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면, 민영의 밥상을 받는 것, 저녁 쯤에는 그녀의 피아노 레슨을 봐주는 날이 또 일주일 가량 지났다. 민영은 레슨 전에 수현이 어질러 놓은 것을 치워놓고 피아노 앞에 앉는 것이 습관이 되어 갔고, 수현은 그런 민영을 지켜보는 일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민영은 예전보다 더 자주 웃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보다 수다가 줄었다. 수현은 가끔 그녀가 처음 공항에서 봤던 작고 힘센 처녀가 맞는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변화는 그녀에게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수현도... 민영에게 느끼는 자기의 감정이 더 깊어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도 민영을 보며 미소짓는 날이 많았고, 늦게 잠이 들었어도 그녀가 오는 이른 아침이면 깨 있는 때도 더러 있었다.

 "그거 알아요?"

피아노 연습 중 배고프다며 민영은 또 초콜렛을 하나 까먹으며 수현에게도 내민다.

"뭘?"

 사실 단 걸 그닥 좋아하지 않았지만, 성의를 생각해 하나는 까서 그녀 앞에서 먹는다.

"선생님 요새 많이 웃으세요."

그렇게 말하는 민영의 눈이 반달이 된다.

"가만 계실 때보다 훨씬 보기 좋아요."

'그래'하며 수현이 웃는다. 그러나 순간 당황스런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 먹던 초콜렛에 사래가 걸린다.

 "사래 들리셨어요?"

 민영은 수현의 등을 탁탁 쳐주고 수현은 얼굴이 빨개져서 기침만 해댄다.

 "너 손 매워."

 하지 말라고 손짓하는 수현의 말에 민영은 등을 치던 손을 멈춘다.

 "얼른 연습해. 난 물 마시고 올게."

 수현은 자리를 뜨고 민영은 다시 건반 위에 손을 올린다. 손가락이 짧아 낮은 도에서 높은 도까지 닿지 않자 민영은 매 곡마다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그래봤자 동요라고는 하지만 민영의 피아노 실력은 날마다 늘어가고 있었다. 그런 민영이 수현은 기특했다. 연주를 하거나 곡을 쓰는 것 외에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은 줄 몰랐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 이후, 거의 혼자 살다시피 한 그의 곁에 누군가가 함께 있은 적이 거의 없던지라, 지금 그녀가 채우고 있는 이 순간이 사뭇 따뜻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여러 생각에 잠겼던 그는, 요 며칠, 윤서준에 대한 꿈을 꾸지 않았던 것을 문득 떠올렸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그의 잠을 깨웠던 그... 피곤에 젖은 날이면 더욱더 선명했던 그의 모습이었는데...

 "선생님."

 민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온다.

 "응?"

 물컵을 들고 우두커니 서있는 그를 본 민영은 더 의아스럽다.

 "...해볼까요?"

 "...어..."

 수현은 그제야 그녀 옆에 앉는다. 민영은 그날 배운 곡을 친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르는 그녀의 노래가 예쁘다. 그날의 레슨은 그렇게 끝났다.

 "내일은 제가 못 올 수 있어요. "

 민영은 내일 앞전에 수현과 답사를 갔던 곳에 어린이집 아이들과 그들의 학부형들과 함께 가족 나들이를 간다고 한다.

 "아침  못 차려드려도 밥 안 거르실 수 있죠?"

 그말에 수현이 피식 웃는다.

 "안 걸러."

수현의 말에 민영도 웃는다.

 "알았어요. 그럼, 갔다 와서 뵈요."

민영을 배웅하고 수현은 소파에 눕는다. 탁자에는 민영이 놓고 간 키세스 초콜렛 다섯 개가 일자로 서있다. 보는 것 만으로도 마음 한 켠이 점점 행복해지는 것 같다.

"...윤서준... 괜찮니?...나 조금만... 행복해도..."

 

 다음 날 아침, 습관이 든 듯 민영이 오는 시간에 눈을 떴다. 

 '오늘 주민영은 오지 않아.'

 중얼거리며 수현은 눈을 감았다. 두레박에 물이 비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민영의 문자가 도착했을 때가!

 '좋은 아침이에요. 잠은 침대에서 잘 주무셨나요? 끼니 거르지 말구요, 나중에 뵈요.'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수현은 그 좋은 기분으로 조금 더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두 시간 쯤 푹 잔 후 수현은 일어나 샤워를 하고 계란과 빵으로 아침을 준비했다.

 '밥 안 거르실 수 있죠?'

 그렇게 말했던 민영의 얼굴이 생각나 수현은 피식 웃으며 머그 컵 가득 우유를 부었다.

 오늘은 그의 콘서트 문제로 기획사 사무실에 들르기로 했다. 그의 콘서트를 코디해줄 공연 코디네이터를 섭외했다는데 사실 그에게는 공연 코디네이터는 생소한 직업이었다.

 "오셨어요?"

 자주 오지는 않았지만 이미 안면을 익힌 사무실 사람들이었다.

 "회의실로 안내해 드릴께요."

일을 막 배우기 시작하는 사무실 막내다. 수현은 그의 모습에서 얼핏 민영을 떠올렸다.

 "오셨어요? 마침 잘 왔어요."

 문을 열고 들어서던 그가 우뚝 서 버렸다.

 "인사해요. 이 쪽은 공연 코디네이터이자, 정수현씨 공연 투자자이신, 강 시현씨."

 사장의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 앞에, 10년전 자신을 떠났던 그녀, 강 시현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다시 뵈서 반가워요."

 정 수현은 그녀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 손은 무엇을 잡기 위함인가? 저렇게 손 내민 저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녀 앞에 서있는 자신, 정수현은... 지금 어디 서있는가?... 수현은 일순, 설명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에 빠져 그저 그녀의 손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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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역에서 민영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수현은 소파에 누워서 탁자 위에 놓여진 염색된 린넨 티셔츠만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쑥향이 짙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민영이 자꾸 생각났다. 생각나고 또 생각 나서 수현은 도리질을 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삐이이이이-.

주말 이후, 월요일. 민영은 아침을 차려놓고 하루 일과를 마친 뒤, 저녁 무렵, 오겠다는 문자를 주고 정확히 30분 후, 수현의 집에 도착했다.

 "저 왔어요."

 그녀의 한 손에 후리지아 한 다발이 들려 있다.

 "왠 꽃이야?"

 수현은 그저 물었다. 그러나 가슴 한켠에, 아주 작은 돌멩이 하나가 얹어진 듯 하다. 민영에게 완전히 마음이 가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뭔가 부대끼는 듯 하다.

 "한 다발 샀어요. 향이 좋아서."

 민영은 가방에서 기다란 병 하나를 꺼낸다. 병까지 가지고 와 놓고서는, 오다가 한 다발 꽃을 샀노라고 무심히 얘기하는 그녀가 재밌다.

 "탁자에 발 올리고 주무시지 마시고, 혹시 발에 채여서 물 쏟고 꽃이랑 매트랑 상하지 마세요. 날씨가 따뜻한 건 사실이지만, 다음 부터는 방에서 주무세요. "

민영은 입으로는 말하면서 탁자 주변의 컵들과 어지러이 널려 있는 고지서 봉투, 종이 등을 다 주워서 휴지통에 담고 깨끗이 정리한다. 수현은 민영의 그런 모습을 그저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민영의 악보로 고개를 돌린다.

 "연습은 어떻게 하는지 알지?"

 수현은 민영의 앞에 악보를 놓아주고 돌아선다. 민영은 건반을 하나씩 두드리며 천천히 연습을 시작한다.

 

 아파트 담장을 넘어 늘어진 덩굴에서 초록잎을 배경으로 장미가 빨갛게 색을 내고 있었다. 이렇게 날이 좋은데, 교복에 음악회라니...민영은 못마땅한 마음을 그저 참는다.

 "재은아~~"

버스 정류장에서 무심히 장미를 보는 친구의 모습이 보인다.

"뭐야~~ 왜 이제 와~?"

 민영은 제 시간에 약속 장소에 나타난 적이 없다.

"헤, 미안... 많이 기다렸어?"

"몰라"

그저 웃어버리는 민영을 재은은 새침하게 대한다. 버스가 오고 그들은 버스에 오른다.

"오늘 음악회에 누가 나온다는 거야?"

자리를 잡고 앉자 민영이 묻는다.

"윤서준."

"그 사람 나오는 건 알고 있고. 다른 사람은?"

재은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든다. 민영은 한숨을 내쉰다.

"중요해? 누가 나오든 말든, 윤서준만 나오면  되는데?"

재은의 말에 민영도 그저 웃어버린다. 재은은 가방에서 지난 번 받은 싸인을 꺼내 본다.재은의 표정이 밝다.

 

 손가락이 짧아서 낮은 도에서 높은 도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다. 소리도 이상하게 나고 어찌해도 늘지 않는 듯 싶다.

 "밤 샐 거야? 왜 그 부분만 연습해?"

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들었더니 짜증이 밀려온다.

"네? 아, 아니요..."

민영은 건반에서 손을 뗀다. 그 순간의 분위기가 어색하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고 민영도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손만 내려다 볼 뿐이다.

"...배고파?"

보다 못해 수현이 묻는다. 민영은 수현을 돌아보고 씨익 웃는다.

"아니요... 괜찮아요."

민영은 천천히 처음부터 다시 연습하기 시작한다. 역시 손 가락이 짧아서 그런지 이상한 소리가 난다. 수현은 그녀의 옆에 바싹 앉는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손 아래에 자신의 왼손을 쓰윽 집어넣는다. 흠칫 놀라는 민영의 움직임을 느꼈으나 수현은 태연한 척한다.

 "이 부분은 이렇게 치는 거야. "

 20년 넘게 피아노를 쳐온 그였다. 일반인이 오른손으로 배우는 주법을 왼손으로 흉내내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이렇게 누군가의 손을 얹고 피아노를 친 것도 1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단지, 가늘고 길었던 그녀의 손가락과 달리 민영의 손가락은 몽톡하고 짤막해서 아이 손을 아빠의 손위에 얹은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찬 기운이 돌았던 그녀의 손과 달리, 민영의 손은 따뜻했다.

 "알겠지?"

수현이 손을 빼내자 민영의 손가락들만 건반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민영은 그저 웃는다.악보로 시선을 돌리는 그녀의 얼굴에 붉은 빛이 돈다. 그런 그녀가, 마음에 든다. 뒤로 묶은 그녀의 머리카락중 한 가닥이 귀 옆으로 흘러 내려 있다. 무심결에 그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려고 무릎위에 두었던 손을 펴려다 스스로 놀라서 주먹을 쥔다.  그 순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린다. 그녀가 귀엽다고 느낀 그 순간, 그녀를 와락 껴안아 주고 싶었다.

 "연습 다 됬으면 얘기해."

수현은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버린다. 민영은 신경쓰지 않으려고 더욱 열심히 연습한다. 

방으로 들어온 수현은 정면에서 바로 보이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본다. 바보같다. 늘 보던 얼굴이 오늘은 이상해 보였다.  민영과 함께 염색했던 티셔츠가 그의 눈에 띤다. 

"선생님, 이제 해 볼래요. "

민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현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다가 한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 보았다.

 '바보..정 수현...'

그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더니 방문을 열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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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셋이 들어갈 수 있을까 싶은 움막 같은 집 앞에 표정이 온화한 사람이 쑥을 손질하고 있었다. 코끝에서는 조금씩 한기가 났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었다.

"저, 혹시 천연 염색 체험 하는 곳이 여기 맞나요?"

 주민영이 그의 옆에 다가가서 물었다.

 "아, 네. 3시에 예약하신 분이시죠?"

 "네."

 그는 오랜 친구를 보는 것인 양 민영의 손을 잡아주었다. 아니, 민영의 반가워 하는 모습에 손을 내밀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수현은 생각했다.

"그런데 웬 쑥이에요?염색 체험은 여기가 아닌가 봐요"

민영의 말에 그가 웃었다. 그는 40이 좀 넘은 듯, 다 큰 자녀를 두고 있을 법한 어머니 같았다.

"이 쑥으로 천연 염색 체험을 하는 거랍니다."

"아~ 그래요? 전 쑥으로 저녁 준비하시려고 그러시는 줄 알았어요."

 민영은 얼굴을 붉히면서 크게 웃어버린다. 그녀는 상황이 멋적거나 어색할 때 그렇게 웃는 듯 했다. 수현은 그런 그녀에게 이마저도 익숙해져 버린 자신을 깨닫는다.

 

 어린 두 사람 앞에 서 있는 그는 빨간 머리를 어쩌지 못해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다.

 "여기 계신 어르신들께는 정말 죄송한데, 얼마 전에 빨간 색으로 염색을 해서요.보기 흉하실까봐 일부러 모자를 썼습니다. "

그래서 그런지 텔레비전에서 봤던 그의 모습과는 매치가 잘 되지 않는 듯 했다.

 "여기 오신 분들은 그런 윤서준씨를 이해하실 거예요. 그래도 모자 벗은 모습 한 번만 좀 보여주세요. "

 행사를 진행하던 사회자가 그에게 요청하자 그는 천천히 모자를 벗고 어색한 듯 웃었다.

 "와~~ 너무 멋있어요!"

옆에 있던 재은의 외침에 사회자와 그가 돌아보고 웃었다. 민영은 순간적으로 재은의 어깨를 툭 쳤다. 재은도 얼굴이 빨개지는 듯 자기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는 'Friend'라는 곡을 불렀고, 민영은 처음으로 그가 노래를 잘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엇보다 민영은 재은이 지금 참 행복해 보여서 좋았다.

 

염색은 시간이 걸렸다. 쑥을 끓이고 물을 걸러내서 한 번 더 끓이고 민영이 가져온 얇은 린넨 티셔츠를 담가 색을 입히고 셔츠가 조금은 마르기까지 그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다. 민영은 염색을 돕는 자원 봉사자에게 다정 다감 했고, 조금은 사적인 이야기에도 거리를 두지 않고 말했다. 흡사 그 모습이 모녀지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염색이 다 된 티셔츠를 받고 일어섰을 때 주변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바람도 조금씩 더 차가워진 것 같았다.

 "춥지 않나요?"

 민영은 가방에서 뭉치 하나를 꺼냈다.

"아니, 괜찮아."

민영은 그 뭉치를 펼치더니 입고 지퍼를 채웠다. 점퍼였다.

"그건 어디서 난 거야?"

외국에서는 봤던 기억이 있다.

"오래 된 거예요. 아는 분이 외국 나가셨다가 입고 오신 거였는데 제가 갖는다고 했어요."

"빼앗았다고?"

 수현의 되물음에 또 민영이 웃었다.

"그런거죠 뭐."

수현도 미소 지었다. 저물어가는 주변은 고즈넉했다. 가로수가 길 곁에 나란히 자라서 울타리를 만든 산책로는 손을 꼬옥 잡고 걸으면 더 좋을 듯 싶었다. 풀도 나무도 꽃도... 그 곳에 있는 것은 전부 소박해 보이면서도 수려했다.

 "선생님, 사진 같이 찍으실래요?"

 민영이 카메라를 빼더니 수현이 뭐라 하기도 전에 곁을 걸어가는 사람을 불러 세웠다. 연인인 듯 했다. 카메라를 맡기고 민영은 수현의 팔짱을 꼈다. 수현은 흠칫 놀라서 그녀를 내려다 보았지만, 민영은 게의치 않은 듯 했다.

"앞에 봐요 빨리."

수현은 카메라를 보고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다. 민영에게서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얼른 가, 저 사람 가기 전에."

 민영이 재은을 재촉한다. 재은은 연습장과 펜을 들고 안절 부절한다.

"싸인 받는다며?"

 민영이 또 재촉하자 재은은 울상이 되어 버린다.

 "어떻게 가~."

 한숨이 나온다. 민영은 재은의 손을 어거지로 잡아끌고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참 어색한 접근법이다.

 "싸인 한 장만 해주세요."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있었지만 워낙 톤이 명확한 목소리에 민영을 돌아본다.

 "어, 그래. 이름이 뭐니?"

 그가 민영에게 몸을 틀자, 외려 그 모습에 민영이 흠칫 놀란다.

 "아...제가 아니구요, 얘요."

 민영은 재은을 앞으로 잡아 끈다. 그가 웃는다.

 "그래... 친구는 이름이 뭐니?"

 그가 묻자 재은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고 재은이요...."

 "응?"

 그는 자세를 낮추고 재은의 이름을 다시 물어본다. 재은은 아까와 다름 없는 크기의 목소리였지만 그는 재은의 이름을 쓰고 싸인을 해주었다. 그는 재은에게 악수를 청했고, 그런 그들을 유심히 본 민영은 정말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수현은 차창 밖을 내다보며 사색에 잠겼다. 오늘 봤던 모든 풍경이 머릿 속에서 뱅글 뱅글 돌며 춤을 추는 듯 했고 피아노 선율이 어느 시점에서 한 음씩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 때, 어깨로 느껴지는 무게에 옆을 돌아보았다. 너무도 가까이, 민영의 얼굴이 보였다. 완전히 잠든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 지 고민이 된 건 사실이었지만, 수현은 그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너무도 나이어린 이 처녀에게 마음이 가지 않도록, 그녀의 품어내는 향기에 홀리지 않도록, 자꾸 그녀에게 끌리지 않도록 수현은 그저 차창 밖만 무심히 내다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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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나이에 비해 성숙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건반을 치는 그의 손도 조화를 함께 이루어내는 듯 했다.

 "와~. 형 이 노래 감이 좋은데요."

 "정말?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그가 처음 찾아와 곡을 써달라고 했을 때는 작곡을 할 수 있을까도 긴가민가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를 듣고 어울리는 곡을 써보리라 마음 먹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거, 이번에 제 음반 타이틀로 넣어야 겠어요. "

 "그 정도야? 그럼 나도 좋긴 하다만."

 그의 표정이 아이처럼 밝았다. 그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도 꽉찬 기쁨이 있었다.

 

삐이이이이-.

주민영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선생님."

민영의 풀어헤친 머리에서 샴푸 냄새가 났다. 수현은 정신이 조금 나는 듯 했다.

 "얼마 전에 봄동이 나오더니 요새는 봄 나물도 많이 나와요. "

 수현은 대체로 민영에게 말을 걸거나 대화를 오래 한 적이 없었다. 아침에 불쑥 찾아오는 날이 계속 되었지만 언제나 말을 걸거나 부지런히 수다를 떠는 쪽은 민영 쪽이었다.

 "지금이 점심이면 보리밥 해서 봄동 무쳐놓고 비벼 드시라고 할텐데, 이른 아침이고... 게다가 선생님은 그런 쪽은 아니신 것 같아서 그냥 달래 무침에 냉이 된장국 끓이려구요. "

 그녀는 항상 재료를 준비해 와서 아침을 준비했다. 한참 바쁜 듯 하더니 된장국 냄새가 났다. 그녀는 잠시 쟁반에 컵 하나를 준비해서 수현에게 건넸다.

"뭐야?"

 수현이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 본다.

"국화차요. 봄이잖아요."

 그녀의 머리는 하나로 묶여있었다.차 향이 그녀의 미소를 따라 춤추는 듯 했다. 민영은 다시 부엌으로 가버렸고, 수현은 차향을 맡으며 말없이 민영의 행동을 보고 있었다.

"선생님, 밥 되는대로 빨리 드시고 외출할 준비 해 두세요."

 그녀는 또 핸드크림을 꺼내 바른다.

 "왜?"

 수현이 의아해하자 민영이 또 미소짓는다.

"데이트?"

 그렇게 대꾸하는 민영의 표정에 장난기가 스친다. 처음 민영과 만났던 공항에서 차로 이동하면서 보았던 그 미소다. 순간 수현은 식은 땀이 나는 듯 하다. 엉뚱하기 그지 없는 이 처녀가 또 무슨 짓을 할까 싶다.

 "열 시까지 올께요. 준비 안 하시고 안 가신다 그러면... 저의 새로운 모습을 보실 수 도 있어요."

 뒷 말을 이을 때 민영은 일부러 인상을 썼다. 그 표정에 수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민영은 가버렸다. 수현은 그녀가 가버린 문만 지켜보고 있다가 밥솥에서 김이 빠지는 소리를 듣고 부엌으로 방향을 틀었다. 입이 꺼끌꺼끌했다. 아까 전, 민영이 준 차는 향만 음미했을 뿐이었다. 수현은 차가 든 컵을 들고 식탁 앞에 앉았다. 민영이 준비해 놓고 간 아침상만 물끄러미 보다가 젓가락을 들어서 달래 무침을 들어 맛을 보았다. 김을 넣은 계란 말이도 한 점 들어 입에 넣었다. 따뜻했다. 민영이 차려놓은 밥상 앞에 앉으면 혀가 아닌 가슴이 먼저 데워지는 듯 했다.

 

 오전 열 시.수현은 물끄러미 벽시계가 10시를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삐이이이이-.

 민영은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준비 되셨어요?"

 민영의 옷차림이 다소 가볍다. 완연한 봄이다.

 "이게 다 뭐야?"

 수현은 민영의 손에 큰 백이 들려있는 것을 본다.

 "도시락이요."

 민영은 씩씩하게 앞장 서 간다. 수현은 잠시 그녀의 뒤를 따르다 그 큰 백의 손잡이를 잡는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았다.

"무거우실텐데..."

 민영은 또 웃는 얼굴을 한다. 사실 그닥 무겁지 않았다. 택시를 잡아 타고 민영은 기차역으로 가자고 한다.

"도데체 어디를 가는 건데?"

궁금함에 수현이 묻자,

"데이트 하러요."

 하며 민영은 또 웃는다. 수현의 궁금증은 기차표를 확인하고 나서야 풀렸다.

 

 종이 뭉치는 휴지통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뭐야? 왜 이렇게 안 들어가?"

 어린 민영은 계속 투덜투덜 대며 연습장을 찢어서 있는대로 꾸기고는 휴지통 속을 조준하여 던진다.

"넌 왜 사소한 데 목숨걸어? 화장실 안 갈거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 재은이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든다.

"기다려 봐. 내 이 시간도둑들을 다 찢어서 지옥에 다 쳐넣고 말겠어."

 시험이 끝나고 공부했던 만큼 시험에 반영이 안되면 어린 민영은 그렇게 공부했던 연습장을 찢어서 분풀이를 해댔다.

"나 오줌보 터져. 하려면 화장실 갔다와서 하자."

재은은 아까부터 민영을 기다렸던 터다.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냐."

 그렇게 민영이 일어서던 순간, 수업종이 울렸다. 둘은 놀라서 서로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복도로 뛰어간다.

 "너 먼저 쌌다고 먼저 들어가면 너랑 나랑 끝이야!"

"누가 할 소리!너나 의리 지켜!"

모든 아이들이 교실로 뛰어가는 찰나, 그 둘은 나란히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수현의 눈에 몸이 반쯤 물에 잠긴 동상이 보였다.

 "아~ 저게 인어상이구나~."

 민영이 카메라를 들었다.

 "인어상?"

 수현이 되묻자 민영이 사진을 한 컷 찍더니 예의 그 밝은 미소를 보인다.

"원래는 공원에서 있었던 동상이었는데 물이 들고 나는 뭍에 두었대요. 물이 저렇게 차서 몸이 반쯤 잠기면 꼭 안델센 동화의 인어 같잖아요."

수현은 다시 동상에 눈을 돌린다. 민영은 또 인어에 대한 수다를 떤다. 홈피에서 보았다는데, 물고기가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 고향을 떠나서 사람이 되었다는 둥, 왕자님을 아직도 기다린다는 둥...

 수현은 무심한 듯 듣고 있었다.

 배가 섬에 닿자 민영의 수다도 줄고, 수현의 사색도 깊어졌다. 민영은 자주 사진을 찍었고 무심한 듯 걷다가 수현을 돌아보고 씩 웃기를 반복했다. 수현은 그곳이 좋았다. 머리 위를 덮은 듯 그늘진 나무가 있어 좋았고, 꽃향기를 그윽히 실은 바람의 느낌도 좋았다. 늘 그렇듯, 머리로 가슴으로 멜로디가 떠오르다 사라지고 또 떠오르는 것 같았다. 수현은 머릿 속으로 순간 순간 떠오르는 음들을 엮어내었다. 둘은 그렇게 한 참을 걸었다. 민영은 그런 수현을 방해하지 않고 그를 캠핑장까지 이끌어갔다. 민영은 수현의 손에서 가방을 받아들더니 도시락을 꺼내 펼쳐 놓았다.

 "예쁜 도시락이네."

 민영의 도시락을 보고 수현이 입을 열었다.

"신경 좀 썼죠. 선생님이 드실 건데."

 민영은 나무 젓가락을 수현에게 건넨다. 민영의 볼에 붉은 빛이 도는 것이 보였다.

 "먹기가 아까울 정도인데, 먹지 말까?"

 수현이 말하자 민영은 도리질을 한다.

 "설마요. 보기만 좋은 게 아니라 맛도 좋은데."

수현은 그제서야 젓가락을 댔다. 김밥에 샌드위치에 과일까지... 민영의 도시락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아침에 밥 차려주고 시간이 있었어? 이런 걸 다 언제 했어?"

민영의 물음에 수현은 입에 있던 김밥을 마저 씹어 꿀떡 삼킨다.

"전날 다 준비해 놓아서 바로 싸고 한 거예요. 시간 별로 안 걸려요."

보온병에 담아온 보리차를 따라서 수현에게 건넨다.

"맛있죠?"

민영의 말에는 자신감이 듬뿍 배어나온다. 수현은 고개만 끄덕인다. 민영의 기분좋은 웃음 소리가 들린다.

 점심 후,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바로 앞에 난 강을 바라본다.

"같이 들으실래요?"

민영이 씨디피를 꺼내더니 이어폰 한 쪽을 수현에게 내민다. 수현은 민영 옆에 조금 더 가까이 앉고 이어폰을 받아든다. 얼마 전에 민영이 샀던 연주 그룹의 음악이었다.- 사실, 수현은 민영이 사 가지고 갔던 음반과 책이 궁금해 그녀 몰래 같은 것을 사서 듣고 읽었다.-둘은 말없이 음악을 듣고 앞의 강만 바라보았다. 수현은 그 시간이 약간은 어색했지만, 그 곳의 환경과 민영이 주는 편안함에 깊숙이 안주해 가는 듯 했다.

"어? 벌써 시간이 됐네."

민영의 말에 수현은 이어폰을 뺐다.

"왜?"

 민영은 짐을 들고 일어났다.

 "약속해 놓은 체험 프로그램이 있어서요. 얼른 가요."

민영은 모든 짐을 혼자 다 들고 앞서 걸어갔다. 수현은 뭐가 뭔지 몰라 잠시 앉아 있다가 민영의 뒤를 쫓아 가방을 들어 주었다. 민영은 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오후가 깊어질수록 손이 시렸다. 봄이라지만 여전히 오후 날씨는 그랬다. 그러나 수현은 뜻밖에도 뺨으로 부딪히는 바람에서 온기를 느꼈다. 어느 새 그는, 민영의 옆에서 그녀와 보조를 맞춰 나란히 걷고 있는 자신을 느꼈고, 그 때 느낀 기분이 싫지 않다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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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현이 주민영에게 문자를 받고 정확히 30분 후, 정말 그녀는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들어섬과 동시에 수현은 다시 바깥의 찬 기운을 느꼈다. 민영의 화장기 없는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춥지?"

 핏기 없어 보이는 민영의 입술을 보고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아니요, 그닥 춥지는 않아요."

 민영은 미소띤 얼굴로 반대말을 한다고 수현은 생각한다. 민영은 가방을 의자에 올려놓더니 바로 부엌으로 간다.

"아저씨 차 드실래요?"

수현은 뭐가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기포트에 물을 올려 놓고 자기 가방에서 차 케이스를 꺼내는 민영을 보고는 할 말을 잃는다.

 "지인한테서 받은 차인데 건강에 좋대서요."

물이 끓자 머그컵을 두 잔 내서 티백을 넣고 그 끓은 물을 부어 찻잎을 우린다. 카모마일이다.

 "향이 참 좋죠."

민영은 눈을 갚고 향을 맡더니 가볍게 한 모금 마신다. 수현은 그런 민영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다.

"피아노는...배운 적 있니?"

침묵을 깨고 다시 수현이 먼저 묻는다.

"네...근데 어릴 적에 배운 건 아니구요.... 일 시작하면서 피아노 배운다고 학원에 가기는 했는데 여의치 않아서요... 그래서 바이엘 떼다 말았어요."

민영은 쑥스러운 듯 또 웃는다. 찬 공기에 발그레졌던 볼이 또 붉어진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수현은 뭐라 할 말이 없어 되레 민영에게 묻는다.

 "악보 몇 장 가져왔어요."

민영은 가방 안에서 홀더 한 권을 꺼낸다.

"제가 배우고 싶은 곡부터 차례로 정리했어요."

수현은 말없이 민영의 손에서 홀더를 받아들고 펼쳐 본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민영의 준비성에 감탄이 나오려 했다.

 "그럼, 계이름은 읽을 줄 아니?"

 민영은 말이 없다. 표정도 이상하다.

"알았어. 잠깐만..."

 수현은 펜과 종이를 가져와서 맨 첫 장의 동요를 보고 계이름을 적어준다.

"차 다 마셨으면 피아노 앞에 앉아봐."

 수현의 피아노는 수현이 입주하기 전, 이미 들여놓은 것이었다. 연주하고 받아적고 지우고 구겨버린 악보만 주변에 널려 있다. 민영은 먼저 주변의 종이들, 심지어 구겨진 것들조차도 다 모아서 피아노 위에 얹어놓는다. 수현은 이제 그녀의 행동이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다.

 "쳐 봐."

 "네?"

 "계이름 써 줬잖아. 보고 쳐 봐."

 수현의 주문에 민영은 잠시 움직임이 없더니, 계이름을 보고 한 손으로 쳐 보기 시작한다.

 "도, 시, 도, 솔, 미..."

 민영은 그렇게 한 손으로 끝까지 계이름을 쳐낸다.

 "지금부터 계이름 외울 때까지 계속 쳐."

 "네?"

 "써놓은 계이름 안 보고 칠 수 있을 때까지 외우라고."

 "아..." 

 민영이 다시 건반을 누르자, 수현은 자리를 뜬다.

 

 "민영아, 민영아!"

재은은 거의 날라 오다시피 한다.

 "뭐야? 뭔데 그래?"

 민영은 숨 넘어가는 재은의 손에서 우유를 받아든다. 민영과 재은이 자주 마시는 바나나 우유다.

"방금 우리 교회 다니는 언니 한테 들었는데, 윤 서준이 우리 교회 온대."

 사래에 걸려 민영은 순간 콜록 기침을 한다.

"뭐? 그 사람이 왜?"

 말을 하면서도 중간 중간 기침을 해 대자 재은은 민영의 등을 탁탁 쳐준다.

"우리 교회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문화행사 하거든. 근데 게스트로 윤서준이 초대됬대."

 "그래? 잘 됐네."

 민영은 다시 바나나 우유를 마신다. 

"같이 가는 거다."

"어딜?"

 "우리 서방님 만나러. 너도 같이 가는 거다."

또 사래가 들린다.   

"뭐야? 너 너무 티내는 거 아냐?"

재은은 크게 소리내서 웃으면서 민영의 등을 탁탁 두드려준다.

 

 "어디 보고 치는거야?"

 수현의 목소리에 민영은 놀래서 다른 건반을 쳐버린다.

 "아... 아니요..."

 민영이 계이름을 보고 다시 치자 수현은 민영을 지켜본다. 분명히 민영의 얼굴에 어리던 이상한 표정 하나가 있었다.

"그럼 안 보고 쳐 볼래?"

 수현은 민영이 뭐라 말 할 새도 주지 않고 계이름이 적힌 종이를 치워 버렸다. 민영은 정지된 듯 있다가 수현의 말대로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뭐야, 연습 엉망으로 하더니 못 치잖아!"

사실 수현은 민영이 치는 피아노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단지 조금 전의 그 이상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고 싫었던 것 뿐이었다.

 "배고파서 그랬어요."

민영은 예의 그 미소를 다시 띄었다.

 "아저씨는 배 안고파요?"

민영이 생글 생글 웃으며 말하자 수현은 뭐라 더 할 말이 없어졌다.

"잠시만요."

민영은 일어나더니 자기 가방에서 키세스 초콜렛 한 봉지를 꺼냈다.

 "이거 까드시고 조금만 기다리세요. 좀 더 연습해서 예쁘게 쳐 볼게요. "

 민영은 키세스 초콜렛 한 주먹을 수현의 손에 쥐어주고 자신도 하나를 까서 먹는다. 그리고 정말 아무 말없이 30분을 더 연습한다.

"된 것 같아요."

 초콜렛 하나를 까서 입에 넣으며 민영은 수현을 부른다. 수현의 손에는 민영이 준 초콜렛 들이 녹고 있다.

 "쪼로로롱 산 새가 노래하는 아침에..."

 민영은 피아노를 치면서 직접 동요도 불렀다. 열심히 연습한 흔적을 느꼈고 무엇보다 민영의 목소리가 고왔다. 수현은 민영의 옆에 앉아 말없이 그녀의 목소리와 피아노 소리를 들었다.

 "아기 다람쥐 또미!"

 드디어 그녀의 노래가 끝났다. 그녀의 얼굴에 자신감이 넘쳤다. 수현의 손에서는 아직도 초콜렛이 쥐어져 있다.

 "저 잘했죠?"

 수현은 늘 그녀의 자신감이 궁금하다.

 "아니."

 "에이~"

 도데체 그녀는 실망한다는 것, 좌절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그렇게 민영과의 첫 피아노 레슨이 끝났다.

"수고 많으셨어요. "

그녀는 손을 씻고 또 핸드크림을 꺼내 바른다.

"내일도 잘 부탁드려요...선생님."

수현의 호칭은 이제 아저씨에서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뭐라 이야기 할 수 없다. 민영은 밝은 얼굴로 갔고, 수현은 그녀가 가버린 문만 또 한 참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에 그녀가 준비해놓고 가는 밥상 때와는 다른, 무언가 풍성하고 배부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그에게 주는 또다른 감정, 그건 오랜 만에 느껴보는 '뿌듯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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