속됨, 죽음과 삶,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면서 시적 아이러니라는 일관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파도치듯 단속적으로 끊기는 가뿐 글의 호흡은 시적 아이러니를 통해 하나의 긴 호흡으로 종합된다. 가령 이런 식이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고문을 당한 뒤 후유증으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동지에 대해 죽는 순간까지 누군가에게 손 내미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육신의 빛이 모두 꺼졌지만 두 눈만은 여전히 빛나는 채로 그는 찾아온 모든 사람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라고 이야기한 다음, “...오랜만에 만난 두 엄마들이 이야기 나누며 함께 먹을 떡국을 끓일 때면 우리 세 여자아이들은 크래파스로 사인펜으로 함께 그림을 그리고 색깔 찰흙으로 가짜 송편을 빚으며 놀았습니다.” 라는 문장이 나온다. 아버지의 동지의 죽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삶을 살아가는 아내들과 아이들이 한 페이지 안에 엉겨붙어있다.

 

오늘은 평화에 관한 영화제가 열리는 날이다. 영화제가 열리는 이곳은 아파트 단지가 가득한 계획도시의 시내로, 그 중심에는 쇼핑센터와 인공호수, 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p.80

이 문장에서는 평화라는 숭고한 개념 다음에 계획도시의 속됨을 이야기하면서 기이한 감흥을 자아낸다.


화자가 마침내 변두리로 옮겨진 진주 교도소에 도착해서 둘러본 뒤의 문장은 이렇다. 낮잠 자던 버스 기사가 차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떠올리며 시적인 감상에 젖어드려는 에게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든다. 시적인 순간과 산문적인 순간이 교차한다.

 

무감한 산문적 세상은 시적인 순간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위안을 주기도 한다. ‘의 아버지는 무의미한 텔레비전 소리를 들으며 삶이라는 소란한 스펙타클에서 벗어나 잠시 쉰다.

티브이가 건강 채널로 바뀌고, 혈압에 좋은 이것은 무엇일까요, 하고 묻는 돌연한 성우의 목소리와 방청객의 웃음소리, 홈런을 치고 그라운드를 달리는 타자와 다가올 미래 백세까지 책임져준다는 상조 회사 광고, 그러다 바둑 대국을 중개하는 늙은 기사 목소리에 채널을 멈추며 그제야 당신은 잠시 휴식한다.” p.52

 

다른 자장을 가지고 있는 두 가지 개념이 부딪칠 때 아이러니라는 전류가 흐른다. 얼마 전 본,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의 후반부를 보면, 격렬한 항전이 벌어졌던 거리 위를 무심하게 지나는 버스와 그 버스에 무표정하게 올라타는 사람들이 카메라에 담긴다. 상반되는 두 가지 이미지, 과거와 현재, 특별한 사건과 평범한 일상, 성스러움과 세속성이 교차한다. 현실에서는 결코 겹쳐질 수 없는 두 가지가 예술 안에서 겹쳐질 때 우리는 감동을 느낀다. 진주의 힘도 바로 거기에 있다.


3. 딸과 아버지 사이

 

그는 돌아보지 않는다. 뭔가를 말할 것 같았는데 끝까지 그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붙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붙잡을 수 없는 뒷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p.272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문장들이다. 장혜령 작가는 아버지의 앞모습을 끊임없이 보려고 하는데 번번이 실패한다. 그러다 깨닫는다. 아버지는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 깨달음으로부터 이 글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혼자 추측해본다. 이 글은 끝없는 실패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 실패들은 결국 성공한다. 어떤 인물의 초상화를 그린다고 가정해보자. 그 인물의 윤곽선을 꼼꼼하게 그려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혜령 작가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녀는 아버지의 앞모습을 볼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주변의 배경을 채워나간다. 배경을 채움으로써 윤곽선이 저절로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의 문장들이 명확하게 지시하지 않고 두루뭉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이 시제를 끊임없이 바꾸고 다양한 장르의 글들을 집어넣는 것이다. 모든 간격들은 딸과 아버지 사이의 간격으로부터 탄생했다. 그리고 그 간격이 만들어낸 드넓은 공간을, 흰 새가 날아다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