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자전거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자 작은 손이 그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그는 그 작은 손을 감싸쥐듯 잡았다.

 '어디...가세요?...'

 그는 말없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정말로... 가세요?...'

그는 자전거를 태워주겠노라고 한다. 말없이 그의 뒤에 타고 그의 허리를 조심스레 잡는다.그가 꽉 잡으라고 한다. 바람을 가르고 그가 달린다. 그 바람에 그의 냄새가 섞인다. 그의 등의 온기가 마음을 편안히 해주는 듯했다.

 

 다리가 저리고 허리도 좀 땡겼다. 민영은 서 있는 자세로 기지개를 켜려다 수현과 눈이 마주쳤다. 수현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기지개 키던 팔을 채 내리지도 못하고 민영은 헤벌쭉 웃어버린다.

 "무슨 깡이야?"

 수현은 이 뜬금없는 처녀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뭐가요?"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가 묻는다.

"내가 안 나오면 어쩌려고 그랬어?"

민영은 그 말에도 웃는 얼굴을 바꾸지 않는다.

"전화 하셨잖아요."

그랬다. 수현은 오랜 시간 다 식어버린 밥상을 앞에 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밥만 따끈했던 아침을 먹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온다는 말은 안 했잖아."

수현 스스로도 억지성 발언이란 걸 안다.

"그렇지만 나오셨잖아요."

그녀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말로는 이길 수 없는 처녀같다.

"배 안 고파요? 전 점심 먹은 지도 꽤 되서 쓰러질 것 같은데. "

듣고 있던 음악을 끄고 헤드셋을 걸어놓는다.  대형 서점 안 음반 코너. 그녀가 듣고 있던 것은 최근에 나온 연주 그룹 음악이었다. 그녀는 서점을 걸어 나오면서도 몇 몇 책들에 관심을 보이고 어떤 것은 펴 보기까지 했다. 그럴 때 보면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 보였고, 어찌 보면 자유로운 듯 보여 수현도 그냥 내버려 두게 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렇게 코너를 지나 문 앞까지 와서는 갑작스레 뒤돌아 달려갔다. 수현은 또 황당스런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민영은 잠시 시야에서 벗어나더니 금방 달려오면서 조금 전 자신이 지나쳐 온 코너의 책을 한 권 들었고, 출구 근처의 계산대 옆에서 책갈피를 몇 개 골랐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그러더니 수현 앞에서 너무도 당당하게 웃으며 죄송하다 하는 것이었다. 수현은 이 처녀가 도데체 알 수 없다고 여러번 속으로 중얼 거렸다.

 

 "제가 이 동네에서 먹어본 곳 중에서는 여기가 제일 맛있는 집 같아요."

 민영은 갈비찜 2인분을 시킨다.

"아침 밥은 맛있었나요?"

수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와~~. 정말요?"

수현이 희미한 미소 짓는다.

"어."

"새벽부터 준비한 보람이 있는데요."

 민영은 무슨 신나는 일을 만나기라도 한 듯 기분좋게 웃는다.

"그런데..."

수현은 뭐라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 싶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민영의 환대(?)를 비롯한 이 모든 상황들이 수현에게는 표현 못 할 만큼 부담스러웠다.

"어제, 오늘 나 신경 써 주는 건 고맙긴 한데 말야...."

"와~. 밥 왔다."

음식이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수현 앞에 앞접시나 수저 등을 놓아주더니 기도하는 듯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다. 수현은 또 그녀 앞에서 황당스레 앉아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드세요. 쇠고기라 지금 안 드시면 식어서 소냄새 나요."

민영의 말에 수현은 잠시 그대로 멈춘 듯 하다가 젓가락을 들었다. 그제야 민영도 수저를 드는 듯 했다. 그것도 수현에게는 이상해 보였다. 그러나 함께 앉아 있는 민영은 전혀 게의치 않는 듯 했다.

 "전 손으로 하는 건 다 좋아하거든요. 물건 만드는 거, 바느질 하는 거, 요리두요."

 민영은 자신의 컵에 물을 따르기 전 수현의 컵에 먼저 물을 따라 놓는다. 수현은 말없이 컵을 들어 물을 마신다.

 "어떤 걸 너무 좋아하다 보면, 보통 정도가 되는 걸 잊어먹고 살기도 하는 것 같아요... 저에게는, 그게 바로 '애인 만들기'였는데요. "

 민영의 추천 대로 그 집의 음식은 맛있었다. 조금 더 어색할 수 있었던 둘 사이의 분위기가 왠지 풀리는 것 같다고 수현은 느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것, 그러니까 손으로 무언가를 하는 거나 해놓은 걸 전 이성과 나누고 싶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무리 봐도 주변에 괜찮은 사람은 이미 누군가와 다 같이 있더라구요."

수현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난 네 애인이 아니야. 너보다 10살도 더 많고..."

"정확히 11살이거든요."

민영은 또 장난기를 머금고 웃었다.

"그리고 애인은 아니지만 애인 해 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아...어제의 약속... 수현은 사래에 들려 물만 계속 마셨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번복 없기예요. 그리고 아침에 전 분명히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선택하실 기회를 드렸어요. 선택은 아저씨가 하신 거지."

민영은 밥 위에 김치를 얹더니 한 입에 먹어버린다. 입은 만두처럼 부풀어 있는데, 웃는 눈이 귀엽다. 수현은 그저 한숨을 쉴 뿐이었다. 그랬다. 민영의 아침상은 그렇게 무시되기에는 아까울만큼 보기 좋았고, 그녀의 배려는 자칫 흔들리기 쉬운 그의 귀국 생활 첫 날에 가닥을 잡을 수 있게 한 힘이 될 것도 같았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수현이 묻자 민영은 먼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렇게 가끔 얼굴 뵙고, 제가 아침 상 봐드리고... 애인이자 팬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놔두세요."

민영은 또 씨익 웃더니,

"위험한 짓은 절~대로 안 할 테니까 걱정은 하지 마시구요.저 이상한 사람 아니거든요."

그러더니 또 소리내서 웃는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경쾌하다 느낀다. 수현은 그녀 앞에서 표정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그저 어색하게 바라만 본다.

 

 민영과 수현은 저녁 식사 후 그 주변을 산책했다. 민영은 그 근처에 어쩌다 가끔 혼자 들른다는 다기 박물관이 있다고 했다.

 "2년 전에 진로 문제로 제가 좀 방황을 심하게 한 적이 있었거든요.6개월 여를 고민하고 방황하던 중에 이 근처를 돌다가 발견한 곳이었는데, 한적하고 아늑해서 자주 갔었어요. 그러면서 생각도 정리하고... 지금도 가끔 생각이 막히면 혼자 들러요."

"그럼, 지금 나도 거기 데려가는 거야?"

 수현이 묻자 민영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아저씨가 스스로 발견하시면 모를까 제가 모시고 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왜?"

"그냥.... 혼자 기억하고 싶은 비밀 장소 같은 데라서?"

민영은 또 습관처럼 웃었다. 그러나 그 때, 수현은 그녀의 웃음 소리가 이번에는 좀 쓰다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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