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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75호 - 2013.여름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13년 5월
평점 :
이성복: 어제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재미있다는 말은, 나는 모든 걸 시로 연결해버릇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재미있었다는 것입니다. 거북이가 말입니다, 아가리를 쫙 벌리는데 제 혀를 마치 벌레처럼 보이도록 만들더군요. 그러니까 물고기가 그게 벌레인줄 알고 잡아먹으려다가 도리어 거북이에게 잡아먹히고 말아요. 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개미를 잡아먹고 사는 새가 있어요. 그런데 이 녀석은 다른 힘센 새가 자기 알을 훔쳐 먹으려고 나타나면 뱀 흉내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다른 새는 이게 진짜 뱀인 줄 알고 도망을 가는 거예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이 진실에 의해 보호받는 것도, 또 진실을 가지고 제 삶을 유지하는 것도 저런 식이 아닌가. (-) 거북이가 제 혀를 벌레처럼 보이게 만들고 또 새가 뱀의 흉내를 내는 것, 그것은 허구이지요. ‘마치 ~처럼’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허구로서의 진실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보호하고 삶을 기획(project)하게 합니다. (-)
이성복: 진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우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살아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우리가 어느 날 사라져 없어집니다. 이 경산 자락이 원효의 고향입니다. 여기에 신라 사람들이 살았는데 지금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게 이해가 되십니까? 삶은 허무하고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진실을 만들어냅니다. ‘마치 ~처럼’의 형태로 만들어지는 그것은, 마치 바다에 내리는 눈처럼, 형체는 있지만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진실이 우리를 삶의 허무와 허망으로부터 보호해줍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매순간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진실은 ‘진실화 과정’으로서만 존재한다고 해도 되겠지요. 시작(詩作)을 뜻하는 ‘poiesis’ 역시 본래는 ‘만듦’을 뜻하지 않습니까.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은 카프카였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믿음이라는 것은 통속적이고 피상적이며 이데올로기이고 공동환상입니다. 시가 만들어내는 진실은, 비록 만들자마자 녹아내리는 눈사람 같은 것일지언정, 이 이데올로기 혹은 공동환상으로서의 믿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신형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보호해줄 진실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야 한다. (-) “진실함(眞)은 진실함이 아니라 진실함으로 나아가는(進) 과정이고, 올바름(善)은 주체가 앞장서(先) 주인 역할을 하는 것이며, 아름다움(美)은 아직 오지 않은(未) 아름다움으로 존재한다.”(『타오르는 물』, 238쪽) 그러고 보면 지금 인용한 이 문장도 일종의 ‘진실’이다. 이런 문장들이 주는 느낌을 우리는 기껏해야 예리하다거나 웅숭깊다거나 하는 빤한 표현들로 말해보려 애쓰지만 매번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이런 문장(진실)들은 우리를 보호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표현해보려 애썼던 그 느낌은 ‘보호받는 느낌’이었다. 비록 이 문장들 역시 이내 녹아 없어질 눈송이에 불과할지라도.
결국 모든 것이 다시 '불가능'이라는 말로 귀결됩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것, 그러나 죽기 직전까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마태복음에 나오는 '하늘나라에 대한 세 가지 비유' 중 하나를 얘기하며 말을 이어갔다.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13:45~46) _이성복
이성복 - 신형철 대담 '불가능에 대한 불가능한 사랑' / 끝나지 않는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