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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사랑 1
천주교서울대교구 엮음 / 가톨릭출판사 / 2008년 10월
평점 :
김수환 추기경님께
2009년 2월 16일, 추기경님께서 선종하셨을 때 제 나이는 서른한 살이였습니다.
동년배 친구들처럼 삶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이나 비전도 없고, 타인의 작은 지적에도 일희일비 흔들리며 비틀대던 서른한 살. 세상과 인간의 본질을 알지 못해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던 서른 한 살, 신앙에 대한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성당에 다니며 나름 가톨릭 신자로서 소양을 쌓으며 세례를 받긴 했지만, 가톨릭 신앙에서 강조하는 인내와 절제, 청빈이란 덕목은 당시 스무 살을 갓 넘었던 제겐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누가봐도 세상 물정 어둡고 타인의 감언이설에 쉽게 넘어갔던 철부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자상하고 능력 있는 아버지의 그늘 아래 안주하며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온 제게 '가난'이란 단어는 전혀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에게 안타까움을 느껴본 적은 있었지만 그들을 위해 뭔가 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죠. 어딜 가나 환대 받고 관심받는 게 당연했던 시절, 그때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영적으로 기아 상태에 가까운 존재라는걸. 순간의 허전함을 견디지 못해 결이 맞지도 않는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의 선 넘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늘 휘둘리고 상처를 받았으며 고가의 사치품들을 구입하고 쌓아두며 스스로 행복하다 자부했지만 정작 누군가의 위로와 온기가 필요한 순간 앞에서 저는 철저히 혼자였습니다. 내면의 공허와 결핍을 필사적으로 메꾸려는 시도는 항상 저의 바람과 어긋난 결과를 가져왔으며 급기야 소통의 부재와 단절로 이어졌습니다. 마흔 중반에 이른 지금, 그때 저를 돌아보면 참으로 어렸다는 생각부터 듭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믿고 그들에게 끊임없이 내면의 결핍을 투사하며 사랑을 갈구했던 시절, 애정결핍의 전형과도 같았던 저를 안쓰럽게 여겨준 사람은 부모님뿐이었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철없고 어리석은 딸을 걱정하셨던 아버지, 아버지께 저는 아픈 손가락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지만 내면의 결락은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고 나름 순수하게 베풀었던 친절과 배려를 악용하는 경우를 접하면서 점점 인간에 대한 믿음을 지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이 방황하며 인간 본질에 대한 회의만 키워가던 제 참담한 심정을 추기경님은 헤아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가톨릭 교회 고위 성직자였던 추기경님은 결코 당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변방에 머물러 소외받고 배척당했던 작은 이들 곁에 머물러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던 추기경님. 생전 막역한 친분을 쌓으셨던 故 정일우 신부님은 상계동 철거민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몇 시간이나 머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던 추기경님을 애틋한 눈빛으로 회상하기도 하셨습니다.
그저 말없이 곁을 내어주며 그들의 서러운 속내에 귀를 기울이고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것. 낡고 허름한 판자촌에서 세상에 대한 분노와 울분을 힘겹게 삭히며 살아가던 그들에게 아낌없는 사랑과 온기를 베풀어주셨던 추기경님.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국민들의 인권을 유린했던 유신 시대, 추기경님은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여 독재 정권과 마주하셨고, 죄없이 희생당한 무고한 목숨들에 대한 연민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문득 성모님의 노래 '마니피캇' 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인류의 구세주를 잉태하고도 어떤 특권도 누리지 않으신 채 묵묵히 하느님 뜻에 맞갖은 겸손과 사랑을 실천하셨던 성모님.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겐 한없이 인자하셨지만, 약자를 기만하고 탄압하는 기득권자들의 위선엔 단호하게 맞서셨던 추기경님의 인품은 아마 성모님을 닮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에 대한 회한과 자책으로 마음이 괴롭고, 인간 본질에 대한 회의감을 견디지 못해 삶이 괴로울 땐 추기경님의 인자한 미소를 떠올립니다.
소중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가장 슬픈 일은 다시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라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가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왈칵 밀려올 때, 그 말이 얼마나 처연하게 가슴에 와닿던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군요. 추기경님이 돌아가셨을 때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셨던 아버지. 두분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순 없지만 하느님 곁에서 평온한 안식을 누리고 계실 두분을 떠올리면 입가엔 자연스레 웃음이 지어집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제 어깨를 다독이시는 추기경님의 다정한 손길이 느껴집니다.
이제까지 저지른 죄악과 허물들로 마음이 무거워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던 제 귓전에 추기경님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갑니다.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해... 하느님 앞에서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어.'
영원한 자의 빛, 영원에 대한 신앙. 추기경님의 말씀 항상 기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하늘에서 다시 뵐 날을 기다리며 막달레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