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에르미따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 지음, 부희령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7년 4월
평점 :
지배 이데올로기에 동의를 하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는 국민들과 그것을 외면하는 지시인들
작년 이 맘 때 필리핀을 다녀왔다. 1달 동안의 기간이었는데 여행을 가장한 어학연수였다. 사실 갑작스레 가게 되는 것이었기에 필리핀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었고 딱히 관심도 없었다. 솔직히 그냥 경험삼아 가보자는 식이었다. 당시 내가 알고 있던 필리핀에 대한 정보는 우리보다 못사는 동아시아의 어느 섬나라정도였다.
필리핀에 가서 1주일 동안은 어학연수회사의 사장 집에 함께 있으면서 현지 영어 선생님과 과외를 했다.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이 과외 수업 시간이었고 그 외의 자유 시간에는 사장과 필리핀 구경을 다녔다. 사장 집이 마닐라였기에 마닐라를 주로 구경했다. 마닐라를 구경하면서 두 가지 이유로 놀랐는데 예상 밖으로 깨끗한 고층 빌딩이 많았던 것과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상업이 대단히 발전해 있었던 부분이다. 마닐라의 어느 식당 거리에서 한글로 적혀있는 돼지국밥 간판을 보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필리핀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겠다던 사장은 나를 시외로 데리고 갔는데 그곳은 충격적인 장면의 연속이었다. 그곳이 필리핀 서민의 주거지였고 필리핀 서민의 삶이었다. 빽빽한 판잣집과 쓰레기 언덕들, 그리고 부러움 반 분노 반으로 우리 일행을 보는 눈빛들. 그런 마을의 입구에는 한결같이 외국인 출입주의라는 경고 간판이 있었다. 필리핀 사회가 얼마나 극단적인 양극화를 안고 있는 사회인지를 눈으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필리핀 소설을 읽었다. “에르미따”라는 작품으로 필리핀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의 작품이다. 이 소설은 에르미따라는 마닐라의 한 지역과 그 지역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에르미따라는 소녀가 어떻게 일본인과 메스티소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났는지를 보여주고 또 이 소녀가 어떻게 자랐으며 어떠한 과정에서 고급 창녀에 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면서 전쟁과 그와 얽힌 필리핀 현대사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필리핀의 외세침략과 우리의 외세침략, 그리고 근대화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우리 민족 고유의 특성 중 하나를 한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민족 고유의 특성이 아니었다. 외세의 침략에 시달린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민족과 국가들의 공통된 특성이다.
필리핀은 스페인의 침략으로 200여 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다. 그리고 스페인과 피를 섞은 메스티소가 당시의 지배층이 된다. 하지만 이 메스티소는 사실 매국노들이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 때 친일파들이 그 부를 축적하게 된 것과 아주 유사한 것이다. 필리핀은 드디어 독립을 한다. 하지만 곧 이어 미국의 식민지가 된다. 이 때 메스티소들은 또 다시 미국과 결탁하여 그들을 지지하고 자신들의 부를 이어간다.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 친일파들이 미국과 결탁하여 여전히 지배층이 될 수 있었던 경우와 똑같다. 그리고 필리핀은 또다시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일본의 침략이다. 이 소설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부유한 메스티소 집안인 로호가의 젊은 처녀였던 콘스타 로호는 일본의 침략 때 일본병사로부터 강간을 당한다. 그리고 사생아 딸을 놓게 된다. 그녀가 바로 에르미따이다. 에르미따는 타락한 지배자들을 이용하여 결국 부유한 창녀가 되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비롯하여 로호가에게 복수를 한다.
이 작품은 프롤로그에서 1941년 당시 필리핀의 젊은 대학생 롤란도 크루즈를 통하여 “이 나라를 똥구덩이 같은 역사에서 건져 올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지나버린 과거가 아니다. 오로지 우리를 짓누르는 죽음과도 같은 부패를 인식하고, 그것을 반드시 척결해야 하는 현재뿐이다” 라는 문장으로 이 소설은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역시 현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과거에 대한 죽음과도 같은 부패는 이미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척결을 포기해버린 오늘이 문제이다.
작년 내가 필리핀 어학연수를 갔던 기억을 다시 더듬어 본다. 마닐라에서 1주일을 머물고 그 이후로는 영어 캠프에 들어갔다. 그곳은 사실 어린이 캠프였기에 나는 학생 겸 선생으로 참석했다. 그곳에서 나는 많은 필리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캠프의 영어 선생님들은 대게가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들이서 나랑 거의 같은 또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를 아주 부러워하였다. 그 이유는 하나이다. 대한민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꿈의 나라였다. 나는 한국이라는 국가가 그런 유토피아가 아니며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친구들은 필리핀의 미래를 걱정하고 설계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리고 그런 책임을 진 자들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열심히 공부하여 남다른 통찰력을 획득한 필리핀의 엘리트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들은 이곳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열등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국민들과 부정부패 기득권에 대한 자포자기식의 방관이 그 이유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솔직한 고백은 이미 그들은 국가의 빚을 졌다는 것이다. 국가의 배려로 못사는데도 불구하고 공부를 잘한 이유만으로 지금의 위치에까지 왔기 때문에 자신들 역시 그런 악순환을 알지만 내버려 두게 된다는 것이었다. 안타까움이 밀려왔지만 더 이상 몰아붙일 수 없었던 건 ‘만약 내가 그들이었다면’ 의 가정에서 오는 비겁한 나의 모습 때문이리라. 하지만 기회비용 없이는 결코 민주주의는 발전할 수가 없는 건데.
필리핀도 올해 대선을 했다. 글로리아 아르요가 삼선을 했다. 필리핀 대선 하루 전날 필리핀 친구와 대선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친구의 얘기는 간단명료했다. 다 똑같고 다 같은 통이라는 거였다. 물론 나는 필리핀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런 식의 방관적 태도에 화가 나서 그래도 차선은 있을 것 아니냐고 했고 어차피 그곳이 네가 살아야 할 조국이라면 바꿔지길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하지만 자신은 돈 벌이를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고 돈이 모이면 여길 떠날 거라는 것이었다. 만약 한국에 가게(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 비행기 삯을 모으기도 굉장히 힘들고 사실상 정상적인 비자발급이 안 된다고 한다) 되면 모르는 척 하지 말라며 농담까지 했다.
내일 대한민국도 대선을 한다. 내 주위에도 대선에 대해 필리핀 친구처럼 방관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누구를 뽑든지 간에 다 똑같다는 것이다. 괜히 정치 탓하지 말고 자기 자신만 열심히 하고 스스로 값비싼 존재가 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 말은 일부의 진실에 불과했기에 또 다른 이면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사실 이번 대선에 대해 지나치게 내 생각을 입 밖으로 많이 내 뱉은 나머지 어르신들에게 혼도 많이 나고 친구들에게도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소리를 꽤나 들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계속 의문이 생겼다. 그 덕에 대학에 나오는 학문 추구의 이유 중 하나인 자유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져버렸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그 자유로움을 만끽해보고 싶다.
솔직히 말해 이번 과제는 나에게 버거웠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의 무지함이 눈을 떴고 그 눈에 들어온 풍경은 나를 너무 짓눌렀다. 필리핀을 다녀온 이유로 별 생각 없이 선택한 이 책은 나로 하여금 더 많은 공부를 요구하고 동아시아에 대한 나의 무지를 깨닫게 했다. 그리고 그 무지의 크기는 단순히 동아시아의 범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부분들도 그 시선에 부끄러움을 피하기 힘들었다. 이제 3학년을 마치고 4학년으로 가는 이 시점에서 무거운 고민이 든다. 난 아직도 제대로 된 공부를 해보지 못한 것 같고 아직도 나 스스로의 학문을 찾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결국 돈을 벌어야 하고 취업을 준비해야 한다. 고등학생 때 청소년 필독 도서를 보다가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워야 할 판에 무슨 놈의 책을 보냐?” 하고 담임선생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대학생이 되고 어떤 강의에서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난다. “아니 도대체 대학생이나 된 녀석들이 이 책도 안 봤단 말이냐? 이 책은 청소년 때 이미 봐야 했을 책 아니냐?” 그 때 나는 교수님께 이 말을 하고 싶었다. “교수님, 그 책은 수능에 안 나왔습니다.”
“이 나라를 똥구덩이 같은 역사에서 건져 올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지나버린 과거가 아니다. 오로지 우리를 짓누르는 죽음과도 같은 부패를 인식하고, 그것을 반드시 척결해야 하는 현재뿐이다”
기억은 그것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간에 없어지기 마련이다. 나는 결국 똥구덩이 같은 역사와 죽음과도 같은 부패의 인식을 스스로 포기하고 척결해야만 하는 현재를 외면하며 먹고 살기 위한 오늘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
정이 많다는 한국은 결국 치열함보다는 귀찮음에 기반을 둔 관대함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 난 혼자서 괜히 소인배가 된 기분이다. 에르미따를 사랑한 롤란도 크루즈의 고통과 그의 최후는 지식인의 비겁함과 멸망을 예견한 작가의 절망적인 몸부림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