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 성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 여이연문화 6
이소희 외 지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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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각해보면 어떤 업소를 가든 다 밥을 먹였던 것 같습니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먹이고 싶어 했어요. 어떤 실장은 제가 살 빼려고 안 먹는다고 하니까, 얘가 먹겠다고 하는 거 시키자고 거의 20분 가량을 이거면 먹을래 저거면 먹을래 메뉴를 읊기도 했어요. 회식하자고 했는데 안 간다고 하면 삐지고, 함께 밥 먹는 식구, 대안가족을 만들고 싶어 하는 그건 도대체 뭐였을까. 이걸 단순히 돈을 더 벌게 하기 위한 잘해줌, 정서적 착취라고 이름 붙이기엔 너무 평면적으로 접근하는 거란 생각을 합니다.

폐허 위에서 가능한 자발적 연대와 우정. 피해와 착취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관계들이요. 창녀라고 비난하고 탄압하는 사회에서 사실상 아가씨를 보호해주는 건 실장이잖아요. 돈을 더 벌어오라고 진상인 거 뻔히 알아도 방 한 번만 더 보라고 강요하고, 힘들다는데도 너는 걸을 필요 없다고 내가 업어서 옮겨주겠다고 손님만 보라고 퇴근 안 시켜주고 성적인 요구도 하는 착취 가해자이지만 내가 성판매를 한다는 걸 알고도 같이 밥을 먹는 친구, 가족이기도 하고요. 가해/피해 이분법으로는 설명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단 생각이 듭니다. 다른 설명이 필요해요.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건 가장 무능해지는 접근이란 생각이 듭니다.

무엇이 정말 여성들의 임파워링에 도움이 될까. 자신의 경험을 한정된 언어로 힘들고 폭력적이었던 순간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정말 도움 될까.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사람들이 만나서 우정을 쌓고 즐거웠던 순간도 있을 텐데. 그런 경험들은 의미 없는 경험으로 삭제되거나 심신미약 상태에서 가스라이팅 당해 느낀 것일 뿐이라고 도려내면, 그러면 그걸로 충분한 건가. 끊임없이 자신의 어떤 순간들을 부정, 외면해야만 한 인간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정말 그 사람의 임파워링에 도움이 될까.

더 많은 경험들을 담아낼 수 있을 새로운 틀, 접근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힘들고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고통만이 있지는 않았는 걸. 나의 강함, 나의 노력, 이곳에서 느꼈던 애정, 우정들을 그저 착취로 피해로 한정된 언어로만 설명하고 싶지 않아요.

이 글을 쓰는 건 살만하다, 성산업 문제없다고 말하고 싶어서 쓰는 게 아닙니다. 매번 이렇게 밝히는 거 너무 사상검열 같지만, 저는 얼마가 걸리든 탈성매매 하고 싶고 반성매매 현장 활동가들과 온도차는 있을 수 있겠지만 성매매가 근절된 사회를 꿈꿔요. 그냥 지금 가진 언어로는 이 현장의 복잡함을 담아낼 언어가 너무나 부족하다고 느끼는데 도대체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이 폐허 위에서 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단순히 폐허를 벗어나면 되는 걸까. 저는 요새 이런 나도 나고, 저런 나도 나라고, 공간에 따라 조각조각난 제 삶을 이어붙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분절된 나가 아니라 통합된 나.

나의 맥락을 정리하고 싶어서 계속 기억을 더듬고 제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더 많은 언어들을 찾아 헤매고 쓰고 그러고 있습니다. 거의 공해 수준으로. 문장의 끝도 제대로 맺지 않고 그때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와 느낀 감정들을 페이스북 계정에 올리고 있어요. (-) 무슨 의미가 있는진 잘 모르겠지만.(내가 재밌으니까 됐다.)


_이소희_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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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정의 -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마사 누스바움 지음, 박용준 옮김 / 궁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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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 대부분은 그 장소들에 대해 "나의 집에서 10구역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지 전혀 아는 바가 없어요"라고 주인공 비거 토마스에게 말하는 극 중 인물 메리 돌턴과 같은 입장이었다. 라이트는 소설 속에서 비거 토마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서서 그는 자신이 살인을 한 이유에 대해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죽였는지 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 이유를 해명하려면 자신의 삶 전부를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


 

기말시험에서 익명의 한 학생(-)은 문학의 역할에 대한 나의 낙관적인 견해를 비판하면서 수업 시간에 읽은 포스터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모리스』와 같은 작품을 읽는 것이 한 개인의 생각, 아마 재판관 한 명의 생각을 바꿀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아마도 그와 같은 많은 작품들이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그 혐오의 이유에 대해 스스로 되묻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편견과 증오의 폭풍에 대항하는 아주 미약한 희망의 보호벽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1180번 학생의 생각은 옳다. 문학적 상상력은 많은 사람들과 집단의 뿌리 깊은 편견에 맞서 싸워야 하고, 그 투쟁에서 언제나 승리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멋진 이야기를 들려주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흑인에 관한 개별적인 공감의 이야기를 말하지 못하는 인종주의자들은 많다. 인종 문제에 깊이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동성애자를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 중 한 명으로 상상하게끔 하는 포스터의 요청을 거부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 사회는 서로를 공감과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거부하는 분위기이고, 이러한 거부로부터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 우리는 '공상'에 호소하는 것으로만 수년간 고착화된 혐오와 차별이 바뀌기를 희망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공상은 그것이 적절하게 실현되었다 할지라도, 온갖 고난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하나의 미약한 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방식을 고려해볼 때, 위 학생의 비판에 공감할 이유는 충분하다. (-)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의 이러한 거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내가 여기서 옹호하게 될 '공상'이라는 형태가 갖는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유형의 공상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불평등하고 협소하게 인간적 공감을 익힌 사람들의 결함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결함에 대한 해결책은 공상의 부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지속적이고 인간적인 함양에 있으며, 비인간적인 제도적 구조를 상상력으로 대체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제도를 새롭게 구축하는 데 있고, 나아가 공감 어린 상상력의 통찰을 보다 완벽하게 체화한 제도와 (제도적 견고함의 보호를 통해) 제도적 주체의 정립에 있다. 우리는 개개인의 상상에만 의존할 필요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제도 그 자체는 '공상'의 통찰력으로 인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1180번 학생에게 묻고 싶다. 시민으로서 우리가 만약 희망을 갖고 또 스스로를 존중하고 싶다면 다른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헨리 제임스가 말했듯, 공적인 삶에 있어서 문학적 상상력의 과제는 "그 어떠한 것보다 더 나은 기쁨이 없을 때, 최상의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고귀하고, 구현 가능한 경우를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최상의 것이 보편적으로 수용되지 않더라도 그것이 유지되길 희망하고, 추한 것 옆에 아름다운 것이 있듯, 조악함과 둔감함 옆에 있음으로써 이것이 그 자체 목적으로서의 인간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식으로 상상력을 함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회정의로 이어지는 필수적인 가교를 잃게 될 것이다. '공상'을 포기하는 것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 연방대법관이었던 올리버 웬델 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연구가 "삶이란 총합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줄 수 있다고 쓴 적이 있다. 이 책의 목적은 이러한 생각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고, 그 같은 정신에 담긴 공적 추론이 어떤 모습일지를 보여주는 것에 있다.


 


'왜 역사나 전기가 아닌 소설인가?' 나의 중심 주제는 나 자신이 될 수도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주어진 환경이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여─타인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왜 역사가 아닌가에 대한 나의 답변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쉽게 도출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문학과 예술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단순히 "일어난 일들"을 보여주는 반면, 문예 작품은 인간 삶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문학은 독자가 스스로에게 의문을 갖도록 요청하면서 일어날 법한 일에 주목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옳다. 대부분의 역사적 글과는 달리, 문학 작품은 일반적으로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의 입장에 서게 하고, 또 그들의 경험과 마주하게 한다. 문학 작품은 가상의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고유한 방식 속에서 작품 속 인물들과 독자 자신이─최소한 매우 일반적인 수준에서─연결될 수 있다는 느낌을 전달한다. (-)


이러한 점을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은 좋은 문학이란 대부분의 역사 및 사회과학적 글쓰기가 갖지 않는 혼란을 가져다준다는 점이다. 좋은 문학은 우리에게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불안을 야기하며, 당혹스럽게 만든다. 이는 전통적인 경건함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자신의 생각과 의향을 자주 맞닥뜨리게 되는 고통을 가져다준다. (-) 심리적 동일시와 감정적 반응을 촉진하는 문학 작품들은 직면하기 어려운 많은 것들을 보게 하고 또 그에 반응하기를 요구하면서 자기방어적 계략을 깨부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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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세계 3
이자혜 지음 / 현실문화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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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되게 레진코믹스에서 보던 만화가 미지에세게엿는데.. 책으로 다시 만나게 되다니.. 표지넘 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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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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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진님!!!! 설 앞두고 가장 반가운 신간소식이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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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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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력을 잃고 말았다. 욕구가 소진된 것이다. 그는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실패해본 적이 없었고, 그의 연기는 하나같이 감동적이고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도저히 연기를 할 수 없었다. 무대에 오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연기를 훌륭하게 해내리라 확신하는 대신 실패하리라는 걸 알았다. 내리 세 번이나 그런 일이 일어났다. 마지막에는 아무도 그의 연기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아무도 보러 오지 않았다. 그는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재능이 죽어버린 것이다.
(-) 명성을 안겨주었던 그의 분위기, 그의 모든 버릇과 기벽, 그리고 그만의 특색 가운데 어떤 것도 이제 그가 맡은 배역에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를 그이게 만들어주었던 모든 것이 이제는 그를 미치광이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최악의 연기로 무대에 서 있다는 걸 매 순간 의식했다. 예전에는 연기할 때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의 훌륭한 연기는 본능에서 나온 것이었으니까. 이제 그는 온갖 생각을 했고, 거침없고 활력 넘치던 모든 것이 죽어버렸다. (-)
(-) 그는 이제 모든 연기가 두려웠고, 온종일 두려움에 떨었다. 평생 단 한 번도 공연 전에 해본 적 없는 생각들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실패할 거야, 나에겐 해낼 능력이 없어, 나는 엉뚱한 배역을 연기하고 있어, 과욕을 부리는 거야, 나는 사기를 치고 있어, 첫 대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 극장에 도착할 때쯤이면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그리고 무대에 오르는 것이 두려워졌다. 시작 신호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들으며 자신이 해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 연기는 뭔가를 모면하기 위해 밤마다 애써 하는 숙제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 정신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느껴졌고,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웠다. 밤에도 두세 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고, 거의 먹지도 않았으며, 매일 다락방에 있는 총(-)으로 자살할 생각만 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게 일종의 연기, 아주 엉터리인 연기처럼 보였다. (-)
그는 (-) 자신이 미쳤다는 것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다. 그는 미치광이로서도 가짜였다. 그가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은 어떤 역을 연기하는 역할뿐이었다. (-) 그리고 마침내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살에 대한 게 전부였지만, 그것을 흉내내지는 않았다. 죽고 싶어하는 남자를 연기하는 살고 싶은 남자였으니까.
(-) 그럼에도 그는 어쨌든 의사와 면담할 때마다 이야기를 털어놓곤 했다. 안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고통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게 마련이다. 설사 그 설명이 무엇 하나 해명하지 못하고 결국 실패한 또하나의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 인간이 실제로 자살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 모두를 매혹하는 원천이었고, 남자아이들이 스포츠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화제였다. (-) "우리는 스스로한테도 주변 모든 사람한테도 무기력하고 완전히 무능한 존재처럼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세상 모든 행위 가운데 가장 하기 어려운 걸 실행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어요. 그게 기분을 돋워주죠. 기운나게 해주고요. 행복감도 느끼게 해줘요." (-)

_필립 로스_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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