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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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엄마를 부탁해』
- 이제 ‘엄마를 부탁해’야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내가 엄마의 부재를 가장 절감했던 때는 군시절이었다. 사실 나 뿐만 아니라 군을 다녀온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럴 것이다. 혹독한 훈련 속에 있노라면 정말 엄마 생각이 난다. 훈련을 가장한 극단적 가혹행위인 유격훈련 중 전투력 증강에 도무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PT체조를 하다보면 조교에 대한 극렬한 공격욕이 생긴다. 간사한 조교는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에 극단적 폭력정신의 오기만이 남은 병사들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한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온갖 분노와 폭력성으로 가득차 있던 훈련장은 폭풍감동의 장이 된다(으허엉~ 엄마~~).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를 잃어버리면서, 엄마를 잊고 있었다는 통렬한 자기반성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즉, 엄마를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잃어버리게 되었지만, 실은 이미 아주 예전부터 엄마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자식은 이길 수 없는 사랑의 정도 때문에 엄마에 대한 부채를 안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엄마에게 등을 돌릴 수 있게 하는 건 일상의 습관 때문이다. ‘엄마는 엄마기 때문에’라는 생각이 자식으로 하여금 부채감을 덜어준다. 이 생각은 일상에서 만나는 엄마를 향한 습관의 누적에 의한 것이다. 돌이켜 보자. 효도가 힘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그건 습관이 누적되어 형성된 일상 때문이었다. 우리는 모두 효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엄마의 깊은 사랑을 잘 안다. 하지만 우리의 효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군에 있으면서 효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엄마가 기대하고 계시는 교수라는 직업을 내가 갖게 된다면 그것이 효가 될까? 물론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수’라는 목표가 생기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 엄마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본말이 전도되는 것이다. 엄마는 내가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 효란 무엇일까? 나는 엄마가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교수가 되었어도 불행하게 산다면 그것은 효가 될 수 있을까? 자식을 교수로 키웠다는 칭찬이 엄마를 뿌듯하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식의 불행을 행복으로 느끼는 엄마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엄마와 함께 산책을 나가게 하는 그 일상이 효가 아닌가 한다. 효도란 내일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지금에 있다. 물론 엄마와 산책을 나가지 않던 나는 그 일이 어색하고 민망하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일상의 습관을 바꾸는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엄마를 외롭게 내버려 두는 것, 그 보다 더한 불효가 있을까.
 

 다음으로 연기한 효도의 그림은 결코 오늘에 오지 않는다. 도대체 거창한 효도가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일상을 함께 하는 우리의 시간 속에서 할 수 있는 실천들을 해나가야 한다. ‘내가 이렇게 돼서 요렇게 효도해야지’라는 태도는 효도가 부재한 오늘을 정당화해주는 핑계일 뿐이다. 습관으로 축척된 일상을 바꾸고자 품는 용기는 그 무엇보다도 어려운 것이다. 엄마는 “갑자기 얘가 왜 이러니, 남우세스럽게?”하겠지만, 그날 밤 잠자리에서 흐뭇한 미소 속에서 행복한 잠에 들지 않을까. 
 

 『엄마를 부탁해』 속에 나온 자식들은 모두 효도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엄마와 일상을 함께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엄마를 잃어버리기 이전에 이미 엄마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효도는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거창한 성과를 거둬야지 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저 엄마의 곁에 있는 것, 엄마와 일상을 여전히 공유하는 것이다. 군에 있을 때 그렇게나 효도 해야지 마음먹었음에도 막상 전역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고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새로운 일상의 리듬을 구성하려는 시도는 민망함과 어색함 때문에 매번 흐지부지 됐다. 하지만 오늘은 새빨간 얼굴을 내미는 용기를 갖고서 엄마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가야겠다. 그리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어야겠다.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는 꼭 이렇게 말하겠다. “엄마, 사랑해요.” 이제는 누구든 ‘엄마를 부탁해’야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ps.
이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와는 극대점을 형성하고 있다. 똑같이 ‘엄마’라는 소재를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엄마’를 형상화한다. 신경숙의 ‘엄마’는 전형적인 희생적 사랑의 존재다. 반면 봉준호의 ‘엄마’는 같은 모성적 사랑이지만 더 없이 폭력적일 수도 있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두 작품을 비교하며 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 마더감상문: http://www.cyworld.com/cisiwing2/3299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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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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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
- 나 역시도 반(反)부패시민혁명을 꿈꾼다.

 나는 부산출신이지만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삼성라이온스 팬이었다. 그래서 ‘삼성’이라는 브랜드에 대해 막연하게 동경하고 있었고, 대한민국의 대표선수로 세계를 호령하는 삼성을 보며 자부심을 가졌다. 삼성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 “또 하나의 가족 삼성”(광고CF). 큰 집의 사촌형이 무수히 많은 경쟁자를 꺾고 삼성 애니콜 연구소에 들어갔을 때, 나 역시도 집안의 경사라 여기며 기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형은 5년을 채우지 못한 채 회사를 나왔다. 퇴근을 용납하지 않는 경쟁 시스템 속에서 머리를 함껏 뜯긴 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린 아들을 안으러 퇴사해버렸다. 높은 연봉을 차버리고 공무원이 된 형은 ‘다행이다’라고 말한다.  


 나도 나이를 먹고 공부를 해가면서 ‘삼성’이라는 것이 그렇게 마냥 멋지기만 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갔다. 삼성은 불법 비자금, 노조불사, 정경유착 등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비리 없는 기업이 어디 있으며, 삼성이 쓰러지면 우리나라 경제가 무너진다. 삼성이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데 이건희가 돈 좀 쓰면 어떠냐?"라는 사람들의 말 앞에 고개를 끄덕이며 ‘뭐, 현실은 그렇지.’라고 체념하곤 했다. 그런데 김용철이라는 사람이 등장해 내부 고발을 해버렸다. 삼성의 허상과 실상을 노골적으로 까발렸다. ‘그래도 삼성’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전혀 그렇지 않은 삼성’을 선언했다. 나는 나의 순진함에 몸서리를 쳤고, 여전히 허상의 굴레에 있거나 체념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다시 삼성을 이야기 해보고 싶어졌다. 삼성은 내가,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뒤틀려 있었다. 그리고 그 뒤틀림 자체가 대한민국이었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둘러싼 주요언론들의 태도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과적으로는 같았다. "아무 책이나 광고할 순 없지 않느냐"며 버럭한 <조선일보>. "누굴 잡으려고 이러느냐"며 흥분해서 화를 내는 <중앙일보>. 그저 "미안하다"고만 하는 <매일경제>. 뜬금없이 "단가가 맞지 않다"는 <동아일보>. 반응은 달랐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삼성에 해가 되는 광고는 실을 수 없다는 거였다.(『삼성을 생각한다』2, 49~50쪽) 삼성은 그저 하나의 회사에 불과하다. 하지만 언론조차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절대권력이 되버렸다. 흔히 언론은 시대의 양심을 발언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삼성의 광고를 싣지 못하면 휘청이게 되는 것이 오늘날 신문사의 현실이다. 삼성에게 광고비를 받아  먹고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신문사들이 과연 삼성의 그림자에 대해 소신껏 발언할 수 있겠는가? 입법·사법·행정의 삼권이 삼성에 휘둘릴 때, 언론조차도 이미 포섭되어 있다면 국민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재벌의 비리를 공개해 봤자 소용없다고 이야기했다. 삼성 비리 관련 재판 결과가 나오자, 이런 목소리에 “역시나”하고 힘이 실렸다. 이들은 말한다.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고. “질 게 뻔한 싸움에 뛰어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내 생각은 다르다. 정의가 패배했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정의가 이긴다”는 말이 늘 성립하는 게 아니라고 해서, 정의가 패배하도록 방치하는 게 옳은 일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삼성 재판을 본 아이들이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이 책을 썼다.p.447(강조는 인용자)  


 김용철은 “역시나”일지라도 계속 양심의 발언이 지속되기를 요청한다. 그는 “현실이 절망적이라는 게 희망을 포기할 이유는 될 수 없다. 체념과 냉소를 전염시키는 일 역시 부패의 공범이다. ‘다 그런 거지’라는 체념과 냉소 속에서 부패는 관행이 되고, 결국 거스를 수 없는 구조가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설령 권력이 양심고백한 내용을 덮어버린다고 해도, 비리를 세상에 알리는 일은 의미가 있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이런 이들이 늘어나면, 권력이 비리를 덮어버리는 데도 한계”가 오기 때문이다. 김용철은 “나는 모든 시민이 부패에 맞서는 장면을 꿈꾼다. 반(反)부패시민혁명에 관한 염원이다”라고 말한다.

 

 김용철은 이 책을 통해 삼성의 갱신을 요구하는 것이지 삼성의 종말을 이야기 하고 있지 않다. 3부의 타이틀 자체가 ‘삼성과 한국이 함께 사는 길’이다. 이 책에 대한 주요 공격 중 하나가 삼성을 파괴하려는 김용철이라는 허상 만들기인데, 실상 이 책은 삼성을 파괴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비리 없는 기업이 어디 있으며, 삼성이 쓰러지면 우리나라 경제가 무너진다. 삼성이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데 이건희가 돈 좀 쓰면 어떠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김용철은 철저히 해명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관념이 얼마나 헛되고 또 위험한 생각인지를 일깨운다. 삼성은 우리를 먹여 살린다기 보다는 오히려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파괴당해 가면서도 그저 삼성을 사랑한다. 바로 무지하기 때문이다. 삼성과 나의 관계, 삼성과 대한민국의 관계가 진실이란 토대 위에서 다시 세워져야 한다. 그래야지 삼성과 한국이 함께 살 수가 있다. 이 책은 그 길의 시발점이 될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김용철은 이건희와 같은 큰 비리만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비리 역시 큰 문제고, 어쩌면 그러한 작은 비리의 용인이 큰 비리를 막지 못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한다. 비리와 눈감음의 일상화가 대한민국을 병들게 한다. 우리는 거대한 삼성의 비리 앞에 무력하게만 느껴진다. 김용철의 처절한 양심선언은 막강한 권력에 의해 짓밟혀졌다. 하지만 이미 그 자체로 반(反)부패시민혁명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이다. 김용철의 선언이 없었다면 난 여전히 순진하게 삼성을 사랑하며, 애국을 하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허상을 치워내고 고민한다. 어떻게 해야 반(反)부패시민혁명이 가능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나의 시작은 이것이다. 삼성의 그림자를 소상히 밝힌 이 책이 많은 독자를 만나게끔 하는 것. 그리고 그 독자들과 더불어 ‘삼성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양심적 지식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삼성’에 대해 고민하고 함께 글을 쓴 책이 나왔다. ‘이건희, 그리고 죽은 정의의 사회와 작별하기’라는 부제가 달린 『굿바이, 삼성』이 그것이다. 나는 이제 이 책을 보러 가도록 하겠다. 당신도 함께 보고 같이 이야기해 보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들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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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세대 새판짜기
우석훈 지음 / 레디앙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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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피를 머금은 혁명이 아닌, 재미와 행복을 머금는 혁명을 꿈꾼다. 
 

 나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혁명’의 이미지는 피를 머금고 있는 폭력 위에 서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우석훈은 ‘혁명’을 로망으로서 가지고 온다. 그리고 혁명의 호출 이유는 다름 아닌 나의 세대, 즉 88만원세대를 위한 것이었다. 

 왜 나는 ‘혁명’의 이미지를 폭력으로 규정하고 있었을까. 혁명이란 항상 억압받고 고통 받던 자들에 의해 발발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만약 내가 왕자이거나 대자본의 소유자라면 혁명에 대한 혐오가 유효하겠지만, 나 역시 그저 그렇고 그런 평민이 아니던가. 어쩌면 나도 모르게 각인된 반공이데올로기 때문이거나 혹은 겸손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윤리관이 혁명을 밀어내게끔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분명히 ‘혁명’은 폭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적 요구는 당연히 권력가와 기득세력들에 의해 무참히 밟히게 된다. 피의 향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혁명세력군 안에서도 혁명이라는 대의 앞에 개인의 주체성이 탄압받고 억압받는다. 혁명은 기득세력의 총질 앞에 피를 흘리게 되고, 혁명세력 내의 대의적 폭력 안에서 썩게 된다. 역사 속의 혁명가들은 순교자가 되거나 독재자가 되었다. 

 그런데 우석훈이 가져오는 ‘혁명’은 사뭇 다르다. 그가 말하는 ‘혁명’은 마치 놀이를 통한 상상력의 실현처럼 느껴진다. 그가 꼽는 최고의 혁명가가 다름 아닌 코코샤넬이다. 샤넬은 여성 통제 수단으로서의 의상을 여성 해방의 의상으로 탈바꿈 시켰다. 그렇기에 우석훈은 샤넬을 “여성을 해방시킨 전사”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혁명, 즉 “남자들의 정치적 혁명은 역사 속에서 아픔만을 남겨 준 채 사라졌지만, 샤넬이 이뤄 낸 혁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우석훈의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조용히”의 혁명은 어떻게 가능할까. 우선은 쫄지 말아야 한다(“쫄지마 안죽어!”). 쫄지 않아야만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음의 소리’는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안 들린다고? 그럼 지금 네가 당장 하고 싶은 것이 뭔데?). 만약 쫀다면 “마음의 소리 따위 개나 줘버려”가 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사회는 “너 그런 식으로 하다간 경쟁에 뒤쳐서 루저가 될 거야.”라고 위협하면서 무한경쟁의 게임에 끊임없이 참여하게끔 유도하기 때문이다. 

 작가 박민규는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팬클럽』에서 자발적으로 경쟁을 거부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니깐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고,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는”태도의 사람들이 이 시대에 어떤 꼴이 되었는지 말이다. 그들은 믿기 힘들게도 “다들 잘 산다”가 되었다. 물론 그들은 예전에 비해 적은 소득을 얻게 되었기에, 형편없이 작은 집에서 살게 되고 그닥인 자동차를 타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보다 풍요로운 시간 속에서 많은 ‘사랑’을 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박민규는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무한비난과 조롱 속에서도 무한경쟁의 게임을 종료하고 자발적으로 나올 수 있는 ‘말도 안 되게 용감한 사람, 즉 쫄지 않는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나는 이 시대를 견디며 살아가는 방법은 ‘재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깐 뭘 해도 답이 없어 보이는 이 시대에 그래도 지속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는 요소가 ‘재미’라는 것이다. 물론 ‘재미’ 운운하다가 인생 망칠 수도 있다. ‘음악’에의 재미를 추구하려고 학교를 때려 치고 그 길에 매진한다고 해도 모두 서태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의 성취가 이 시대에 돈으로 환원되지 않을 수도 있고, 하고 싶어서 추구했지만 도통 재능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깐, 나처럼 ‘재미’운운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돈 따위 개나 줘버려” 같은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 물론 나는 ‘재미를 동력으로 삼은 지속가능성의 힘이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 시켜준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 하며 살아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만, 그건 만고 내 생각이고 사실 내 인생 어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내 친구들은 이런 나에게 “너는 돈이 너를 쫓아다니지 않으면 내가 너를 부양하게 될 것 같다.”라고 핀잔을 준다. 

 내가 보편적 사회복지, 최저연봉제의 실효성 획득, 북유럽식 복지국가의 구현 등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사실 이러한 나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그 길이 실은 자본의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일 경우, 그 사람은 꿈 때문에 말라 비틀어 질 수도 있다. 물론 진정한 꿈이라면 가난을 벗 삼아 꿈의 행복으로 충당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인간이란 원래 육체적 나약함이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에 간사하게도 꿈을 자신이 배신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꿈은 달성함으로서 가치가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당장에 나를 행복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그런 재미와 닿아있는 것이어야 한다. 꿈은 자칫 잘못하면 마약과 같은 것이 될 수도 있기에, 끊임없이 ‘재미’와 ‘행복’에 견주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글이 삼천포의 구멍가게로 빠졌는데, 남은 잔 비우고 다시 돌아오자. 어쨌거나 나는 “이렇게 조용”한 혁명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샤넬의 혁명성은 기본적으로 그 사회가 요구하는 어떤 것에 ‘즐(KIN)’을 때리고, 쫄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주체적으로 해나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자기만족적 쾌락이 아닌 자신의 철학을 패션으로 구현해 냈기에 사회적 파급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지금의 현실로 환원해본다면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철학을 요구하는 이 사회에 ‘즐’을 때리고, “넌 망하게 될 거야. 이제 막 사는구나. 경쟁하지 않으면 발전 따위 할 수 없어. 스펙 안 쌓고 뭐하니? 결혼 안 할 거냐? 요즘 연봉 3000이하면 선도 안 들어온단다.” 따위에 쫄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재미있게 하면서 지속가능한)을 천착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 혼자 좋아하면서 꺄르르 대는 덕후스러운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활동으로 영감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사회적 파급력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이 시대의 ‘혁명가’가 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혁명가’는 샤넬급을 말하는 것이고, 그냥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실천의 정도와 파급력과 관계없이 모두 ‘혁명가’라고 생각한다. 

 박민규가 말했던 “삼미슈퍼스타즈의 야구”를 삶의 철학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 우석훈이 말하는 “이렇게 조용히”의 혁명가들, 그리고 매번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다중”의 그들이며, 우리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갱신해 갈 혁명가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그 힘의 동력이 항상 ‘재미’와 ‘행복’을 머금고 갔으면 너무너무 좋겠다는 것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가야”라는 소리를 듣는 내 생각이다. 아, 그리고 나는 누구보다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확신한다(음, 음! 거기, 웃지 마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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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랄라 2011-02-10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현실적인 사람이라고)

두괴즐 2011-09-01 20:43   좋아요 0 | URL
^.^
 
[블루레이] 웰컴 투 동막골 - 할인행사
박광현 감독, 정재영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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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동막골

-망언이라는 장희민의 발언과 평화의 가능성  


 EBS에서 논술을 가르치는 장희민 강사가 한 발언이 문제가 되고 있다. 어떤 말이었는지 보자. “남자들은 군대갔다왔다고 좋아하죠. (···)자기가 군대 갔다 왔다고 뭐해달라고 만날 여자한테 떼쓰잖아요? 근데 그걸 알아야죠. 군대 가서 뭐 배웁니까? 죽이는 거 배워오죠. 여자들은 그렇게 힘들게 낳으면 걔네 죽이는 거 배워오잖아요. 그럼 뭘 잘했다는 거죠? 도대체가 뭘 지키겠다는 거죠? 죽이는 거 배워오면서. 걔네 처음부터 그거 안 배웠으면, 세상은 평화로워요.”1)

  특유의 어투로 군대와 남자를 조롱하는 그녀의 발언은 예비군 4년차인 나를 정말 빡치게 했다.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 속에 남·여를 구겨 넣는 비약 역시 너무나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해야 하는 것은 군대에서 배우는 일이 사람 죽이는 것이라는 발언은 사실이라는 점이다. 물론 평화를 위한 폭력의 강구이기에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군인의 역할은 적을 죽이는 일이고 군대는 그런 군인을 양성하여 실제 전쟁에 동원시키는 제도적 장치이다. 사실 군인들이 자신의 임무 배우기를 정지할 때, 군인으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포기할 때 진정한 평화가 온다. 물론 그러한 평화는 전 지구적으로, 모든 국가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위한다면서 군을 해산할 때, 북한도 ‘그래. 진정한 평화가 와야지.’라고 하면서 군을 해산한다면 평화가 온다(전 지구적으로도 마찬가지). 하지만 무장해제하는 우리를 보고 ‘아싸, 털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하면서 남침해 오면 우리만 개털린다. 그러니깐, 이상적인 차원에서 인류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평화의 방향이 있어야 하지만, 현실적 문제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순수한 이상의 지향이 오히려 현실의 폭력을 외면하는 기제로 작동할 수도 있게 된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과연 적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로 원수가 되어 죽고 죽이던 남북한의 군인들은 동막골 이라는 마을에 흘러 들어간다. 그곳은 ‘아이들처럼 막살자’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었다. 그리고 동막골은 남북한의 군인들 뿐 아니라 연합군인 스미스 대위도 들어오게 된다. 그러니깐 전쟁의 참정 대상자들이 모두 모이게 된 것이다. 이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지만, ‘아이들처럼 막살’고자 하는 마을사람들의 영향 탓인지 서서히 신뢰를 가져간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들은 친구가 되었고, 이 마을이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로 힘을 합쳐 이에 대항한다. 철천지 원수였던 이들은 “우리 이렇게 말고 다른 곳에서 다르게 만났더라면 참 재밌었을 텐데, 안 그래요?”라는 말을 남기고 폭격의 희생자가 된다.


 ‘적이란 정녕 누구였던가?’ 전쟁은 외부의 적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싸울 대상이 있어야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쟁에 동원되는 이들은 그 이유도, 그 전쟁의 가치도 사유할 수 없다. 그저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에 압도되어 닥치는 대로 해나갈 수밖엔 없다. 또한 나의 등 뒤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다. 적을 무찔러야 하는 너무나 명백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전쟁에서 너무나 명백한 건 어쩌면 ‘나의 적’, ‘우리의 적’이 누군지를 알 수 없다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 역시 똑같은 전쟁의 메커니즘의 희생자라는 생각을 한다면 전쟁의 실행은 불안정해진다. ‘총을 들고 내려오는 저 군인들이 적인가?, 아니면 나에게 총을 쥐어주고 저들을 죽여라고 한 우리의 국가가-저들의 국가가 적인가?’ 동막골 마을을 연합군의 폭격으로부터 막기 위해 힘을 합친 동막골에 흘러들어온 남과 북, 그리고 미국 군인은 자신들에게 되묻는다. “우리도 연합군 아닙네까?” 
 

 ‘적’을 규정하는 것은 군인이 아니다. 바로 국가다. 군인은 그런 국가에 의해 동원당할 뿐이다. 그리고 국가가 원하는 행동을 하게끔 유도 당한다. 더 없이 부드럽고 그럴듯한 정당성들에 의해서. 전쟁은 늙은이(어쩌면 국가)들이 벌이고 젊은이들, 그리고 민간인들의 피를 먹으며 지속된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그저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아들들은 그런 어머니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총질을 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과 우리의 가족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저들을 미워하게 되고 원수로 여길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그들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정녕 그들이 적인 것일까? 그들에게, 또 우리에게 총을 쥐어주고 싸우라고 한 그들. 어쩌면 그들이 적이 아닐까? 그래서 철학자 강신주는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진정으로 전쟁을 종식시키는 방법은 국가 그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라고.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과연 적이란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던져 주었다. 그리고 그 ‘적’이라는 것이 국가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군인은 ‘적’을 규정할 아무런 권리도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가 나의 친구라 하더라도 국가가 ‘적’으로 규정하면 우리는 그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야만 한다. 우리는 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누구나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가 않은 일이다. 국가의 호명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간파해야만 하고, 군인들의 자발적 임부 방기가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동 될 수많은 폭력을 비폭력으로 견뎌야 한다. 즉, 너무나 이상적이고 이상적인 일이 벌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법가 사상의 완성자라는 평을 받는 한비자는 이러한 측면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절대군주론을 주장했다. 절대군주가 평화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평화의 수행자로 자청하는 국가가 ‘미국’이다. 절대적 힘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은 우리의 평화를 수호하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지구상의 모든 지구적 전투들에 미국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평화라는 이름, 화해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총을, 아니 그 이상을 쏘고 있다. 

 우리의 평화에 대한 비전은 전지구적 무장해제를 통한 전쟁의 자연사라는 이상과 절대적 힘에 기반하는-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더 큰 폭력적 힘을 키우는 현실적 방식 사이에 놓여있다. 전자의 방법론은 유토피아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해 왔고, 여전히 후자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생각되어 지고 있다. 하지만 후자는 진정한 평화라기보다는 억누르고, 강제되고 있는 평화이다. 힘의 역학은 절대적으로 유지되지 않고, 변하기 마련이다. 이렇기 때문에 한 전쟁학자는 “전쟁을 종식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전쟁이 인류를 종식시키는 일이다.”라고 극단적으로 선언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국가라는 경계를 지우고 세계시민권이라는 관념을 만들어 낸다면 전쟁은 극복될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이 그나마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국가라는 경계를 지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구체적으로 상상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전체주의의 위험성 역시 조심해야만 한다. 물론 안드로메다에서 외계인들이 지구로 쳐들어온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지구인들은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동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쟁의 이름이 ‘아마겟돈’일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 ‘동막골’에 갈 수 있을까? ‘동막골’은 ‘웰컴’이라고 하지만 사실 ‘아이처럼 막사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예수는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전쟁을 넘어, 인류의 구원을 보고 싶다.



* 이미지 출처는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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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영상 주소: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LK8h0QUVU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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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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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나는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에게 이상형을 물어올 때면 대응하던 몇 가지 방책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그 중 ‘북극여우’타령을 하고 있다. ‘잉? 북극여우라니?’ 하겠지만 인터넷 검색창에 ‘북극여우’라고 쳐보면 나의 속내를 상당 부분 알 수 있게 된다. 일단 북극여우는 귀엽고 예쁘다. 새하얀 북극의 눈 속에서도 빛나는 하얀 모습을 하고 있다. 게다가 그 눈웃음은 북극의 눈도 녹 일만큼 달콤하다. 그런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그냥 예쁜 생명체가 아니라 ‘여우’라는 사실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여우는 동물의 고기를 냠냠 씹어 먹고 사는 육식동물이다. 그러니깐, 내가 “아이고 예뻐”하고 머리를 쓰다듬다가는 “끄아악~!! ㅠ.ㅠ”하게 될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나는 나를 안달나게 만드는, 상당히 치명적인 그런 사람이 좋다. 사실, 사랑에 빠지면 안달나고 치명적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쨌든 그런 심정이다.

 

 ‘북극여우’라고 해서 ‘오호라!’했겠지만, 사실 보통 남자들이 이상형이라고 얘기하는 정형화된 답변인 “예쁘고, 착한 여자”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냥 ‘포장’만 그럴듯하게 한 것뿐이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치명적 위험성에 대한 요구인데, 이것은 나의 연애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어쨌거나 살다보니 ‘이런 나라도’ 좋다는 ‘사랑구제위원급의 여성’이 두 분 계셨는데 나는 그녀들과 사랑에 빠졌었다. 그런데 솔직히 얘기해서 나는 항상 강자의 위치에 있었다. 연인의 관계에서 강자란 우습게도 덜 사랑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두 차례의 연애경험 동안 나는 사랑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렸고, 내 여친은 정말이지 나의 상상을 초월한 사랑의 스케일을 보여주었다. 돌이켜보면 사랑의 시작도 나에 대한 여자 쪽의 끊임없고 달콤한 구애로 가능했었다. 나는 정말이지 어지간해서는 사랑에 눈을 뜨지 못하는 봉사였던 셈이다.

 

 나는 달콤한 구애 덕에 사랑의 눈을 뜰 수 있었지만 사랑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 열등감은 나의 양심과 계속해서 부딪쳤고 우리의 사랑은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후적으로 이렇게 판단하고 있지만, 연애를 할 당시에는 “정말이지 꼴깝떠네.”라던가 “아놔, 인류를 닭으로 만들 셈이냐.” 따위의 핀잔을 심심찮게 들었다. 나 역시 좀 미쳐있었고, 사랑은 원래가 좀 미친 거라는 생각이다. 다만, 그 지속의 정도가 문제가 됐던 것 같다. 나에 대한 여친의 끝없는 사랑의 상승곡선과는 달리 나는 로봇화 과정을 밟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물론 내가 나쁜 놈이었다는 건 맞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식은 사랑을 부여잡고 연기를 하면서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깐.

 

 연애기간 동안 여친은 가끔씩 “꼭 예쁘게 하고 와야 해.”라고 요구하곤 했다. 그런 날은 여친의 측근에게 나를 자랑하는 날이었다. 사실 뭐 내가 그렇게 자랑할 만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여친의 측근들에게 나는 상당히 팔리는 존재였던 것 같다. 뭐랄까, 앵기기 좋아하고 폼잡지 않는 그런 나의 모습은 남자에게 상처받은 그녀들 사이에서는 특별한 무언가를 느끼게 했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 특별한 무언가도 ‘나’ 자체라기 보단 여친의 측근들이 ‘이미지화 한 나’에 불과한 것이지만. 어쨌거나 나는 여친이 아닌 타인에게도 의외로 사랑받는 존재였고, 그 타인이 여친의 측근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곤 했을 때는 극도의 의처(부)증에 시달렸다. 내가 사랑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불안해했던 것만큼이나 그녀는 내가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빼앗기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안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나의 인간관계의 상당부분이 잘려나가게 됐다. 나의 두 차례 연애는 너무나도 똑같이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고, 사랑에 대한 열등감에 여친의 불안이 더해지면서 나는 정말이지 지치게 되면서 포기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는 당연히 강자(더 사랑받는 것)가 좋다는 것을 앎에도 불과하고 사랑에 있어서 약자(덜 사랑받는 것)이고 싶은 나의 욕구는 이런 나의 연애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별 시답잖은 내용으로 서론을 구질구질하게 한 것 같다. 정화가 필요한 상황이니 박민규 형님을 불러보자.
 ······.

 아, 부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타이밍이 좀 안 맞았다. 왜냐하면 서론이 시답잖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정리를 해보면, 나는 외모 덕에 연애에 있어서 강자가 되었다는 생각이고 내 여친은 그 덕에 우월감과 불안감을 함께 안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나의 사랑에는 결국 다른 성격일지라도 ‘열등감’이 그 근저에 깔려있었다는 것인데 자,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불러보자.

 결국 열등감이란 가지지 못했거나 존재감이 없는 인간들의 몫이야. 알아? 추녀를 부끄러워하고 공격하는 건 대부분 추남들이야. 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인 거지. 안 그래도 다들 시시하게 보는데 자신이 더욱 시시해진다 생각을 하는 거라구. 실은 그 누구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데 말이야.(····) 보잘것없는 인간들의 세계는 그런 거야.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봐줄 수 없는 거라구. 그래서 와와 하는 거야. 조금만 이뻐도 와와, 조금만 돈이 있다 싶어도 와와,(···) 결국 그렇게 서로를 괴롭히면서 결국 그렇게 평생을 사는 거야. 평생을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말이야.(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p.220-221) 

 

 이건 뭐, 좀 너무한 발언이 아닌가 싶은데, “평생을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한다는 말에는 그저 할 말이 없어진다. 결국 부러워하는 것과 부끄러워하는 것은 자신과 누구를 비교하는 것에서 비롯되고 그 대상은 항상 자신보다 예쁘고 멋진 존재이기에 열등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쨌거나 살아가야 하므로 자신보다 못한 무언가와 비교하면서 안도하고 자위하는 것이다. 박민규는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좆밥들의 태도가 이 시대가 작동하는 원리임을 고발한다.

 

 너도 나도... 세상의 모든 아미고들은 이쁜이들을 좋아하게끔 만들어졌다고.(···) 그런거라니까, 지구 반대편의 여배우에 빠져 팬레터를 쓰는 게 아미고들의 운명이야.(···) 티브이에 나온 언니를 쫓아다니고, 함성을 지르지만 뭐 그 언니는 사랑해요 여러분... 하겠지만, 그 언니가 사랑할까?(···) 그건 너무 바보 같잖아요. 몰랐어? 모두 바보란 걸?(···) 아미고들은 그럴 수밖에 없어. 왜? 실은 가질 수 없는 거거든. 가질 수 없으니까 열광하는 거야. 세상의 걸들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하녀라 해도, 어쨌거나 신데렐라가 왕궁에 가는 이유는 왕자님을 만나기 위한 거니까... 설사 시간이 지나고 꿈이 깨진다 해도 그 전까진 꿈을 꾸는 게 인간인 거야. 그래서 걸들도 열광을 하는 거야.(···) 물론 오빠들도 고마워요, 또 여러분 사랑해요... 하겠지만 오빠들이 과연 걸들을 사랑할까? 마찬가지지. 실은 가질 수 없기 때문이야. 너와 나... 이런 아미고들과 걸들은 말이야... 그래서 좆밥이야. 세상의 좆밥들이지. 정말로 그런 오빠를 얻을 수 있는 언니들은 말이야, 또 그런 언니를 만날 수 있는 왕자들은 말이야... 서로에게 열광하지 않아. 왠지 알아? 시시하기 때문이지. 언제든 가질 수 있는 건 누구에게나 시시한 거니까. 뭐, 그래도 좋은 거야. 돈만 주면 뭐든 하겠다는 인간들이 널린 게 사실이고, 윙크 한 번 날려주면 페이를 지불할 인간들도 널린 게 사실이니까. 문제는 바로 아미고들과... 걸들이지. 가질 수 없는데도 허구한 날 히죽대는 거야, 만날 수 없어도 허구한 날 박수를 치고 와와 하는 거지. 어머 왜들 이러실까 소릴 들어도... 하는 거야, 해서 저들에게 유리한 세상을 만들어주는 거지.(···) 아미고인 너에게 차가 생겼다면 저들은 대체 얼마를 벌었을지... 걸인 네가 이 정도로 예뻐졌다면 저들은 대체 또 얼마나 예뻐졌을지... 그러니 내버려두라고, 설령 마법을 만든 게 저들이라 해도 그 마법을 유지하는 건 다 같은 좆밥들이야.(p.104-106)

 

 그야말로 속사포 같은 잔소리 아닌가? 뭔가 대들고 싶은데, 역시나 별 할 말이 없다. 뭐, 전혀 없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건 나중에 하겠다. 사실 지금 박민규의 시선을 고분고분 쫓아가는 것 자체가 나의 경험담이었던 서론을 배신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박민규 입장에서는 배신하거나 말거나 나몰라라겠지만, 어쨌거나 우리의 잔소리쟁이 박민규의 종착점은 ‘사랑’이다.

  신은 단 하나의 유일무이한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신거야.(···) 바로, 사랑이지. 사랑은 상상력이야. 사랑이 당대의 현실이라고 생각해? 천만의 말씀이지. 누군가를 위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그게 현실이라면 이곳은 천국이야. 개나 소나 수첩에 적어다니는 고린도전서를 봐.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그 짧은 문장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 있어. 애당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p.228)

 

 박민규는 남들보다 더 가지고, 더 강해지고, 더 높은 곳에 자리잡는 것이 현명한 윤리관으로 정착되어 있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 사랑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야. 이쁘지도 않은 서로를, 잘난 것도 없는 서로를... 평생을 가도 신문에 기사 한 줄 실릴 일 없는 사랑을... 그런데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지. 왜,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느냐 이거야. 기적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p.224)

 

 박민규는 자신의 작품세계 속에서 인간보다 우선시 되는 자본의 세계관을 비판해 왔다. 그리고 본편에서는 사랑으로 균열을 일으키고자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재밌었고 즐거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답답한 심정이 들기도 했다. 이 소설에서 박민규가 말하는 사랑은 “당대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그런 것이다.

 

 현실적으로 살고 있다 다들 생각하지만, 실은 관념 속에서 평생을 살 뿐이지. 현실은 절대 그렇지가 않아, 라는 말은 나는 그 외의 것을 상상할 수 없어-라는 말과 같은 것이야. 현실은 늘 당대의 상상력이었어. 지구를 중심으로 해가 돈다 거품을 물던 인간도, 아내의 사타구니에 무쇠팬티를 채우고 십자군 원정을 떠나던 인간도, 결국 아들을 낳지 못했다며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맨 인간도... 모두가 당대의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아>를 벗어나지 못했던 거야. 옛날 사람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 다들 낄낄거리지만, 그리고 돌아서서 대학을 못갈 바엔 죽는 게 나아! 다들 괴로워하는 거지. 돈이 최고야 무쇠 같은 신앙으로 무장하고, 예쁘면 그만이지 더 이상 뭐가 있어-당대의 상상력에 매몰되기 마련인 거야.(···) 말하자면 죠다쉬를 입은 고등학생의 <멋있어>와,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인간의 <정당해>와, 가진 건 돈뿐이야 하는 인간의 <에헴>과, 어때 나 이쁘지 하는 인간의 <흥>은 시간만 다를 뿐 같은 성질의 관념이야. 그러니까 미리, 그 외의 것을 상상하지 않고선 인간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어. 이를테면 그래도 지구는 돈다, 와 같은 상상이지. 모두가 현실을 직시해, 태양이 돌잖아? 해도 와와 하지 않고, 미리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져야 하는 거야.(p.226-227)

 자, 이 소설이 어떤 소설인지 상기해보자. 그렇다. 믿을 수 없이 못생긴 여자와 ‘가까워지고 싶은 남자’ 투표 1위의 훈남과의 연애이야기다. 이쯤되니까 “당대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사랑’으로 규정될 수 있다. 물론 일반적인 사랑도 <손해> 감수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본의 입장에서는 비위에 거슬리긴 할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일반적인 사랑’은 보다 나은 상품으로서의 대상자를 갈구하기 마련이다. 자기 자신도 더 나은 상품으로 보이기 위해 끊임없는 치장의 유혹에 시달린다. 결국 ‘나이’라는 유효기간의 절대적 힘 앞에서 눈높이를 낮추게 되고, 비록 기대 이하의 상품이라도 현실적 합리화 과정을 통해 극복해간다. 물론 당신이 외모나 조건 따위를 전혀 보지 않는다면 이미 “당대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 정말이지 그 누구도 ‘부러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나의 사랑의 역사는 오히려 나의 눈높이를 높이게 했고, 외로움이란 아슬아슬한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게끔 깊은 상처를 남겼다. 따라서 나로서는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의 사랑도 자신의 경험 때문에 얻게 된 가치관 아니던가. 자신의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리고 그런 사람을 사랑했던 엄마를 보면서 자랐기에 그는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외롭다며 징징대는 나에게 통렬한 한방을 먹인 선배가 있다. 그 형은 나에게 “몇 년 더 썩어보면 정신이 차려질 거다.”라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했다. 물론 이 메커니즘은 외로움의 증폭으로 나의 눈높이가 낮아질 것이라는 말이었다. 여기서 전제하고 있는 형의 논리는 ‘당연히 문제는 눈높이’이다. 그런 형에게 나는 눈이 높지 않다는 둥, 외모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둥, 문제는 눈높이가 아니라 영혼의 겹침이라는 둥 했지만-정말 그런걸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헐~ 뻥치시네’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몇 차례 헌팅을 당한 경험이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한 번도 연락처를 주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형은 “너는 외모만 보고 접근하는 그런 애들을 혐오스럽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네가 연락처를 주지 않았던 이유도 여자애들의 외모 때문 아니냐?”라고 했다. 그러니깐 “걔들 중에 니가 진짜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자가 있었어도 연락처를 정녕 안 줬을까?”라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고 별 착한 척은 다하지만 실상 나는 ‘되게 가식적인 놈이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당대적 상상력 너머를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미 물들어 버린 상태에서 나를(그리고 사회와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의 욕망이라는 것이 사고적 차원이 아닌 신체적 차원에 까지 도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적 깨달음으로 단번에 넘어 서기에는 신체에 각인된 욕망의 족쇄가 너무나 무겁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와 ‘그녀’의 사랑에 매혹을 느끼고 즐거웠던 만큼이나 ‘만두’를 보면서 안타까운 몰입과 공감을 가졌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평생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드는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나의 욕구가 작동시키는 조건의 향연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밀어내는 조건을 대신할 큐피트의 충만함이 정녕 나의 신체 속에서 가능한 걸까.

그러니깐 나는

정말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전혀 자신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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