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꿈만 꾸자 문학동네 시인선 231
조온윤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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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교사



아이들에게

문을 뒤집으면 곰이 나타난다는

실없는 농담을 하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집을 뒤집으면요? 사람을 뒤집으면요?

울음을 거꾸로 하면 몽롱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럼 몽롱은 기쁜 거예요?


아이들의 존재는 왜 이다지도

물구나무 같을까?

질문을 뒤집어주면 대답이 될까

반문이 될까?


아이를 어른스럽게 대하지 못하는

아이 같은 어른이 되어버렸지

너희를 돌볼 때면

뒤집힌 교실에 홀로 남아

오래전에 잊어버린 공식을 풀어내야 하는 것 같아


아무리 깨쳐도 졸업이 없는 삶의 교정에서

내가 무얼 알려줄 수 있을까?

또렷한 목적 없이 갈지자로 살아감을 뜻하는 몽롱이란 기분을?

어른의 문을 열고 뒤집어 흔든다 해도

아무것도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심심한 진실을?


벽은 뒤집어도 벽, 컵은 뒤집으면 반드시

빈 컵이 될 테지만


철봉 아래에서 친구를 괴롭히는

장난꾸러기 아이를 붙들고 말해줄 수 있겠지

얘야, 우는 사람을 거꾸로 뒤집어도

웃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두루미



이 좁은 유리병에

어떻게 사랑이 가득 담길 수 있을까?


형태가 가지각색인 식기를 식탁 위에 깔아두고서

길쭉한 목을 가진 이웃에게 초대받은 여우처럼


이건 언 손에 입김 부는 입 모양을 본뜬 술병

이건 깨어질 듯 위태로운 불안을

연인에게 기울이는 각도로 만든 주전자


처음 보는 유리의 형태에

어떻게 사랑이 흘러넘칠 수 있나요?

병속에 어리둥절 끼여버린 여우처럼 묻는다면


좁은 문틈으로 환한 말소리가 새어 나올 수 있는 건

얼어 있던 공기가 모두 녹아내렸기 때문이라고


투명한 식기의 주인은 말하겠지

의심이 많아 바깥에 갇힌 여우야

이제 너의 마음이 녹아

액체와 같이 흐른다면


이리 들어와 이걸 마셔봐

우리의 시간이 아주 달단다





사인용 식탁



어느 날 침묵을 두르고 

밥을 먹으며 생각했다


외로움은 일인분의 식사가 아니다

사인용 식탁의 빈자리들이다


그리움은 인간을 본뜬 석고를

보며 그린 소묘를

또다시 베끼는 일이다


그걸 베끼고 또 베끼다보면

언젠가는

추상적인 동그라미 몇 개만 남게 될 것이다


식기를 치우면

책상이 되기도 하는

식탁 앞에 앉아

닫힌 창문을 보며 창밖을 그렸다


그릇을 씻고 덜 마른 손에

동그라미가 번져서

무언지 알아볼 수 없었다




림보



뚱뚱한 천사는 게으를 거라고 생각하니?

온 힘을 다해 사랑하지 않을 것 같니?


우리는 그 품에서 아늑해진다

이불 속에 파묻혀 보내는 일요일의 무사안일처럼

사랑의 중량은 커질수록 힘껏 안기기에도

힘없이 쓰러지며 안기기에도 좋으니


(-)


키 작은 천사는 하늘에 닿지 못할 것 같니?

천사라는 말의 높이가 온 힘을 다해 제자리 뛰기를 해봐도

닿을 수 없는 림처럼 느껴지니?


(-)


우리의 시선이 수심이라면, 눈금이 낮아질수록

거기서 온 힘으로 헤엄하는 지느러미를 볼 수 있다

발을 헛디디고 빠지게 되는 깊은 마음으로


그리하여 깊은 밤

홀로 농구공을 튕기던 소년이 림을 향해

닿고 싶은 마음으로 뛰어오르는 걸 본다면


아주 잠깐 그 모습이

천사의 머리 위에 달린 

둥근 링처럼 보인다면




조온윤 시집, 『자꾸만 꿈을 꾸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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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도 배웅도 없이 창비시선 516
박준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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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 아버지는 자신의 장례에 절대 부르지 말아야 할 지인의 목록을 미리 적어 나에게 건넨 일이 있었다 금기형, 박상대, 박상미, 신천식, 샘말 아저씨, 이상봉, 이희창, 양상근, 전경선, 제니네 엄마, 제니네 아빠, 채정근. 몇은 일가였고 다른 몇은 내가 얼굴만 알거나 성함만 들어본 분이었다 "네가 언제 아버지 뜻을 다 따르고 살았니?"라는 상미 고모 말에 용기를 얻어 지난봄 있었던 아버지 장례 때 나는 모두에게 부고를 알렸다 빈소 입구에서부터 울음을 터뜨리며 방명록을 쓰던 이들의 이름이 대부분 그 목록에 적혀 있었다


─박준, 「블랙리스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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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소설 위픽
이연숙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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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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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그런 검은 봉다리를 뒤집어쓰고 나니 생각보다 편안했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게다가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지…….



푸고와 헤어지기만 하면 얼른 검은 봉다리를 벗어 던지고 떳떳한 레즈비언으로 다시 돌아가야지. 돌아가면 복수한다, 이 인정머리 없는 새끼들아! 하지만 그러기엔 엘릭은 푸고를 너무 사랑했다.



'왜'에 집착하면서 엘릭은 우습게도 아빠가 어린 시절 내킬 때 해주던 '동기부여' 레퍼토리 중 하나를 떠올렸다. "뭐든지 궁금한 게 있으면 스스로 책에서 답을 찾아야 돼."



하지만 그냥 받아들이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



대체 누가 남의 아빠 같은 걸 궁금해하겠어? 그 아빠가 알고 보니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였다거나, 아니면 청부 살인업자나 아동성애자였던 게 아니라면 말이야.



엘릭은 계획대로 무방비 상태의 가짜 아빠를 공격한다. 엘릭의 공격에 가짜 아빠는 '으악' 하는 소리를 내고 픽 쓰러져 죽는다. 가짜 아빠는 옥상 바닥에 잠시 죽어 있다가 금세 옷을 털고 일어난다. 엘릭은 일어난 가짜 아빠를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공격한다. 가짜 아빠는 피할 새도 없이 그 자리에서 죽는다. 그러고 곧 대화부터 하자는 듯한 머쓱한 미소와 함께 일어난다.



남자는 거세를 통해, 동성애를 통해, 봉사(?)를 통해 구제받을 수 있는 반면 대디 걸에게는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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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소설 위픽
이연숙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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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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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취소
호영 지음 / 읻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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