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이에 비해 성숙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건반을 치는 그의 손도 조화를 함께 이루어내는 듯 했다.
"와~. 형 이 노래 감이 좋은데요."
"정말?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그가 처음 찾아와 곡을 써달라고 했을 때는 작곡을 할 수 있을까도 긴가민가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를 듣고 어울리는 곡을 써보리라 마음 먹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거, 이번에 제 음반 타이틀로 넣어야 겠어요. "
"그 정도야? 그럼 나도 좋긴 하다만."
그의 표정이 아이처럼 밝았다. 그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도 꽉찬 기쁨이 있었다.
삐이이이이-.
주민영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선생님."
민영의 풀어헤친 머리에서 샴푸 냄새가 났다. 수현은 정신이 조금 나는 듯 했다.
"얼마 전에 봄동이 나오더니 요새는 봄 나물도 많이 나와요. "
수현은 대체로 민영에게 말을 걸거나 대화를 오래 한 적이 없었다. 아침에 불쑥 찾아오는 날이 계속 되었지만 언제나 말을 걸거나 부지런히 수다를 떠는 쪽은 민영 쪽이었다.
"지금이 점심이면 보리밥 해서 봄동 무쳐놓고 비벼 드시라고 할텐데, 이른 아침이고... 게다가 선생님은 그런 쪽은 아니신 것 같아서 그냥 달래 무침에 냉이 된장국 끓이려구요. "
그녀는 항상 재료를 준비해 와서 아침을 준비했다. 한참 바쁜 듯 하더니 된장국 냄새가 났다. 그녀는 잠시 쟁반에 컵 하나를 준비해서 수현에게 건넸다.
"뭐야?"
수현이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 본다.
"국화차요. 봄이잖아요."
그녀의 머리는 하나로 묶여있었다.차 향이 그녀의 미소를 따라 춤추는 듯 했다. 민영은 다시 부엌으로 가버렸고, 수현은 차향을 맡으며 말없이 민영의 행동을 보고 있었다.
"선생님, 밥 되는대로 빨리 드시고 외출할 준비 해 두세요."
그녀는 또 핸드크림을 꺼내 바른다.
"왜?"
수현이 의아해하자 민영이 또 미소짓는다.
"데이트?"
그렇게 대꾸하는 민영의 표정에 장난기가 스친다. 처음 민영과 만났던 공항에서 차로 이동하면서 보았던 그 미소다. 순간 수현은 식은 땀이 나는 듯 하다. 엉뚱하기 그지 없는 이 처녀가 또 무슨 짓을 할까 싶다.
"열 시까지 올께요. 준비 안 하시고 안 가신다 그러면... 저의 새로운 모습을 보실 수 도 있어요."
뒷 말을 이을 때 민영은 일부러 인상을 썼다. 그 표정에 수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민영은 가버렸다. 수현은 그녀가 가버린 문만 지켜보고 있다가 밥솥에서 김이 빠지는 소리를 듣고 부엌으로 방향을 틀었다. 입이 꺼끌꺼끌했다. 아까 전, 민영이 준 차는 향만 음미했을 뿐이었다. 수현은 차가 든 컵을 들고 식탁 앞에 앉았다. 민영이 준비해 놓고 간 아침상만 물끄러미 보다가 젓가락을 들어서 달래 무침을 들어 맛을 보았다. 김을 넣은 계란 말이도 한 점 들어 입에 넣었다. 따뜻했다. 민영이 차려놓은 밥상 앞에 앉으면 혀가 아닌 가슴이 먼저 데워지는 듯 했다.
오전 열 시.수현은 물끄러미 벽시계가 10시를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삐이이이이-.
민영은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준비 되셨어요?"
민영의 옷차림이 다소 가볍다. 완연한 봄이다.
"이게 다 뭐야?"
수현은 민영의 손에 큰 백이 들려있는 것을 본다.
"도시락이요."
민영은 씩씩하게 앞장 서 간다. 수현은 잠시 그녀의 뒤를 따르다 그 큰 백의 손잡이를 잡는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았다.
"무거우실텐데..."
민영은 또 웃는 얼굴을 한다. 사실 그닥 무겁지 않았다. 택시를 잡아 타고 민영은 기차역으로 가자고 한다.
"도데체 어디를 가는 건데?"
궁금함에 수현이 묻자,
"데이트 하러요."
하며 민영은 또 웃는다. 수현의 궁금증은 기차표를 확인하고 나서야 풀렸다.
종이 뭉치는 휴지통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뭐야? 왜 이렇게 안 들어가?"
어린 민영은 계속 투덜투덜 대며 연습장을 찢어서 있는대로 꾸기고는 휴지통 속을 조준하여 던진다.
"넌 왜 사소한 데 목숨걸어? 화장실 안 갈거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 재은이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든다.
"기다려 봐. 내 이 시간도둑들을 다 찢어서 지옥에 다 쳐넣고 말겠어."
시험이 끝나고 공부했던 만큼 시험에 반영이 안되면 어린 민영은 그렇게 공부했던 연습장을 찢어서 분풀이를 해댔다.
"나 오줌보 터져. 하려면 화장실 갔다와서 하자."
재은은 아까부터 민영을 기다렸던 터다.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냐."
그렇게 민영이 일어서던 순간, 수업종이 울렸다. 둘은 놀라서 서로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복도로 뛰어간다.
"너 먼저 쌌다고 먼저 들어가면 너랑 나랑 끝이야!"
"누가 할 소리!너나 의리 지켜!"
모든 아이들이 교실로 뛰어가는 찰나, 그 둘은 나란히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수현의 눈에 몸이 반쯤 물에 잠긴 동상이 보였다.
"아~ 저게 인어상이구나~."
민영이 카메라를 들었다.
"인어상?"
수현이 되묻자 민영이 사진을 한 컷 찍더니 예의 그 밝은 미소를 보인다.
"원래는 공원에서 있었던 동상이었는데 물이 들고 나는 뭍에 두었대요. 물이 저렇게 차서 몸이 반쯤 잠기면 꼭 안델센 동화의 인어 같잖아요."
수현은 다시 동상에 눈을 돌린다. 민영은 또 인어에 대한 수다를 떤다. 홈피에서 보았다는데, 물고기가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 고향을 떠나서 사람이 되었다는 둥, 왕자님을 아직도 기다린다는 둥...
수현은 무심한 듯 듣고 있었다.
배가 섬에 닿자 민영의 수다도 줄고, 수현의 사색도 깊어졌다. 민영은 자주 사진을 찍었고 무심한 듯 걷다가 수현을 돌아보고 씩 웃기를 반복했다. 수현은 그곳이 좋았다. 머리 위를 덮은 듯 그늘진 나무가 있어 좋았고, 꽃향기를 그윽히 실은 바람의 느낌도 좋았다. 늘 그렇듯, 머리로 가슴으로 멜로디가 떠오르다 사라지고 또 떠오르는 것 같았다. 수현은 머릿 속으로 순간 순간 떠오르는 음들을 엮어내었다. 둘은 그렇게 한 참을 걸었다. 민영은 그런 수현을 방해하지 않고 그를 캠핑장까지 이끌어갔다. 민영은 수현의 손에서 가방을 받아들더니 도시락을 꺼내 펼쳐 놓았다.
"예쁜 도시락이네."
민영의 도시락을 보고 수현이 입을 열었다.
"신경 좀 썼죠. 선생님이 드실 건데."
민영은 나무 젓가락을 수현에게 건넨다. 민영의 볼에 붉은 빛이 도는 것이 보였다.
"먹기가 아까울 정도인데, 먹지 말까?"
수현이 말하자 민영은 도리질을 한다.
"설마요. 보기만 좋은 게 아니라 맛도 좋은데."
수현은 그제서야 젓가락을 댔다. 김밥에 샌드위치에 과일까지... 민영의 도시락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아침에 밥 차려주고 시간이 있었어? 이런 걸 다 언제 했어?"
민영의 물음에 수현은 입에 있던 김밥을 마저 씹어 꿀떡 삼킨다.
"전날 다 준비해 놓아서 바로 싸고 한 거예요. 시간 별로 안 걸려요."
보온병에 담아온 보리차를 따라서 수현에게 건넨다.
"맛있죠?"
민영의 말에는 자신감이 듬뿍 배어나온다. 수현은 고개만 끄덕인다. 민영의 기분좋은 웃음 소리가 들린다.
점심 후,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바로 앞에 난 강을 바라본다.
"같이 들으실래요?"
민영이 씨디피를 꺼내더니 이어폰 한 쪽을 수현에게 내민다. 수현은 민영 옆에 조금 더 가까이 앉고 이어폰을 받아든다. 얼마 전에 민영이 샀던 연주 그룹의 음악이었다.- 사실, 수현은 민영이 사 가지고 갔던 음반과 책이 궁금해 그녀 몰래 같은 것을 사서 듣고 읽었다.-둘은 말없이 음악을 듣고 앞의 강만 바라보았다. 수현은 그 시간이 약간은 어색했지만, 그 곳의 환경과 민영이 주는 편안함에 깊숙이 안주해 가는 듯 했다.
"어? 벌써 시간이 됐네."
민영의 말에 수현은 이어폰을 뺐다.
"왜?"
민영은 짐을 들고 일어났다.
"약속해 놓은 체험 프로그램이 있어서요. 얼른 가요."
민영은 모든 짐을 혼자 다 들고 앞서 걸어갔다. 수현은 뭐가 뭔지 몰라 잠시 앉아 있다가 민영의 뒤를 쫓아 가방을 들어 주었다. 민영은 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오후가 깊어질수록 손이 시렸다. 봄이라지만 여전히 오후 날씨는 그랬다. 그러나 수현은 뜻밖에도 뺨으로 부딪히는 바람에서 온기를 느꼈다. 어느 새 그는, 민영의 옆에서 그녀와 보조를 맞춰 나란히 걷고 있는 자신을 느꼈고, 그 때 느낀 기분이 싫지 않다는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