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불행”과 “역사”
고통의 “당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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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문화 속의 인간에게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것은 초인간적인 모델에 따라 사는 것이고, 원형들과 일치되게 사는 것이다. (-)
그러한 실존의 테두리 안에서, “고통”과 “괴로움”이란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마치 혹독한 기후처럼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에 “감내”할 수밖에 없는 무의미한 경험은 결코 아니었다. 고통의 성격이나 그 표면적인 원인이야 어떠하든, 인간의 고통에는 의미가 있었다. 항상 원형과 부합하지는 않더라도, 인간의 고통은 의심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어떤 질서와 부합하는 것이었다. 고대의 지중해적인 모럴과 비교하여 기독교의 가장 큰 장점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부정적인 상태의 고통을 “긍정적”이고 영적인 내용의 경험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고통이 지닌 구원의 능력 때문에 기독교가 고통에 가치를 부여했고 나아가 고통을 추구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주장은 옳다. 그러나 고통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또 영적 향상과 정화의 수단이라는 의미를 고통에 부여하지도 않았지만(드문 예외는 있었다), 기독교 이전의 인류도 고통을 무의미한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사건으로서의 고통, 역사적인 사실로서의 고통이고, 우주적인 재앙(가뭄, 홍수, 폭풍 등)이나 침략(방화, 노예신세, 굴욕), 사회적인 불의 따위로 인해 생겨나는 고통이다.
그런 고통들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고통들이 터무니없거나 공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판이 가뭄으로 황폐해지고, 가축들이 질병으로 죽어가고, 자식이 아프고, 열병에 걸리고, 사냥 운이 없어서 매번 허탕을 치거나 하면, 원시인은 그 모든 일들이 우연이 아니라 어떤 악마적이거나 주술적인 힘 때문에 생겨나며 그 힘에 맞설 수 있는 무기가 사제나 주술사에게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우주적인 재앙이 닥쳤을 경우엔 공동체 전체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그도 주술사를 찾아가 주술의 효력을 없애 달라고 청하거나 사제에게 찾아가 신의 호의를 빌어달라고 청한다. 주술사나 사제가 관여했는데도 아무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당사자들은 그동안 거의 잊고 지내 왔던 지고한 존재를 다시 생각해내고 그에게 희생 제물을 바쳐서 기도한다.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의 셀크만Selkman 유목민들은 “높은 곳에 계신 그대, 내 아이를 빼앗아가지 마소서. 아직 너무 어립니다”라고 빌고, 호텐토트족Hottentots은 “오, 츠니-고암Tsuni-goam이여, 제게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은 당신만이 압니다”라고 탄원한다. 폭풍이 몰아칠 때면 세망Semang 피그미족은 대나무 칼로 장딴지를 긁어 피를 사방에 뿌리며, “타 페든Ta pedn이여, 저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 잘못의 대가를 치르오니, 제발 받아주소서!”라고 소리친다. 『종교사 개론』에서 이미 자세하게 밝힌 바 있지만, 이참에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사실이 있다. 소위 원시민족의 종교 의식에서 천상의 지고한 존재들은 언제나 최후의 수단으로만 간주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원시민족들은 “고통”(가뭄, 폭우, 재난, 질병 등)을 쫓기 위해 우선 신들과 악령들, 주술사들에게 청원해보고, 그 청원들이 실패했을 때에만 지고한 존재를 찾는다. 그 경우에, 세망 피그미족은 자기들이 범했다고 생각되는 과오들을 고백하는데, 과오의 고백은 다른 곳에서도 간혹 발견되는 관행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과오의 고백은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에 항상 따라다닌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종교-주술적인 처치의 모든 계기들은 고통의 의미를 아주 명료하게 보여준다. 즉 고통은 적의 주술적인 영향, 금기 위반, 지나가선 안 될 불길한 장소를 지나가는 것, 신의 분노, 그리고―다른 모든 가정들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에는―지고한 존재의 의지나 분노에서 비롯된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원시인에게―(-)원시인만 그런 것은 아니다―아무 까닭 없는 “고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은 개인적인 과오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종교적인 과오임이 분명한 경우) 이웃의 악의 때문에 생겨날 수도 있지만(주술사에 의해 주술의 영향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경우), 언제나 그 바탕에는 과오가 놓여 있다. 과오가 아니라면 최소한 어떤 원인, 결국에 가서는 인간이 호소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자 잊고 있었던 대상인 <지고신>의 의지 속에서 확인되는 어떤 원인이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고통”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고 그럼으로써 감내할 만한 것이 된다. 원시인은 가능한 모든 종교-주술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그 “고통”과 맞서 싸운다―그러나 고통이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는 그 고통을 견뎌낼 수 있다. “고통”의 가장 결정적인 계기를 이루는 것은 고통의 난데없는 출현이다. 그 원인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때에만 고통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이나 가축들이 죽고, 가뭄이 계속되고, 폭우가 심해지고, 사냥거리가 사라지고 하는 일들의 원인이 주술사나 사제에 의해 일단 밝혀지기만 하면, “고통”은 견딜 만한 것이 된다. 고통에 원인과 의미가 있고, 따라서 고통도 이제 하나의 체계 속에 끌어들여져 설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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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인도인들은 일찍이 카르마Karma라는 보편적인 인과율의 관념을 생각해냈다. 카르마는 개인이 겪는 현재의 사건들과 고통을 해명해주면서 동시에 윤회의 필연성도 설명해준다. 카르마의 법칙에 비추어볼 때, 고통은 단지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가치마저 획득한다. 현재의 삶에서 겪는 고통은 받아 마땅한 것이지만―사실상 고통은 전생에서 행한 과오와 죄악의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동시에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각 개인을 짓누르면서 장차 그 개인이 겪게 될 삶의 순환을 결정짓는 카르마의 빚을 부분적으로 줄이거나 청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인도인들의 관념에 의하면, 인간은 빚을 지고 태어나지만 또한 새로운 빚을 질 자유도 동시에 지니고 태어난다. 인간의 삶은 차용과 지불의 기나긴 연속이다. 그리고 그 셈이 항상 분명한 건 아니다. 지능이 완전히 결핍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자신에게 가해지는 불의와 타격, 고통과 괴로움 등을 침착하게 견디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고통들 하나하나가 전생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던 카르마의 방정식을 풀고 있기 때문이다. (-) 다른 모든 인도의 해탈 방법들이 그렇듯이, 불교 역시 단 한순간도 고통의 “당연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베단타Vedanta의 관점에서도 고통은 <우주> 전체가 “덧없는” 한에서만 덧없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스러운 경험도 <우주>도 존재론적인 의미의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
(-) 거의 모든 곳에서 발견되는 고대적인 관념에 의하면, (-) 어쨌든 모든 고통은 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수확을 망치는 일, 가뭄, 적에 의한 도시의 약탈, 자유의 상실이나 죽음, 온갖 종류의 재난(전염병, 지진 등) 등등 초월적인 존재나 신의 섭리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설명되지 않거나 정당화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패배한 도시의 신이 승리한 군대의 신보다 덜 강했다든지, 공동체 전체나 한 집안이 어떤 신에게 의례상의 과오를 범했다든지, (-) 아무튼 개인이나 집단의 고통에는 항상 어떤 설명이 주어진다. 결과적으로 고통은 견딜 만하고, 견딜 만해진다.
나아가 지중해-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사람들은 일찍부터 인간의 고통을 신의 고통과 관련지어 생각하였다. (-) 탐무즈의 고통과 죽음, 부활에 관한 아주 오래된 신화는 고대 동방 세계의 거의 전역에 걸쳐 복제와 모방을 낳았고, 기독교 이후의 그노시스파에까지 그 시나리오의 흔적들을 남겼다. (-) 탐무즈(혹은 어떤 다른 농경-우주신)의 고통과 죽음, 부활을 기리는 민중들의 애도와 환희는 고대 동방인의 의식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이점을 생각해보면 그러한 반향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죽음 다음의 부활에 대한 예감도 예감이었지만, 각각의 개인에게는 탐무즈의 고통이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고통도 탐무즈의 드라마를 떠올리면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신화의 드라마는 고통이 결코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죽음에는 항상 부활이 뒤따른다는 것, 모든 패배는 최후의 승리에 의해 백지화되고 극복된다는 것을 인간에게 상기시켜주었던 것이다. (-) 여기서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탐무즈가(-) “정의로운 자”의 고통을 정당화해준다는 사실, 달리 말하면 고통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이다. 신―무한히 “의롭고” “순수한” 존재인―은 아무 죄 없이 고통을 당했다. 신은 굴욕을 당하고, 피가 나도록 맞고, “우물” 속에, 즉 <지옥>에 갇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