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어둠 속에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사방은 정말 어두워서 쌓아놓은 짐 더미가 희미한 그림자만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어둠에 익은 그의 눈은 그저 새하얀 벽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는 음악에만 몰입할 수 있었던 지난 5년을 회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혼자서 그 5년을 견뎌 낼 수 있을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그 불안감을 정말로 떨쳐낼 수 있기나 한 건지...
10년 전, 정말로 사랑하던 여자가 더이상 그와 함께 할 자신이 없다며 떠났던 일과 5년 전, 자신이 곡을 주고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우울증으로 죽었던 일이 다시금 떠올라 그의 생각을 어지럽혀 놓았다.
그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가족들 모두 오래 전부터 외국에서 살고 있고, 사실 연고지랄 것도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 10년이지 않은가. 친구가 죽은 지 벌써 10년이 됐고, 그녀가 마음을 돌릴 수 있을 지도 모를 시간이 5년이라 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유학을 결심했던 것도 어찌보면 한국에서의 음악생활이 주었던 한계에서이지 않은가. 그는 애써 스스로를 설득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 때, 절전 기능으로 까맸던 화면이 갑자기 밝아졌다. 메일이 왔다. 어김없이,
'thebreezeonthepiano'라는 유저였다.
10년 전부터 수현의 팬이었다는 이 사람은 1년 전부터 메일을 보내오기 시작했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알았던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너무 낯설어 무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그에게 메일을 띄웠다.
결국 6개월이 지난 후 답 메일을 한 통 보냈고, 그 뒤로도 가끔 그의 메일에 답을 하곤 했었다. 특히 유학생활이 마무리 되는 요즘, 수현은 심란한 마음에 조금 솔직한 메일을 그에게 보냈고, 그의 사정을 안 이 사람이 직장에 월차를 내고 자신을 마중 나오겠다고 한 것이다.
'와~~~ 내일이면 이제 뵐 수 있겠네요. 그쵸?...'
그는 자신의 이름이 주민영이라고 했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주민영은 자신이 중학교 때 학교에서 단체로 수현이 찬조했던 음악회에 갔다가 수현에게 반했다고 했다. 그리고 사진도 찍었다는데 수현은 그녀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더구나 그 때 중학생이었다면 더더욱 기억날 리 없다고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로서는 주민영의 호의가 꽤 귀찮았지만, 마냥 어린아이 같은 팬이라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었다.
주민영은 메일을 길게 쓰는 편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는 듯, 자신의 일과 그 날 있었던 에피소드, 또는 생각이나 감상 등을 적어보냈다. 그런 그의 글에 익숙해진 듯, 하루를 마감하는 시점에 그는 늘 그 메일을 읽었다. 그러면 더러 재밌는 꿈을 꾸기도 했었다. 이제 그 메일을 보낸 실물을 본다고 생각하니 내심 기대도 되는 그였다. 수현은 그대로 소파에 길게 누웠다. 가지고 온 담요를 덮고 노트북을 껐다.
'이제...정말로 가는구나...'
천천히 눈을 감고 그는 그 다음에 펼쳐질 일을 머릿 속으로 그려보았다. 주민영의 메일 속 글자들이 머리위로 춤추는 것 같았다. 그의 메일 이름처럼 따뜻한 바람이 그의 머릿칼을 쓰는 듯 했다.
"정수현 님!"
수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돌렸다. 분명히 소리는 들렸는데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다시 보자, 어떤 소녀가 열심히 팔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수현은 전혀 어른 같지 않아보이는 그 소녀에게로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그 소녀는 달같은 얼굴로 한 껏 웃고 있었다. 수현이 애써 그에게 다가가자 그 소녀도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정수현...아저씨 맞죠?"
목소리도 애기같다. 사실 나이가 좀 많긴 해도 장가도 안 갔는데, 아저씨는 좀...
"네...그런데..."
"저 주민영이에요. 다시 뵈서 정말 반가워요."
수현은 말없이 그 소녀를 보고만 있었다.
"...계속 거기 계시게요?안 나오세요?"
그제야 수현은 카트를 밀고 바운더리 밖으로 나왔다.
"짐은 이것 뿐인가요?"
민영이 묻자 수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세요? 지내실 곳은 있으세요?"
"네... 집은 마련해 뒀어요. 계약금을 받은 기획사가 있어서..."
"그럼 모셔다 드릴께요. 주차장은 저쪽이에요."
수현은 민영이 가는대로 따라갔다. 민영은 주차장에서 차를 끌어오더니 수현의 짐을 실어주었다. 그녀는 애기같은 외모와는 달리 행동이 빠르고 힘도 셌다. 수현은 운전하는 그녀 옆 좌석에 앉아서 그녀를 곁눈질 했다.
"그렇게 자꾸 쳐다보시지 말고 말씀하세요."
앞만 본채 그녀가 말한다.
"궁금한 거 있으세요?"
수현은 멋적게 웃는다.
"....10년 전부터 제 팬이었다고 들었는데..."
"네...인증 사진도 있어요."
민영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한 손으로 주머니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 보인다. 여러 명의 애기같은 중학생들 가운데에 자신의 10년 전 모습이 보인다.
"저는 그 중 오른쪽에서 세번째예요."
정말 거기에 민영의 모습도 보인다. 그녀의 더 앳된 얼굴이다.
"영광인데요. 제 데뷔 때부터 팬이었던 분을 만나게 되서..."
수현이 흐뭇해하자 민영의 표정도 더 환해진다.
"제가 더 영광이죠. 좋아하는 뮤지션을 일대일로 만났는데..."
민영의 말에 수현의 일종의 책임감같은 것을 느낀다.
"그럼 제가 밥이라도 한 번 살까요?"
그 말에 민영의 눈이 장난기로 빛나는 것을 보고 수현은 아차 싶다. 이 맹랑한 처녀가 무슨 말을 할 지 순간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음...그럼 그러지 말고...소원 들어주기 해주세요."
"소원...요?"
수현은 더더욱 당황한다. 무슨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소원 들어주기라니...
"네. 한 번 말구요. 통 크게 세 가지요."
말을 채 맺지 못하고 크게 웃는 민영의 목소리가 경쾌하다.
"아저씨부터 말씀 해주세요."
또 아저씨라고 한다.
"저요?...글쎄..."
사실 그녀에게도 자신이 말을 높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게의치 않는 듯 싶다.
"음.... 지금은 생각 안나고...민영씨...부터..."
그의 말에 민영은 일단 크게 웃는다.
"그냥 말 놓으셔도 되요... 제가 많이 어리거든요. "
"그래...그럴까?...민영아...."
수현도 웃는다.
"소원이니까 꼭 들어주셔야 해요."
잠시 수현을 돌아보는 민영의 눈이 빛난다.
"첫 번째는요, 동요 100곡 피아노 치는 법 가르쳐 주기요.두 번째는요, 100일 동안 애인 해 주세요. 그리고 세 번째는...."
민영은 잠시 말이 없다.
"세 번째는 나중에 말할래요. 일단 그 두 가지요."
수현은 할 말이 없다. 정말 그녀의 제안이 너무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이 없는 그에게 민영이 조심스레 묻는다.
"...저기...많이 부담스러우세요?"
수현은 그런 그녀의 말에 힘없이 웃어버린다.
"그래도 소원인데..."
순간 빛을 잃은 듯한 그녀의 모습에 수현은 고개를 젓는다.
"그래..소원인데..."
그의 말에 다시 그녀의 얼굴이 달같이 빛난다.
"아저씨는요?"
"나는...나중에...너무 갑작스러워서..."
수현의 집은 도심에서 약간 외곽 쪽이었다. 아파트 생활을 싫어했던 수현은 조금 무리를 해서 단독주택을 얻었다. 민영은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집이 이 근처세요?"
민영이 묻자 수현이 손가락으로 집 한채를 가리켰다.
"저거야. 사진에서 봤거든."
민영은 수현을 그 집 앞에서 내려주고 짐도 같이 내려준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께요."
수현은 잠시 들어왔다 가라고 하려다 이미 운전석에 앉아버린 민영을 보고 기회를 놓친다.
"그럼, 소원은 내일부터 시행하는 거에요."
민영은 손을 한 번 흔들고 차를 끌고 가버린다.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가 멍하니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다. 꼭 도깨비한테 홀린 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