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옷 3벌, 겉옷, 속옷, 세면도구, 손가방(여권&비행기표 및 귀중품), 책 2권, 수첩, 모자, 수건과 손수건... 그 여자는 자기의 다이어리에 빼곡히 적는다. 이렇게 적어놓지 않으면 무엇을 빼고 넣어야하는지 몰라서 허둥대기 마련이다. 그 여자는 챙겨가야 할 품목들을 써놓고 여러번 읽고 생각하고 또 읽고 생각한다. 순간 떠오른 그녀의 첫 여행지 필리핀...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평생 책읽고 여행하며 살리라 했던 그녀도 막상 떠나려니 낯선 곳이라 불안해했던 것을 기억해낸다.    

   " 아니, 얘. 너는 무슨 4박 5일 다녀올 짐이 한 달 살 짐같니?"   

등산용 베낭에 이것 저것 잔뜩 챙겨넣고도 보조 가방에 잡다한 것들을 쑤셔 넣는 그 여자를 보고 어머니는 혀를 내둘렀었다. 

 "무슨 일이 어떻게 터질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이것 저것 가져가보는 거야."  

 고등학교 3년 내내 파트 타임으로 햄버거가게에서 일하며 벌은 돈으로 대학 등록금 대신 여행을 선택한 딸의 처사를 어찌 해야 할지 몰라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었다. 그런데 막상 여행 짐까지 손수 싸는 딸이 감격스러워 어머니 가슴도 벅차고 있었다.

"원래 여행이라는 게 짐은 간소하게 싸고 필요한 건 거기 가서 충당하는 거야" 

 옆에서 지켜보던 오빠도 한 마디 한다.  

"돈이 그다지 많질 않아서 그렇게는 못하구... 괜찮아. 없어서 불편한 거 보다는 낫지." 

그 여자는 그렇게 첫 여행을 다녀왔고 간소하게 짐을 싸가야 한다는 오빠 말을 실감하고 돌아왔었다. 들고 갔던 짐들을 다 간수하기에는 걸어야 할 길도 일정도 만만치 않았기에 그곳에서 만나 인사를 나눴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물건들을 조금씩 다 주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그 때일을 떠올리고 혼자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사장님이었다. "나오셨어요?" 그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좋아? 여행 가는 게?" 사장님의 말에 그 여자는 말없이 웃었다. "자, 받어." 사장님이 그런 그 여자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그 여자는 받을 생각도 않고 물어본다. "잘 다녀오라고 주는 서비스." 그 여자는 다시 웃는다."안 주셔도 돼요. 요번 월급 보니까 조금 올려주셨던데..." 사장님은 받으라는 듯 그 여자의 손에 쥐어준다."이건 월급 하고 별개니까 받아둬. 여행 잘 다녀오고 아프지 말고 갔다 딴데로 가지 말고 여기 다시 돌아오라고 뇌물 쓰는 거니까." 그 여자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감사합니다."  자신의 빈 자리를 잠시나마 채울 알바생을 어렵게 구했다는 사장님의 사정을 알고 있기에, 말보다 더 깊이 울리는 감사의 말이었다.  

 "짜이, 짜이~!"  이어폰을 꽂고 있던 그 남자의 귀에도 울리는 소리였다. 잠에서 깬 그 남자는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같은 칸의 한 가족이  짜이 팔라(인도의 차 상인)에게서 차를 사 마시고 있었다. 라자스탄을 떠나 기차를 달린지 3시간, 이제 조금 더 가면 중간 목적지인 델리에 도착할 것이다. 그 남자는 자신의 모든 짐을 꾸리고 천정 칸에서 내려왔다. 가족 중 아버지인 듯한 사람이 그 남자에게 차를 권했다. 그런 그에게 미안했지만 사양했다. 기차내의 음식을 잘못 먹으면 큰 탈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였다. 사서 들고 왔던 물을 마시자, 그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남자는 피부가 하얀 편은 아니었다. 더구나 군을 제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행길에 나섰으니 그 때 그을은 피부가 예전만큼도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보다는 확연한 피부색에 아이들은 이 동양인 사내가 그저 신기했을 것이다. 그 남자는 그들의 눈총에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씩 웃어버렸다. 그러자 아이들은 소리를 내고 웃었다. 일순간 긴장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강한 남부 인디언 억양의 영어였다. 그 남자는 처음에는 듣지 못하고 재차 물어야 자기에게 무엇을 물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 남자가 자기 이름을 말하고 아이들의 이름을 물었다. 라제쉬, 수자타, 데보라주... 인도식 이름은 듣든지 부르든지 그들의 독특한 커리향이 난다고 생각했다. "몇 살이에요?" 아이가 순진하게 묻자 "23살"이라고 말한다. 물론 한국 나이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아이의 아버지가 놀란 눈치다. 그 남자는 이번에는 세번째 의례적인 질문이 날아올 것이라는 걸 안다. "결혼 하셨어요?" 그 말에 그남자는 또 씩 웃어버린다. "아니" "왜요?"  아이는 순진하게 물어본다. "글쎄.... " "좋아하는 사람이 없나요?" 아이가 또 묻자 이번에도 그 남자는 씩 웃어버린다. "응....아직... 찾고 있어..." 그 말에 아이는 또 물어본다."찾았나요?" 아이가 너무 물어대자 아이의 아버지가 그들의 언어로 뭐라고 나무란다. 그 남자는 아이가 자신 때문에 곤란하지 말았으면 한다. "괜찮아요..." 그 남자는 아이를 보고 진심을 다해서 말한다. "아직 찾지 못했어. 그래서 타지마할에 가서 소원을 빌어볼 셈이야.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아이와 가족들은 그 남자에게 꼭 그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덕담을 한다. 그 남자의 가슴 한켠이 따뜻해 오고, 그 남자는 일순 행복해진다.  반대편 좌석에서 열어놓은 창문으로 커리 냄새 듬뿍 베인 바람이 불어왔다. 정거장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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