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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묘지 ㅣ 민음사 세계시인선 4
발레리 지음, 김현 옮김 / 민음사 / 197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시는 언어이며 산문은 행위이다. 적어도 나에게만은 시와 산문의 구별점은 바로 여기 외에는 찾을 수 없을 듯하다. 확실히 시는 언어이다. (-)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되묻고 되묻는다. 시에 있어서 언어의 문은 영원히 닫혀져 있는 것일까? 시에 있어서는 언어와 언어의 틈 사이로 행위가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일까. 그러나 사실에 있어 행위는 항상 언어라는 두꺼운 벽을 벗어나려 하고 있다. 행위는 언어의 둔탁하고도 날카로운 벽을 넘어오려 한다. 왜 행위가 시에서 자꾸 언어의 밖으로 뛰쳐나오려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발레리도 말하고 있듯이 시가 ‘끝나achevé’는 적은 결코 없고 다만 ‘내던져지기abandonné’ 때문일 것이다.
“불안해하면서 완성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눈에는 작품이란 결코 끝나는 법이 없고(끝난다는 이 말은 그들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을 터이다) 다만 내던져질 뿐이다. 그리고 불꽃 속에 던져지든, 공중(公衆)에게 던져지든, 이 내던짐l'abandon은 그들에게는 사고의 단절에 비유할 만한 한 일대 사건인 셈이다(『전집』 1, 1497).”
확실히 작품이 완전하게 끝나버린다는 법은 없다. 그것이 언어라는 습관적인 기호,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위에 가냘프고 연약한 자취만을 남기는 언어라는 기호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작품=시란 완성될 수가 없다. 가령 브레몽사가 말하듯이 시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언어는 멜로디가 아니다. 아무리 수려하고 아름다운 12음절시라 하더라도 그것은 음악은 아니다. 다만 언어일 뿐이다. 그리고 언어로서는 도저히 ‘사물’ 자체에 접근할 수가 없다. 접근이라기보다는 사물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가령 우리가 성냥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에 우리는 그 언어보다도 먼저 도달한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우리가 보지 않고 우리와의 사이에 아무런 묵계가 없는 사람에게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려고 할 때, 아마도 우리는 당황하리라. 우리가 사물 그 자체에 도달하려고 하면 할수록 관습적인 언어로서, 그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버릇이 된 사람은 당황하게 되리라. 이러한 말을 다시 바꾸면 시는 언어이지만 완전히 언어일 수는 없다는 것이 될 것이다. 아마도 완전한 언어인 시는 말라르메가 생각한 대로 백지일 것이다. 침묵은 가장 많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없는 시의 언저리에서 우리는 그 시의 행위를 줍는다. 완전히 행위일 수 없는 산문의 언저리에서 우리가 언어를 줍듯이, 우리는 시의 언저리에 언어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우리를 부르는 행위를 엿본다. (-)「젊은 운명의 여신」은 시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라는 점에서, 「젊은 운명의 여신」은 언어이다. 이 언어를 산문으로 말하려 할 때, 거기서는 반드시 배반이 생겨난다. 그것은 시를 산문으로 말하려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배반이다. 코앙이 소르본느 대학에서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분석했을 때, 발레리가 느낀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코앙 씨가 내 텍스트의 각 연을 읽고 거기에 한정된 의미와 발전되어 나가는 도중에 차지하는 가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서, 나는 아주 난삽하다는 정평이 있는 시의 의도와 표현이 여기서 완전히 이해되고 발표되는 것을 보는 기쁨과 그리고 내가 조금 전에 암시한 이상한, 거의 고통스러운 감정 사이에서 어쩔 줄 몰랐다(『전집』 1, 1499).”
_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