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그마 - 장애의 세계와 사회적응
어빙 고프만 지음, 윤선길 외 옮김 / 한신대학교출판부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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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대개 눈에 보이는 장애만을 장애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편견에 불과할 뿐, 우리 모두 나름대로의 말 못할 비밀을 안고 살아간다. 그 모든 것이 각자에게 하나의 낙인이 되어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 장애를 갖고 산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사회나 사람들을 범주화하는 방법이 있으며 각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일반 속성 또는 기질들을 확립해 놓는다. (-) 낯선 사람이 우리 앞에 나타날 때 우리는 첫 모습을 보고 그가 속한 범주와 속상, 즉 그의 “사회적 정체성(social identity)”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예측에 의존하고, 나아가 이를 (-) 기대로 전환시키며 심지어는 이를 정당한 요구라고 생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요구가 이행될 것인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의문이 들 때까지 사람들은 (-) 그런 요구가 제기되었다는 사실 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런 의문이 드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어떤 유형의 인물임에 틀림없을 것으로 계속 가정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속에 품었던 요구는 “실제로” 제기된 요구(-)라고 보아야 한다. (-)

 

  어떤 개인은 우리의 현실적 요구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런 결핍으로 인한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 자신은 완전한 정상적 인간이며 오히려 일반인들을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 사람은 낙인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영향을 받거나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

  (-) 낙인자는 정체성에 대하여 대체로 우리와 동일한 신념을 공유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그는 내면적으로 자신을 “정상적 인간”이라고 의식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사람(-)들이 진정 자신을 “수용”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을 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대부분 그의 생각이 꽤 정확하다. (-)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의 결점으로 보는 것에 상당히 민감하게 신경 쓰도록 훈련되며, 이로 인해 잠시나마 그가 꼭 갖추어야 할 것을 결핍하였다는 사실에 동의하고야 만다. 무엇보다도 이때 가장 먼저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데, 자신이 더럽혀진 속성을 소유하였거나, 어떤 속성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인식으로 인해 수치심이 발생하는 것이다.

  정상인과 함께 함으로써 자아요구(self-demands)와 자아(self)의 괴리가 강화되지만, 자기 혼자 거울을 대하고 있을 때도 자기 혐오(self-hate)와 자기비하(self-derogation)가 역시 나타날 수 있다.

 

  마침내 나는 회복되고……다시 걷는 법을 배웠다. 어느 날 난 확대경을 들고 내 자신을 보기 위해 긴 거울 앞에 섰다. 나 혼자서. 다른 누구에게도……내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내가 느끼는 심정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순간 조용했다. 나는 소리 지르지 않았다. 비참한 내 자신을 보면서도 분노로 절규하지 않았다. 그냥 멍했다. 거울 속에 있는 저 사람은 나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서는 아직도 나를 건강하고, 평범하고, 운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데……아니야, 거울 속의 저 사람은 내가 아니야. 그러나 다시 얼굴을 돌려 거울을 들여다보니 거울 안에는 내 두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치욕감에 충혈 된 내 눈이……내 자신 스스로 서글퍼하거나 한 마디 말도 하지 못 한 이 일을 누구에겐가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제 알게 된 혼란과 공포는 그때 그 자리에서, 혼자만 알게, 내 가슴속 깊은 곳에 아주 오래 오래 가두어 두었다.

 

  (-) 거울을 들여다보고 나는 공포에 떨었다. 내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서있던 그 자리에는, 모든 게 가능한양 항상 낭만적 우쭐함을 안고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받고 살던 운 좋은 사람이 아니라 한 낯선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약하고, 비참하고, 섬뜩한 몰골과, 내가 응시할 때 수치로 괴로워하고 얼굴이 붉어지는 이방인이었다. 그 모습은 (-) 평생 벗지 못 할 분장이었다. 거기에 그 모습이 있었다.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었다.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마치 머리를 한대씩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

 

 

  열등의식이란 극단의 불안을 상시 의식에서 떨쳐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불안으로 고통스러워하며, 질투가 불안보다 실제로 더 나쁜 것인지는 모르지만 질투로 외로워한다. 자신의 어떤 모습으로 인해 남들이 존경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 불안해 한다. 그리고 그런 불안감은 (-) 치유할 수 없다고 알고 있는 것에 기인하고 있다. (-)

 

 

  그리고 나는 정상인들을 대하면서 항상 이러한 점을 느낀다. 그 사람들이 내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할 때조차, 정말 언제나, 내심으로는 나를 범죄인 정도로밖에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현재의 내 자신을 어떻게 바꾸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걸 알면서도, 나는 한편으로 여전히 이 사실, 즉 그 사람들은 나를 다른 존재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게 그들의 유일한 접근방식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가 모든 낯선 아이들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며 그 애들도 (-) 내가 무서워한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고, 그리하여 심지어 가장 유순하고 상냥한 아이들마저 내가 위축되거나 공포에 질리면 자동적으로 나를 조롱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청각장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과 니치(Nitchie) 학교에서 지낸 것이 얼마나 편했었는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지금은 청각보조기를 자연스레 여기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누가 보건 개의치 않고 내 송신기의 음량을 조절할 수 있다면 (-) 잠시나마 목 뒤의 코드 줄이 보이지 않나 걱정하지 않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에겐가. "어이, 내 건전지가 다됐어!"라고 소리칠 수 있는 것을 바라는 것은 너무나 사치스러운 일인가.

 

 

  항문절개수술을 받기 전에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냄새가 날 때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냄새나는 사람을 굉장히 기분 나쁘게 여겼는데, 사람들이 목욕을 하지 않아서 냄새가 나는 것이고 어딜 가기 전에 목욕부터 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람들이 먹은 음식 때문에 그런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걸 너무나 싫어했다. 내게는 그들이 구질구질하고 더러워보였다. (-) 마찬가지로 내가 냄새를 풍기면 젊은 사람들도 당연히 그렇게 느낄 것이라고 믿는다.

 

 

  안내견에 대한 질문에는 공손하게 비켜갔다. 다른 정상인 근무자가 나를 이끌고 시설을 둘러보게 했다. 우리는 브레일리 도서관, 교실, 맹인들이 음악이나 연극 연습을 하는 동아리 공간, 축제 때 맹인끼리 춤을 추는 레크리에이션 홀, 맹인끼리 볼링을 치는 볼링장, 모든 시각장애인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식당, 시각장애인이 대걸레와 빗자루를 만들거나 카펫을 짜고 등나무 의자를 만들어 실질적인 생계비를 버는 대형 작업장 등을 다녀보았다. 각 방을 옮겨 다니면서 나는 발자국 소리,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 지팡이로 똑똑 더듬는 소리 등을 들을 수 있었다. 그곳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전하고 격리된 세계였다. 사회복지사가 확신을 주는 것처럼, 내가 방금 떠나온 곳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여기가 바로 내가 살아야 할 세상이란다. 내 직업을 포기하고 자루걸레나 만들면서 살아야 한다. '등대' 단체는 기쁜 마음으로 내게 걸레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줄 것이다. 나는 이제 남은 생을 눈먼 사람들과 자루걸레를 만들고, 눈먼 사람들과 밥을 먹고, 눈먼 사람들과 춤을 추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마음속에 그런 그림이 그려지면서 나는 두려움에 진저리쳤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그렇게 파멸적인 고립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


  (-) 맹인에 가깝게 실명한 사람이 볼 수 있는 척하다 걸상에 걸려 넘어지거나 음료수를 셔츠에 엎지를 때와 같은 꾀죄죄함, 청각장애자가 그의 결함을 모르는 사람이 건넨 말에 대답을 못했을 때와 같은 부주의함, (-) 

 

 

  (-) 낙인을 은폐하기 위해 사용하는 바로 그 테크닉이 이런 수법에 친숙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비밀을 폭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왜 지압요법을 해 보지 않으세요?"[단순히 안면만 있는]그녀는 콘비프를 씹으며 내게 물었다. 그 질문에는 나의 내면세계를 밑바닥부터 뒤집어 놓겠다는 어떠한 암시도 보이지 않았다. "플래처 박사님 말씀이 요즘 귀머거리 환자 한 사람을 치료하고 있다던대요."

  나는 깜짝 놀라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우리 아버지도 귀를 먹었어요." 그녀가 자기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나는 어디서든 귀먹은 사람은 귀신처럼 알아내요. 당신의 그 부드러운 음성. 그리고 말을 맺지 않고 질질 끄는 요령. 우리 아버지도 언제나 그렇게 하셨거든요."

 

 

  ……자신의 장애를 감추기 원하는 사람은 장애를 나타내는 다른 사람의 버릇을 금방 눈치 챈다. (-)

 

 

  (-) 은밀한 결함을 보유한 사람은 여러 가능성을 정밀 검색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어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냥 별일 없이 지내는 그 단순한 세계와 소원해지기 쉽다. 그들에게는 땅일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숫자가 되기 때문이다(역자 주: 일반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딛고 다니는 땅일지라도 시각장애자들은 언제나 걸음 수로 세고 다니기 때문이다). 거의 실명한 상태의 청년에게서 한 가지 예를 볼 수 있다.

 

  나는 메리와 청량음료를 24캔이나 같이 마시고 영화를 세 편이나 함께 보면서도 그녀가 내 눈이 나쁘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내가 그동안 배운 요령을 모두 활용했던 것이다. 매일 아침 그녀의 옷 색깔이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고, 메리라고 생각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나의 온 눈과 귀 그리고 육감까지도 곤두세워 주시했다. 나는 요행을 바라지 않았다. 확신이 서지 않을 경우엔 그게 누구이건 친밀하게 인사했다. 그들은 아마 나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난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밤에 극장에 가거나 올 때면 항상 그녀와 손을 잡고 다녀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게 길을 인도한 셈이다. 그래서 나는 도로 옆의 인도 경계석이나 계단을 더듬지 않아도 되었다.

 

 

  외관상으로만 정상 청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여자의 남편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 사람 자체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 그는 (-) 내 실수를 만회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 나는 항상 그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적어도 그는 내가 들었다고 생각하게 했다. (-)

 

 

  출산과정에서 뇌의 통제부분에 손상을 입어 무정위운동(athetosis) 유형의 뇌성마비를 갖고 태어났지만, 그 용어가 널리 알려지고 사회가 내게 명칭이 붙은 일탈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압박할 때까지 나는 (-) 깨닫지 못했다. 당신은 (-) 아마 사회가 당신이 누구이며 혹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알 때까지는 자신에게 정직할 수 없을 것이다.

 

(-)

 

정상인들은 정말로 해를 입히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만일 그럴 경우에는 그들이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의적으로 행동하도록 그들을 재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경멸, 냉대, 적절치 못한 말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응대해서는 안 된다. 낙인자는 이런 것들에 괘념치 말고 동정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정상인들을 재교육시킬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 그렇게 되면, 그들은 일반인들이 어떻게 느끼기를 원하는지에 대한 모델을 제공해주기를 낙인자에게 요구하게 된다.)

정상인들이 그의 결함을 무시하는 것이 어렵게 보일 때, 낙인자는 그들을 도와 사회적 상황에서의 긴장을 감소시킬 수 있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펼쳐야 한다. (-)


(-)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이야기할 수 있을 때, 개인은 상황을 통제하는 데 있어 그가 주도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에게 과시하는 것이 된다(-)

뇌성마비환자를 이해하는 것은 사회의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사회를 관대히 용인하고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여 사회의 어리석음을 용서하고 즐기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걸 명예라고 해야 할지는 의심스럽지만 한번 도전해 볼만한 즐거움이라는 생각은 든다. (-) 그러나 이를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상처 입은 사람이 하나의 인격체로 이해되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는 감정은 그의 면전에서 겪는 정상인의 곤혹감과 결합하여 긴장되고 불편한 관계를 유발시키는데, 이로 인해 그들은 서로 분리하게 된다. 이런 사회적 긴장을 완화시키고 또 더 폭넓게 수용되기 위하여, 상처 입은 사람은 정상인이 표출한 호기심을 기꺼이 충족시켜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먼저 상처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의 서툰 노력을 요령 있게 받아들이는 일이 비록 낙인자에게는 부담이 될지라도, 그는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 오슬로(Oslo)의 노천식당에서 보았던 한 남자를 기억한다. 그는 심한 불구였는데, 식당 테이블이 있는 테라스로 가기 위해 다소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려고 자기 휠체어에서 내려왔다. 그는 다리를 쓸 수 없었기에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야 했다. 그 남자가 이상한 모양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마자 종업원이 달려왔다. 그를 도와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 식당에서는 그와 같은 손님을 모실 수 없다는 말을 전하려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손님들이 그 식당을 찾는 이유는 식사를 하며 좋은 시간을 가지려는 것이지 불구자의 그런 모습을 보고 우울해지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상대방이 자신을 적절한 수준에서 수용한 것(-) 이러한 수용이 조건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조건은 정상인들 중신의 조건으로서 그들이 쉽게 수용을 베풀 수 있는 한계, 또는 최악의 경우 그들이 거북스러우나마 수용을 베풀 수 있는 그 한계를 넘도록 강요되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다. 낙인자도 적절히 신사다워야 하며 계속 순조로우리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에게 베풀어진 수용의 한계를 시험해서도 안 되고, 그것을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일반적으로 관용은 거래의 일부인 것이다.


(-) 낙인자는 자신의 짐이 무겁다거나 그 짐을 지고 있어서 정상인과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요구받는다. 동시에 그는 자신에 대한 이런 믿음이 고통 없이 확인될 수 있도록 우리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 (-) 이런 상황에서 그는 또 다른 구경거리를 보듯 예의 주시하는 신랄한 관중 앞에서 실수 없이 이러한 자아를 연출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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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회귀의 신화 신화 종교 상징 총서 5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심재중 옮김 / 이학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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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불행”과 “역사”


고통의 “당연성”


(-)

전통적인 문화 속의 인간에게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것은 초인간적인 모델에 따라 사는 것이고, 원형들과 일치되게 사는 것이다. (-)

그러한 실존의 테두리 안에서, “고통”과 “괴로움”이란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마치 혹독한 기후처럼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에 “감내”할 수밖에 없는 무의미한 경험은 결코 아니었다. 고통의 성격이나 그 표면적인 원인이야 어떠하든, 인간의 고통에는 의미가 있었다. 항상 원형과 부합하지는 않더라도, 인간의 고통은 의심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어떤 질서와 부합하는 것이었다. 고대의 지중해적인 모럴과 비교하여 기독교의 가장 큰 장점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부정적인 상태의 고통을 “긍정적”이고 영적인 내용의 경험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고통이 지닌 구원의 능력 때문에 기독교가 고통에 가치를 부여했고 나아가 고통을 추구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주장은 옳다. 그러나 고통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또 영적 향상과 정화의 수단이라는 의미를 고통에 부여하지도 않았지만(드문 예외는 있었다), 기독교 이전의 인류도 고통을 무의미한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사건으로서의 고통, 역사적인 사실로서의 고통이고, 우주적인 재앙(가뭄, 홍수, 폭풍 등)이나 침략(방화, 노예신세, 굴욕), 사회적인 불의 따위로 인해 생겨나는 고통이다.

그런 고통들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고통들이 터무니없거나 공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판이 가뭄으로 황폐해지고, 가축들이 질병으로 죽어가고, 자식이 아프고, 열병에 걸리고, 사냥 운이 없어서 매번 허탕을 치거나 하면, 원시인은 그 모든 일들이 우연이 아니라 어떤 악마적이거나 주술적인 힘 때문에 생겨나며 그 힘에 맞설 수 있는 무기가 사제나 주술사에게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우주적인 재앙이 닥쳤을 경우엔 공동체 전체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그도 주술사를 찾아가 주술의 효력을 없애 달라고 청하거나 사제에게 찾아가 신의 호의를 빌어달라고 청한다. 주술사나 사제가 관여했는데도 아무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당사자들은 그동안 거의 잊고 지내 왔던 지고한 존재를 다시 생각해내고 그에게 희생 제물을 바쳐서 기도한다.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의 셀크만Selkman 유목민들은 “높은 곳에 계신 그대, 내 아이를 빼앗아가지 마소서. 아직 너무 어립니다”라고 빌고, 호텐토트족Hottentots은 “오, 츠니-고암Tsuni-goam이여, 제게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은 당신만이 압니다”라고 탄원한다. 폭풍이 몰아칠 때면 세망Semang 피그미족은 대나무 칼로 장딴지를 긁어 피를 사방에 뿌리며, “타 페든Ta pedn이여, 저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 잘못의 대가를 치르오니, 제발 받아주소서!”라고 소리친다. 『종교사 개론』에서 이미 자세하게 밝힌 바 있지만, 이참에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사실이 있다. 소위 원시민족의 종교 의식에서 천상의 지고한 존재들은 언제나 최후의 수단으로만 간주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원시민족들은 “고통”(가뭄, 폭우, 재난, 질병 등)을 쫓기 위해 우선 신들과 악령들, 주술사들에게 청원해보고, 그 청원들이 실패했을 때에만 지고한 존재를 찾는다. 그 경우에, 세망 피그미족은 자기들이 범했다고 생각되는 과오들을 고백하는데, 과오의 고백은 다른 곳에서도 간혹 발견되는 관행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과오의 고백은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에 항상 따라다닌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종교-주술적인 처치의 모든 계기들은 고통의 의미를 아주 명료하게 보여준다. 즉 고통은 적의 주술적인 영향, 금기 위반, 지나가선 안 될 불길한 장소를 지나가는 것, 신의 분노, 그리고―다른 모든 가정들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에는―지고한 존재의 의지나 분노에서 비롯된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원시인에게―(-)원시인만 그런 것은 아니다―아무 까닭 없는 “고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은 개인적인 과오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종교적인 과오임이 분명한 경우) 이웃의 악의 때문에 생겨날 수도 있지만(주술사에 의해 주술의 영향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경우), 언제나 그 바탕에는 과오가 놓여 있다. 과오가 아니라면 최소한 어떤 원인, 결국에 가서는 인간이 호소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자 잊고 있었던 대상인 <지고신>의 의지 속에서 확인되는 어떤 원인이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고통”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고 그럼으로써 감내할 만한 것이 된다. 원시인은 가능한 모든 종교-주술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그 “고통”과 맞서 싸운다―그러나 고통이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는 그 고통을 견뎌낼 수 있다. “고통”의 가장 결정적인 계기를 이루는 것은 고통의 난데없는 출현이다. 그 원인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때에만 고통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이나 가축들이 죽고, 가뭄이 계속되고, 폭우가 심해지고, 사냥거리가 사라지고 하는 일들의 원인이 주술사나 사제에 의해 일단 밝혀지기만 하면, “고통”은 견딜 만한 것이 된다. 고통에 원인과 의미가 있고, 따라서 고통도 이제 하나의 체계 속에 끌어들여져 설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인도인들은 일찍이 카르마Karma라는 보편적인 인과율의 관념을 생각해냈다. 카르마는 개인이 겪는 현재의 사건들과 고통을 해명해주면서 동시에 윤회의 필연성도 설명해준다. 카르마의 법칙에 비추어볼 때, 고통은 단지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가치마저 획득한다. 현재의 삶에서 겪는 고통은 받아 마땅한 것이지만―사실상 고통은 전생에서 행한 과오와 죄악의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동시에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각 개인을 짓누르면서 장차 그 개인이 겪게 될 삶의 순환을 결정짓는 카르마의 빚을 부분적으로 줄이거나 청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인도인들의 관념에 의하면, 인간은 빚을 지고 태어나지만 또한 새로운 빚을 질 자유도 동시에 지니고 태어난다. 인간의 삶은 차용과 지불의 기나긴 연속이다. 그리고 그 셈이 항상 분명한 건 아니다. 지능이 완전히 결핍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자신에게 가해지는 불의와 타격, 고통과 괴로움 등을 침착하게 견디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고통들 하나하나가 전생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던 카르마의 방정식을 풀고 있기 때문이다. (-) 다른 모든 인도의 해탈 방법들이 그렇듯이, 불교 역시 단 한순간도 고통의 “당연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베단타Vedanta의 관점에서도 고통은 <우주> 전체가 “덧없는” 한에서만 덧없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스러운 경험도 <우주>도 존재론적인 의미의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

(-) 거의 모든 곳에서 발견되는 고대적인 관념에 의하면, (-) 어쨌든 모든 고통은 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수확을 망치는 일, 가뭄, 적에 의한 도시의 약탈, 자유의 상실이나 죽음, 온갖 종류의 재난(전염병, 지진 등) 등등 초월적인 존재나 신의 섭리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설명되지 않거나 정당화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패배한 도시의 신이 승리한 군대의 신보다 덜 강했다든지, 공동체 전체나 한 집안이 어떤 신에게 의례상의 과오를 범했다든지, (-) 아무튼 개인이나 집단의 고통에는 항상 어떤 설명이 주어진다. 결과적으로 고통은 견딜 만하고, 견딜 만해진다. 

나아가 지중해-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사람들은 일찍부터 인간의 고통을 신의 고통과 관련지어 생각하였다. (-) 탐무즈의 고통과 죽음, 부활에 관한 아주 오래된 신화는 고대 동방 세계의 거의 전역에 걸쳐 복제와 모방을 낳았고, 기독교 이후의 그노시스파에까지 그 시나리오의 흔적들을 남겼다. (-) 탐무즈(혹은 어떤 다른 농경-우주신)의 고통과 죽음, 부활을 기리는 민중들의 애도와 환희는 고대 동방인의 의식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이점을 생각해보면 그러한 반향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죽음 다음의 부활에 대한 예감도 예감이었지만, 각각의 개인에게는 탐무즈의 고통이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고통도 탐무즈의 드라마를 떠올리면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신화의 드라마는 고통이 결코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죽음에는 항상 부활이 뒤따른다는 것, 모든 패배는 최후의 승리에 의해 백지화되고 극복된다는 것을 인간에게 상기시켜주었던 것이다. (-) 여기서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탐무즈가(-) “정의로운 자”의 고통을 정당화해준다는 사실, 달리 말하면 고통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이다. 신―무한히 “의롭고” “순수한” 존재인―은 아무 죄 없이 고통을 당했다. 신은 굴욕을 당하고, 피가 나도록 맞고, “우물” 속에, 즉 <지옥>에 갇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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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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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이 대박적인 책이 품절이라니??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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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론 - 인간과 종교, 제사, 축제, 전쟁에 대한 성찰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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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폭력에 호소해서 질서를 회복시킨다. 그러나 내게 신적 내밀성을 열어준 것은 복수가 아니라 죄악이다.`(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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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의 집 사람들 -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는 정신장애인들의 희망공동체
베델의 집 사람들 지음, 송태욱 옮김 / 궁리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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