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핵심인 겁니다. 두 개의 계율이 아니라 단 하나의 계율입니다. 저는 이게 최고도로 혁명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중 계율의 핑퐁 게임이 어느 쪽에서 끝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이 딜레마가 그리스도교 전통의 근원적인 상황에 속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꽤 확실합니다. 그리고 바울 역시 이 딜레마를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논쟁적인 공식을 내세운 겁니다. "이것[이웃사랑]만 있으면 된다. 이것만이 타당한 계율이다." - P128

아무튼 사랑은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랑은 나의 결핍을 고백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군요. 하느님의 왕국이 도래해서 모든 사람이 부활했는데, 어째서 여전히 사랑이 필요한 걸까요? 그때는 우리 모두가 완전해져 있을 텐데 말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천재성을 보게 됩니다. 완전한 상태가 되어서도 [개별적인, 다시 말해 홀로 자족할 수 있는] ‘내‘가 아니라 [항상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동의] ‘우리‘로 존재할 거라는 겁니다. 이건 그러니까, 결핍은 완전함 자체 안에도 존재할 거라는 뜻이죠. 「고린도후서」에 이렇게 쓰여져 있듯이 말입니다. "너의 힘은 너의 약함 속에서 작용한다." 텔로스, 즉 완성이란 개념은 신비주의에서, 신비주의자들의 언어에서, 그리고 물리학에서 나온 겁니다. 여기서 핵심은 엔 아스테이네이아, 약함 속에서라는 표현이죠. - P133

이제 아시겠지요? 무슨 종합이니 타협, 세속화에 대한 긍정적 평가 따위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반대지요. 그리스도와 바라바 사이에서는 무슨 조사위원회 같은 걸로는 도무지 한 발짝도 나아갈 수가 없는 겁니다. 토론하는 계급이라는 말로써 도노소 코르테스는 부르주아들의 자유주의적 문화 프로테스탄티즘을, 물론 전체를 파악한 건 아닙니다만, 핵심적인 부분을 파악해 낸 것입니다. 부버나 UN의 고층 빌딩에 있는 함머스쾰트를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들이 [끝없이] 얘기만 주고받는다고, 마치 그런 영원한 대화 속에서 평화로 가는 길이 뚫릴 거라는 듯이 얘기만 주고받는다고 생각해 보시란 거죠! 이런 것은 지금 실제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권력의 발끝도 건드리지 못하는 겁니다. - P160

독일 관념론의 할아버지가 오든, 노발리스 등이 말하는 내면의 깊이로 향하는 여정이든 뭐가 됐든 말입니다. 당신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게 결론이니까요. 하느님이 [그런] 하느님이라면, 그렇다면 그 하느님은 우리의 영혼을 살짝이나마 건드릴 수조차 없을 겁니다. 이런 게 선험성, 그러니까 아 프리오리 어쩌고 하는 겁니다. 건너편에서 무슨 일인가가 먼저 일어나야만, 그런 다음 우리가 그걸 볼 수 있습니다. 별빛이 우리 눈을 찌른 뒤에야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 봅니다. 안 그러면 우리는 계속해서 올라갈 겁니다. 내일이고 모레고 계속 노력할 것이고요. 아도르노, 이 사람은 도무지 손을 놓질 못합니다. 바로 그래서 미학자인 것이지요. 그러나 벤야민이나 칼 바르트는 그런 식의 나이브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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