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이 주민영에게 문자를 받고 정확히 30분 후, 정말 그녀는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들어섬과 동시에 수현은 다시 바깥의 찬 기운을 느꼈다. 민영의 화장기 없는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춥지?"

 핏기 없어 보이는 민영의 입술을 보고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아니요, 그닥 춥지는 않아요."

 민영은 미소띤 얼굴로 반대말을 한다고 수현은 생각한다. 민영은 가방을 의자에 올려놓더니 바로 부엌으로 간다.

"아저씨 차 드실래요?"

수현은 뭐가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기포트에 물을 올려 놓고 자기 가방에서 차 케이스를 꺼내는 민영을 보고는 할 말을 잃는다.

 "지인한테서 받은 차인데 건강에 좋대서요."

물이 끓자 머그컵을 두 잔 내서 티백을 넣고 그 끓은 물을 부어 찻잎을 우린다. 카모마일이다.

 "향이 참 좋죠."

민영은 눈을 갚고 향을 맡더니 가볍게 한 모금 마신다. 수현은 그런 민영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다.

"피아노는...배운 적 있니?"

침묵을 깨고 다시 수현이 먼저 묻는다.

"네...근데 어릴 적에 배운 건 아니구요.... 일 시작하면서 피아노 배운다고 학원에 가기는 했는데 여의치 않아서요... 그래서 바이엘 떼다 말았어요."

민영은 쑥스러운 듯 또 웃는다. 찬 공기에 발그레졌던 볼이 또 붉어진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수현은 뭐라 할 말이 없어 되레 민영에게 묻는다.

 "악보 몇 장 가져왔어요."

민영은 가방 안에서 홀더 한 권을 꺼낸다.

"제가 배우고 싶은 곡부터 차례로 정리했어요."

수현은 말없이 민영의 손에서 홀더를 받아들고 펼쳐 본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민영의 준비성에 감탄이 나오려 했다.

 "그럼, 계이름은 읽을 줄 아니?"

 민영은 말이 없다. 표정도 이상하다.

"알았어. 잠깐만..."

 수현은 펜과 종이를 가져와서 맨 첫 장의 동요를 보고 계이름을 적어준다.

"차 다 마셨으면 피아노 앞에 앉아봐."

 수현의 피아노는 수현이 입주하기 전, 이미 들여놓은 것이었다. 연주하고 받아적고 지우고 구겨버린 악보만 주변에 널려 있다. 민영은 먼저 주변의 종이들, 심지어 구겨진 것들조차도 다 모아서 피아노 위에 얹어놓는다. 수현은 이제 그녀의 행동이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다.

 "쳐 봐."

 "네?"

 "계이름 써 줬잖아. 보고 쳐 봐."

 수현의 주문에 민영은 잠시 움직임이 없더니, 계이름을 보고 한 손으로 쳐 보기 시작한다.

 "도, 시, 도, 솔, 미..."

 민영은 그렇게 한 손으로 끝까지 계이름을 쳐낸다.

 "지금부터 계이름 외울 때까지 계속 쳐."

 "네?"

 "써놓은 계이름 안 보고 칠 수 있을 때까지 외우라고."

 "아..." 

 민영이 다시 건반을 누르자, 수현은 자리를 뜬다.

 

 "민영아, 민영아!"

재은은 거의 날라 오다시피 한다.

 "뭐야? 뭔데 그래?"

 민영은 숨 넘어가는 재은의 손에서 우유를 받아든다. 민영과 재은이 자주 마시는 바나나 우유다.

"방금 우리 교회 다니는 언니 한테 들었는데, 윤 서준이 우리 교회 온대."

 사래에 걸려 민영은 순간 콜록 기침을 한다.

"뭐? 그 사람이 왜?"

 말을 하면서도 중간 중간 기침을 해 대자 재은은 민영의 등을 탁탁 쳐준다.

"우리 교회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문화행사 하거든. 근데 게스트로 윤서준이 초대됬대."

 "그래? 잘 됐네."

 민영은 다시 바나나 우유를 마신다. 

"같이 가는 거다."

"어딜?"

 "우리 서방님 만나러. 너도 같이 가는 거다."

또 사래가 들린다.   

"뭐야? 너 너무 티내는 거 아냐?"

재은은 크게 소리내서 웃으면서 민영의 등을 탁탁 두드려준다.

 

 "어디 보고 치는거야?"

 수현의 목소리에 민영은 놀래서 다른 건반을 쳐버린다.

 "아... 아니요..."

 민영이 계이름을 보고 다시 치자 수현은 민영을 지켜본다. 분명히 민영의 얼굴에 어리던 이상한 표정 하나가 있었다.

"그럼 안 보고 쳐 볼래?"

 수현은 민영이 뭐라 말 할 새도 주지 않고 계이름이 적힌 종이를 치워 버렸다. 민영은 정지된 듯 있다가 수현의 말대로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뭐야, 연습 엉망으로 하더니 못 치잖아!"

사실 수현은 민영이 치는 피아노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단지 조금 전의 그 이상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고 싫었던 것 뿐이었다.

 "배고파서 그랬어요."

민영은 예의 그 미소를 다시 띄었다.

 "아저씨는 배 안고파요?"

민영이 생글 생글 웃으며 말하자 수현은 뭐라 더 할 말이 없어졌다.

"잠시만요."

민영은 일어나더니 자기 가방에서 키세스 초콜렛 한 봉지를 꺼냈다.

 "이거 까드시고 조금만 기다리세요. 좀 더 연습해서 예쁘게 쳐 볼게요. "

 민영은 키세스 초콜렛 한 주먹을 수현의 손에 쥐어주고 자신도 하나를 까서 먹는다. 그리고 정말 아무 말없이 30분을 더 연습한다.

"된 것 같아요."

 초콜렛 하나를 까서 입에 넣으며 민영은 수현을 부른다. 수현의 손에는 민영이 준 초콜렛 들이 녹고 있다.

 "쪼로로롱 산 새가 노래하는 아침에..."

 민영은 피아노를 치면서 직접 동요도 불렀다. 열심히 연습한 흔적을 느꼈고 무엇보다 민영의 목소리가 고왔다. 수현은 민영의 옆에 앉아 말없이 그녀의 목소리와 피아노 소리를 들었다.

 "아기 다람쥐 또미!"

 드디어 그녀의 노래가 끝났다. 그녀의 얼굴에 자신감이 넘쳤다. 수현의 손에서는 아직도 초콜렛이 쥐어져 있다.

 "저 잘했죠?"

 수현은 늘 그녀의 자신감이 궁금하다.

 "아니."

 "에이~"

 도데체 그녀는 실망한다는 것, 좌절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그렇게 민영과의 첫 피아노 레슨이 끝났다.

"수고 많으셨어요. "

그녀는 손을 씻고 또 핸드크림을 꺼내 바른다.

"내일도 잘 부탁드려요...선생님."

수현의 호칭은 이제 아저씨에서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뭐라 이야기 할 수 없다. 민영은 밝은 얼굴로 갔고, 수현은 그녀가 가버린 문만 또 한 참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에 그녀가 준비해놓고 가는 밥상 때와는 다른, 무언가 풍성하고 배부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그에게 주는 또다른 감정, 그건 오랜 만에 느껴보는 '뿌듯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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