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이이익-.삐이이익-.

 수현은 잠시 시계로 눈을 돌린다. 정확히 6시 30분. 몇 초간의 오차는 있어도 결코 늦는 법이 없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민영이 들어올 때면 찬 바람도 같이 들어와 부르르 몸이 떨린다.

 "오늘도 좀 춥네."

 수현이 담요를 뒤집어 쓰자,

 "그래도 좀 풀렸는데."

 하며 민영은 싸온 것들을 풀어낸다. 물을 틀어서 씻는 소리가 들리고, 도마에서 야채 썰리는 소리가 들린다. 수현은 잠시 눈을 감는다. 그저 일주일을 참았을 뿐이었다. 아니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그의 이른 아침은 이미 민영에게 길들여졌다고 생각했다. 수현은 이틀 전부터 민영이 아침을 짓는 동안 조용히 눈을 감고 부엌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 것이 습관이 됐다. 부엌에서는 처음에 물소리가 났고 그 다음에는 도마에서 써는 소리, 그 이후에는 여러 소리가 들리다가 무언가 끓거나 튀겨지는 소리가 났다. 그 뒤를 이어 맛있는 냄새와 온기가 집 안 공기와 온 몸을 따뜻이 데워 주는 것 같았다.

 "저 가 볼께요."

민영은 항상 요리 후에는 빠르게 주변 정리를 했다.

"응... 그래..."

수현은 민영에게 더 많은 말들을 하지 않았다. 더 많은 말들을 해서 오해를 만드느니 아무 말을 안 하는 편이 낫다 여겼기 때문이다.

 "아, 아저씨 제 두 번째 소원 기억 나세요?"

 민영은 잠시 멈추더니 가방에서 핸드 크림을 꺼내 바른다.

 "두 번째? 뭐?"

 수현도 민영의 손을 힐끗 본다. 작고 몽톡한 손가락 끝이 보인다.

 "저 피아노로 동요 100곡 칠 수 있게 가르쳐 주시는 거요."

 아... 수현은 또 한 숨이 먼저 나온다. 잘은 몰라도 지금까지 그녀를 겪었던 바,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 그러지 뭐.."

민영의 얼굴이 또 밝아진다. 이제는 익숙한 표정이다.

 "그럼 이따 저녁에 뵐께요."

 "뭐?"

 그러나 수현이 뭐라 하기 전, 민영은 쌩 하고 나가버린다.

'또 당했어...'

 수현은 다시 담요를 푹 뒤집어 써버린다.

 

 "이게 뭐야?"

 어린 민영이 친구 재은에게 묻는다.

 "이거? 별!"

 재은이 방금 접은 별을 민영에게 준다.

"아니~. 이걸 왜 하고 있냐고."

"왜긴?"

재은이 생뚱맞다는 표정을 짓는다.

 "너 또 그 윤서준인가 하는 그 가수한테 보내려고 그러냐?"

민영의 말에 재은이 혀를 쏙 내밀고 멋적은 듯 웃는다.

"이럴 시간에 공부나 해라. 중간 고사 얼마 안 남았잖냐?"

민영이 핀잔하며 종이별을 재은의 통 속에 넣어둔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우리 서방님 요새 힘드신지 얼굴에 살 빠졌든데 이거라도 보면 힘 내시지 않겠어?"

"윤서준이 어떻게 너 서방이냐? 그리고 너 할 건 공부지, 가수 준다고 접는 별이 아니라구."

민영의 핀잔에 재은은 눈을 흘기며 또 웃는다.

 "그래, 그래. 주민영.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네 목표대로 장학금도 타고 학생회장도 되서 서준오빠랑 내 결혼식에 축의금도 팍팍 해라 응?"

"아으~. 15살에 무슨 결혼이냐? 징그러~"

"하하하"

 

 미소를 짓다가 눈가가 촉촉해진 듯 해 민영은 얼른 손으로 훔쳐내었다.

 "얘들아, 차례차례 올라가야지. 한 사람씩 안 가면 다쳐요."

미끄럼틀 계단을 두고 실갱이를 하는 아이들에게 그녀는 얼른 뛰어갔다.

 

 지훈은 그가 앞서 한국에서 음악생활을 했을 적에 가깝게 지냈던 친구였다. 이제는 어엿한 가장이 되어서 아이도 둘이나 있다고 했다.

 "아직 준비 안 됬어?"

 지훈이 집에 들어왔을 때 수현은 아직 식전이었다.

 "응... 아직... 밥을 안 먹어서..."

 지훈은 그를 따라 부엌으로 왔다.

"와~~. 진수 성찬이네. 그런데... 아침이야? 점심이야?"

지훈의 질문에 수현은 그저 웃었다.

 "먹을래?"

 지훈은 시계를 보더니 맞은 편 의자에 앉는다. 수현은 국을 데우고 밥을 두 그릇 퍼 담는다. 전자렌지에서 돌려놓았던 갈치구이가 적당히 데워졌다.

 "예전보다 식생활이 나아졌네. 네가 이런 가정식 백반도 할 줄 알아?"

 지훈이 국을 한 숟갈 떠 마셔보더니 감탄을 한다. 수현은 또 아무 말없이 그저 웃는다.

 "맛있어?"

 "어, 맛있어. 이런 밥 얼마만이냐. 요새 바빠서 집에도 못 들어가는데."

 지훈은 국을 마셔버리고 밥도 금새 먹어버리고는 또 한 그릇을 받는다.

 "사무실에서는 뭐래?"

 수현이 묻자, 지훈은 먼저 밥을 한 숟갈 우겨넣는다.

 "뭐라긴, 너 빨리 모셔 오라지. 일단 계약서부터 쓰고, 콘서트 일정 잡자더라. "

 수현은 말없이 밥을 한 수저 뜬다. 아침을 넘어 점심이 다 되어가는 시간, 음식이 들어갈 때마다 몸이 아닌 마음이 먼저 따뜻해지는 것 같다.

 아침이 점심이 되어버린 식사를 마치고 수현은 지훈의 차를 탄다.

 "일단 사장하고 만나서 이야기 잘해봐. 뭘 믿고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너 사는 집까지 무리해서 얻어준 거 보면 서울에서도 네 명성이 자자한 거 같으니까. "

수현은 지훈의 말에 대꾸 하지 않았다. 코너를 막 돌아 가던 중, 수현은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한다.

"잠깐, 잠깐만..."

 수현의 말에 지훈이 차를 세운다.

 "왜?"

 한 블럭 건너편에 어린이집이 보인다. 그리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지도하던 두 세 명의 선생님들 중 하나에 수현의 시선이 꽂힌다.

 "왜 그래? 뭘 보고 그러는 건데?"

 지훈이 다시 묻자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가자."

 수현은 다시 바깥으로 시선을 꽂고 지훈은 더 묻지 않고  운전한다.

 '..그랬구나, 주민영... 너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거였어...'

 도데체 정체를 알 수 없었던 그녀의 본 모습을 본 것 같아 수현은 짓궂은 미소가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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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자전거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자 작은 손이 그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그는 그 작은 손을 감싸쥐듯 잡았다.

 '어디...가세요?...'

 그는 말없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정말로... 가세요?...'

그는 자전거를 태워주겠노라고 한다. 말없이 그의 뒤에 타고 그의 허리를 조심스레 잡는다.그가 꽉 잡으라고 한다. 바람을 가르고 그가 달린다. 그 바람에 그의 냄새가 섞인다. 그의 등의 온기가 마음을 편안히 해주는 듯했다.

 

 다리가 저리고 허리도 좀 땡겼다. 민영은 서 있는 자세로 기지개를 켜려다 수현과 눈이 마주쳤다. 수현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기지개 키던 팔을 채 내리지도 못하고 민영은 헤벌쭉 웃어버린다.

 "무슨 깡이야?"

 수현은 이 뜬금없는 처녀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뭐가요?"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가 묻는다.

"내가 안 나오면 어쩌려고 그랬어?"

민영은 그 말에도 웃는 얼굴을 바꾸지 않는다.

"전화 하셨잖아요."

그랬다. 수현은 오랜 시간 다 식어버린 밥상을 앞에 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밥만 따끈했던 아침을 먹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온다는 말은 안 했잖아."

수현 스스로도 억지성 발언이란 걸 안다.

"그렇지만 나오셨잖아요."

그녀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말로는 이길 수 없는 처녀같다.

"배 안 고파요? 전 점심 먹은 지도 꽤 되서 쓰러질 것 같은데. "

듣고 있던 음악을 끄고 헤드셋을 걸어놓는다.  대형 서점 안 음반 코너. 그녀가 듣고 있던 것은 최근에 나온 연주 그룹 음악이었다. 그녀는 서점을 걸어 나오면서도 몇 몇 책들에 관심을 보이고 어떤 것은 펴 보기까지 했다. 그럴 때 보면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 보였고, 어찌 보면 자유로운 듯 보여 수현도 그냥 내버려 두게 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렇게 코너를 지나 문 앞까지 와서는 갑작스레 뒤돌아 달려갔다. 수현은 또 황당스런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민영은 잠시 시야에서 벗어나더니 금방 달려오면서 조금 전 자신이 지나쳐 온 코너의 책을 한 권 들었고, 출구 근처의 계산대 옆에서 책갈피를 몇 개 골랐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그러더니 수현 앞에서 너무도 당당하게 웃으며 죄송하다 하는 것이었다. 수현은 이 처녀가 도데체 알 수 없다고 여러번 속으로 중얼 거렸다.

 

 "제가 이 동네에서 먹어본 곳 중에서는 여기가 제일 맛있는 집 같아요."

 민영은 갈비찜 2인분을 시킨다.

"아침 밥은 맛있었나요?"

수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와~~. 정말요?"

수현이 희미한 미소 짓는다.

"어."

"새벽부터 준비한 보람이 있는데요."

 민영은 무슨 신나는 일을 만나기라도 한 듯 기분좋게 웃는다.

"그런데..."

수현은 뭐라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 싶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민영의 환대(?)를 비롯한 이 모든 상황들이 수현에게는 표현 못 할 만큼 부담스러웠다.

"어제, 오늘 나 신경 써 주는 건 고맙긴 한데 말야...."

"와~. 밥 왔다."

음식이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수현 앞에 앞접시나 수저 등을 놓아주더니 기도하는 듯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다. 수현은 또 그녀 앞에서 황당스레 앉아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드세요. 쇠고기라 지금 안 드시면 식어서 소냄새 나요."

민영의 말에 수현은 잠시 그대로 멈춘 듯 하다가 젓가락을 들었다. 그제야 민영도 수저를 드는 듯 했다. 그것도 수현에게는 이상해 보였다. 그러나 함께 앉아 있는 민영은 전혀 게의치 않는 듯 했다.

 "전 손으로 하는 건 다 좋아하거든요. 물건 만드는 거, 바느질 하는 거, 요리두요."

 민영은 자신의 컵에 물을 따르기 전 수현의 컵에 먼저 물을 따라 놓는다. 수현은 말없이 컵을 들어 물을 마신다.

 "어떤 걸 너무 좋아하다 보면, 보통 정도가 되는 걸 잊어먹고 살기도 하는 것 같아요... 저에게는, 그게 바로 '애인 만들기'였는데요. "

 민영의 추천 대로 그 집의 음식은 맛있었다. 조금 더 어색할 수 있었던 둘 사이의 분위기가 왠지 풀리는 것 같다고 수현은 느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것, 그러니까 손으로 무언가를 하는 거나 해놓은 걸 전 이성과 나누고 싶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무리 봐도 주변에 괜찮은 사람은 이미 누군가와 다 같이 있더라구요."

수현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난 네 애인이 아니야. 너보다 10살도 더 많고..."

"정확히 11살이거든요."

민영은 또 장난기를 머금고 웃었다.

"그리고 애인은 아니지만 애인 해 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아...어제의 약속... 수현은 사래에 들려 물만 계속 마셨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번복 없기예요. 그리고 아침에 전 분명히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선택하실 기회를 드렸어요. 선택은 아저씨가 하신 거지."

민영은 밥 위에 김치를 얹더니 한 입에 먹어버린다. 입은 만두처럼 부풀어 있는데, 웃는 눈이 귀엽다. 수현은 그저 한숨을 쉴 뿐이었다. 그랬다. 민영의 아침상은 그렇게 무시되기에는 아까울만큼 보기 좋았고, 그녀의 배려는 자칫 흔들리기 쉬운 그의 귀국 생활 첫 날에 가닥을 잡을 수 있게 한 힘이 될 것도 같았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수현이 묻자 민영은 먼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렇게 가끔 얼굴 뵙고, 제가 아침 상 봐드리고... 애인이자 팬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놔두세요."

민영은 또 씨익 웃더니,

"위험한 짓은 절~대로 안 할 테니까 걱정은 하지 마시구요.저 이상한 사람 아니거든요."

그러더니 또 소리내서 웃는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경쾌하다 느낀다. 수현은 그녀 앞에서 표정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그저 어색하게 바라만 본다.

 

 민영과 수현은 저녁 식사 후 그 주변을 산책했다. 민영은 그 근처에 어쩌다 가끔 혼자 들른다는 다기 박물관이 있다고 했다.

 "2년 전에 진로 문제로 제가 좀 방황을 심하게 한 적이 있었거든요.6개월 여를 고민하고 방황하던 중에 이 근처를 돌다가 발견한 곳이었는데, 한적하고 아늑해서 자주 갔었어요. 그러면서 생각도 정리하고... 지금도 가끔 생각이 막히면 혼자 들러요."

"그럼, 지금 나도 거기 데려가는 거야?"

 수현이 묻자 민영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아저씨가 스스로 발견하시면 모를까 제가 모시고 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왜?"

"그냥.... 혼자 기억하고 싶은 비밀 장소 같은 데라서?"

민영은 또 습관처럼 웃었다. 그러나 그 때, 수현은 그녀의 웃음 소리가 이번에는 좀 쓰다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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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향하던 그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찬 바닷 바람이 파도를 만들어서 그를 향해 오고 있었다.

'서준아.... 그러지 마...'

그의 한 손에는 하얀 알약이 든 병이 있었다.

'...서준아...제발... 그러지 마...'

그의 목소리가 울고 있었다. 그의 눈물에 젖은 얼굴이 휘몰아치는 파도에 묻혀 버렸다.

 

 삐이이잇, 삐이이잇.

초인종 소리였다. 수현은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가 무심결에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6시 30분. 시차에 적응 하지 못한 수현에게는 한 밤 중이나 다름 없는 시간이었다. 얼굴에는 여전히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가 남아있었다.

"누구세요?"

소매로 얼굴을 닦으며 그가 묻자 낯 선 목소리가 들린다.

"네, 안녕하세요."

전혀 모르겠는 목소리다.

"...저 주민영인데요."

아... 어제 그...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 일단 문을 열어주었다. 먼저 찬 바람이 들어오고 파랗게 얼어버린 듯한 그녀가 서있다.

"여긴 어떻게..."

 어색한 표정으로 우뚝 서 있는 그와 달리, 그녀는 그저 생글 생글 웃는다.

"잊었어요? 우리 오늘부터 애인인데..."

아.. 어제의 그 황당한 약속...그녀는 그래도 우뚝 서 있는 수현을 비껴서 집 안으로 들어온다. 수현은 뭐라 말조차 할 수도 없다. 분명 화를 내도 무방한 상황이지만 그저 이상하고 어색해서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다.

"어제는 짐 풀고 잘 쉬셨어요? 응~. 그닥 풀어놓은 짐도 없는 것 같네요."

그녀는 곧장 부엌으로 가더니 가져온 시장 가방을 풀어놓는다. 물을 틀고 쌀을 씻는듯 하더니, 솥에 밥을 앉히는 소리가 들린다. 가스렌지에 불 지피는 소리가 나고 곧 보글보글 끓는 소리도 난다. 그 쯤 되면 이미 그가 그녀에게 화를 낼 타이밍은 놓쳐버린 셈이다. 그는 말없이 자신의 잠자리였던 소파에 앉는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다시 자신의 짐을 챙겨서 부엌을 나왔다.

"밥은 뜸 조금 들이면 되니까, 국이랑 계란 후라이 식기 전에 드실 수 있을 거예요. 다른 밑반찬은 조금씩 덜어서 식탁에 놔두었으니까 밥만 퍼서 드심 되세요."

 또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는 현관으로 나온다. 그는 또 그녀에게 말 할 기회를 놓쳐버린 듯하다.

그녀가 문을 닫고 간 뒤에도 그는 우뚝 서서 그녀가 가버린 문만 바라볼 뿐이었다.

 '피이이-.'

 전기 밥솥에서 김이 또한 번 올라왔다. 그는 그녀가 차려놓고 간 식탁을 보았다. 메모가 있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황당하셨죠? 제가 애인을 만들면 꼭 따뜻한 아침을 차려주고 일하러 가야겠다고 결심했거든요. 너무 제 마음대로인가요? ^^; 저의 막무가내식 애인 되기 괜찮으시면, 여기로 연락 주세요.'

수현은 그녀의 메모와 연락 번호를 보고 또 멍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차려놓고 간 아침상은 훌륭했다. 김치를 넣은 콩나물국, 무생채와 나물류, 잘 구워낸 조기 한 마리... 수현은 그녀의 아침상을 놓고 갈등하는 자신을 느꼈다. 시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아침상에 호기심을 느꼈다. 그러나... 수현은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국이 식기 전에 밥을 떠서 먹으라는 그녀의 조언만 귓전에 맴돌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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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현은 어둠 속에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사방은 정말 어두워서 쌓아놓은 짐 더미가 희미한 그림자만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어둠에 익은 그의 눈은 그저 새하얀 벽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는 음악에만 몰입할 수 있었던 지난 5년을 회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혼자서 그 5년을 견뎌 낼 수 있을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그 불안감을 정말로 떨쳐낼 수 있기나 한 건지...

 10년 전, 정말로 사랑하던 여자가 더이상 그와 함께 할 자신이 없다며 떠났던 일과 5년 전, 자신이 곡을 주고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우울증으로 죽었던 일이 다시금 떠올라 그의 생각을 어지럽혀 놓았다.

그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가족들 모두 오래 전부터 외국에서 살고 있고, 사실 연고지랄 것도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 10년이지 않은가. 친구가 죽은 지 벌써 10년이 됐고, 그녀가 마음을 돌릴 수 있을 지도 모를 시간이 5년이라 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유학을 결심했던 것도 어찌보면 한국에서의 음악생활이 주었던 한계에서이지 않은가. 그는 애써 스스로를 설득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 때, 절전 기능으로 까맸던 화면이 갑자기 밝아졌다. 메일이 왔다. 어김없이,

'thebreezeonthepiano'라는 유저였다.

 10년 전부터  수현의 팬이었다는 이 사람은 1년 전부터 메일을 보내오기 시작했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알았던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너무 낯설어 무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그에게 메일을 띄웠다.

결국 6개월이 지난 후 답 메일을 한 통 보냈고, 그 뒤로도 가끔 그의 메일에 답을 하곤 했었다. 특히 유학생활이 마무리 되는 요즘, 수현은 심란한 마음에 조금 솔직한 메일을 그에게 보냈고, 그의 사정을 안 이 사람이 직장에 월차를 내고 자신을 마중 나오겠다고 한 것이다.

'와~~~ 내일이면 이제 뵐 수 있겠네요. 그쵸?...'

그는 자신의 이름이 주민영이라고 했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주민영은 자신이 중학교 때 학교에서 단체로 수현이 찬조했던 음악회에 갔다가 수현에게 반했다고 했다. 그리고 사진도 찍었다는데 수현은 그녀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더구나 그 때 중학생이었다면 더더욱 기억날 리 없다고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로서는 주민영의 호의가 꽤 귀찮았지만, 마냥 어린아이 같은 팬이라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었다.

주민영은 메일을 길게 쓰는 편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는 듯, 자신의 일과 그 날 있었던 에피소드, 또는 생각이나 감상 등을 적어보냈다. 그런 그의 글에 익숙해진 듯, 하루를 마감하는 시점에 그는 늘 그 메일을 읽었다. 그러면 더러 재밌는 꿈을 꾸기도 했었다. 이제 그 메일을 보낸 실물을 본다고 생각하니 내심 기대도 되는 그였다. 수현은 그대로 소파에 길게 누웠다. 가지고 온 담요를 덮고 노트북을 껐다.

 '이제...정말로 가는구나...'

천천히 눈을 감고 그는 그 다음에 펼쳐질 일을 머릿 속으로 그려보았다. 주민영의 메일 속 글자들이 머리위로 춤추는 것 같았다. 그의 메일 이름처럼 따뜻한 바람이 그의 머릿칼을 쓰는 듯 했다.

 

 "정수현 님!"

 수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돌렸다. 분명히 소리는 들렸는데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다시 보자, 어떤 소녀가 열심히 팔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수현은 전혀 어른 같지 않아보이는 그 소녀에게로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그 소녀는 달같은 얼굴로 한 껏 웃고 있었다. 수현이 애써 그에게 다가가자 그 소녀도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정수현...아저씨 맞죠?"

목소리도 애기같다. 사실 나이가 좀 많긴 해도 장가도 안 갔는데, 아저씨는 좀...

"네...그런데..."

"저 주민영이에요. 다시 뵈서 정말 반가워요."

수현은 말없이 그 소녀를 보고만 있었다.

"...계속 거기 계시게요?안 나오세요?"

그제야 수현은 카트를 밀고 바운더리 밖으로 나왔다.

"짐은 이것 뿐인가요?"

민영이 묻자 수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세요? 지내실 곳은 있으세요?"

"네... 집은 마련해 뒀어요. 계약금을 받은 기획사가 있어서..."

"그럼 모셔다 드릴께요. 주차장은 저쪽이에요."

수현은 민영이 가는대로 따라갔다. 민영은 주차장에서 차를 끌어오더니 수현의 짐을 실어주었다. 그녀는 애기같은 외모와는 달리 행동이 빠르고 힘도 셌다. 수현은 운전하는 그녀 옆 좌석에 앉아서 그녀를 곁눈질 했다.

"그렇게 자꾸 쳐다보시지 말고 말씀하세요."

앞만 본채 그녀가 말한다.

"궁금한 거 있으세요?"

수현은 멋적게 웃는다.

"....10년 전부터 제 팬이었다고 들었는데..."

"네...인증 사진도 있어요."

민영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한 손으로 주머니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 보인다. 여러 명의 애기같은 중학생들 가운데에 자신의 10년 전 모습이 보인다.

"저는 그 중 오른쪽에서 세번째예요."

정말 거기에 민영의 모습도 보인다. 그녀의 더 앳된 얼굴이다.

"영광인데요. 제 데뷔 때부터 팬이었던 분을 만나게 되서..."

수현이 흐뭇해하자 민영의 표정도 더 환해진다.

"제가 더 영광이죠. 좋아하는 뮤지션을 일대일로 만났는데..."

민영의 말에 수현의 일종의 책임감같은 것을 느낀다.

"그럼 제가 밥이라도 한 번 살까요?"

그 말에 민영의 눈이 장난기로 빛나는 것을 보고 수현은 아차 싶다. 이 맹랑한 처녀가 무슨 말을 할 지 순간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음...그럼 그러지 말고...소원 들어주기 해주세요."

"소원...요?"

수현은 더더욱 당황한다. 무슨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소원 들어주기라니...

"네. 한 번 말구요. 통 크게 세 가지요."

말을 채 맺지 못하고 크게 웃는 민영의 목소리가 경쾌하다.

"아저씨부터 말씀 해주세요."

또 아저씨라고 한다.

"저요?...글쎄..."

사실 그녀에게도 자신이 말을 높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게의치 않는 듯 싶다.

"음.... 지금은 생각 안나고...민영씨...부터..."

그의 말에 민영은 일단 크게 웃는다.

"그냥 말 놓으셔도 되요... 제가 많이 어리거든요. "

"그래...그럴까?...민영아...."

수현도 웃는다.

"소원이니까 꼭 들어주셔야 해요."

잠시 수현을 돌아보는 민영의 눈이 빛난다.

"첫 번째는요, 동요 100곡 피아노 치는 법 가르쳐 주기요.두 번째는요, 100일 동안 애인 해 주세요. 그리고 세 번째는...."

민영은 잠시 말이 없다.

"세 번째는 나중에 말할래요. 일단 그 두 가지요."

수현은 할 말이 없다. 정말 그녀의 제안이 너무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이 없는 그에게 민영이 조심스레 묻는다.

"...저기...많이 부담스러우세요?"

수현은 그런 그녀의 말에 힘없이 웃어버린다.

"그래도 소원인데..."

순간 빛을 잃은 듯한 그녀의 모습에 수현은 고개를 젓는다.

"그래..소원인데..."

그의 말에 다시 그녀의 얼굴이 달같이 빛난다.

"아저씨는요?"

"나는...나중에...너무 갑작스러워서..."

수현의 집은 도심에서 약간 외곽 쪽이었다. 아파트 생활을 싫어했던 수현은 조금 무리를 해서 단독주택을 얻었다. 민영은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집이 이 근처세요?"

민영이 묻자 수현이 손가락으로 집 한채를 가리켰다.

"저거야. 사진에서 봤거든."

민영은 수현을 그 집 앞에서 내려주고 짐도 같이 내려준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께요."

수현은 잠시 들어왔다 가라고 하려다 이미 운전석에 앉아버린 민영을 보고 기회를 놓친다.

"그럼, 소원은 내일부터 시행하는 거에요."

민영은 손을 한 번 흔들고 차를 끌고 가버린다.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가 멍하니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다. 꼭 도깨비한테 홀린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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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매장 정리를 끝낸 서원은 준비해 둔 컵을 꺼냈다.빨간색 닷트 무늬와 파란 색 닷트 무늬가 있는 컵이었다.

 "여기 커피 있나요?"

 서원은 들어온 손님을 보고 활짝 웃었다.

"그럼요. 어떤 분이 사준 이쁜 컵에 직접 타드리는 걸요."

 현승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번졌다. 서원은 뜨거운 물에 컵을 한 번 부시고 커피를 탔다.

"안 피곤해요?"

서원의 말에 현승은 그저 웃었다.

 "그러는 서원씨는요?"

그의 말에 서원도 그저 웃는다. 초여름이라 해도 밤이라 공기가 조금 찼다. 따끈한 커피가 그들의 손을 조금 녹여주었다.

"...얘기는 했어요?"

현승이 묻자 서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달 말까지만 일하기로 했어요."

"사장님은 뭐라세요?"

"서운하다 하시죠..."

서원은 야간 알바를 그만두기로 했다. 유현승이 그녀의 일상에 출현하면서 겪는 변화 중에 하나였다.

"줄 거 있는데..."

현승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눈 감아봐요"

"네?"

"빨리요."

서원의 얼굴에 홍조가 오른다. 현승은 가만히 서원의 손을 잡아 끈다.

"이제 눈 떠도 되요"

현승의 말에 서원이 눈이 뜬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은 가락지가 빛난다.

"이거 뭐예요?"

서원이 놀라 묻자, 현승이 또 웃는다.

"제가 인도에서 사갖고 들어왔던 거예요. 만나면 꼭 주려고.."

"네?"

현승은 말없이 또 웃는다. 그리고 서원의 반지 낀 손을 꼭 잡아준다. 서원도 말없이 그를 보고 웃는다. 손님도 뜸한 그 즈음, 이상하리만치 고즈넉한 그 밤에 달빛이 그 둘을 환히 비치는 것 같았다. 현승은 서원을 만나기 전, 군 제대 후부터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일련의 장면들 속에 서원이 아니면 넘어가지 못했을 수많은 위기가 떠올랐다. 서원은 현승이 주는 안정감과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옆을 지키는 사람이 그여서 너무 좋았다. 그러면서 그동안 꿔왔던 조각같은 꿈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현승의 지금 모습과 겹치고 있었다. 둘은 말없이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 밤은 이상한 밤이었다. 손님도 잘 오지 않고 피곤하지도 않은 밤이었다. 달빛이 그들을 홀리고 있다 해도 그들은 그렇게 침묵 속에서 서로 이야기 하는 듯 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말로 표현하지 않은 말을 마음으로 흐르게 했다. 이따금씩 그들은 맞잡은 손을 꼭 쥐기도 했다.

 

 약간 더운 듯한 날이었다. 현승의 옷도 한결 가벼워졌다. 현승은 준비해 간 꽃을 다시 보았다. 소박해보이긴 해도 향이 진한 국화였다. 저쪽에서 그녀가 열심히 뛰어온다.

 "천천히 와요. 넘어져요!"

뛰어오는 서원의 얼굴에 햇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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