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하는 저급들 - 퀴어 부정성과 시각문화 SeMA 비평프로젝트
이연숙 지음 / 미디어버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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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몇몇 인터뷰에서 전형적인 섭식장애 당사자처럼 말한다. “[52파운드를 감량하는 것은] 힘을 준다. (...)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_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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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 좋게 계획한 바에 따르면 이 글은 지난 몇 년간 서울에서 발표된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의 경향성을 다뤄야 한다. 물론 나는 이 주제에 강박적인 수준의 관심이 있다. 지난 10년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 주제에 관해 쓰고 또 말해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재미만이 동기는 아니었다. 매번 내게 이 주제, 그러니까 반복하자면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것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를 개간하는 일만큼이나 고생스럽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작업처럼 느껴졌으니까. 더구나 나만 이 작업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일단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라는 이름의 황무지에 들어가고 나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주 오랫동안 개간 작업을 해왔으며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유감스럽게도 이 작업은 전 지구적인 기후위기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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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결과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보일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보이게 만드는 일’이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의 지배적인 경향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더 나아가 보이기만 한다면 그것은 안 보이는 것보다 질적으로 더 우월한 듯이 평가되기도 한다(‘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는 와중에 비시각적인 기억• 경험•감각은 때로 시각적 재현의 체계에 들어맞지 못해 공적인 ‘가시성’의 영역에 진입하지 못하고 누락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 이는 ‘부수적 피해’ 또는 ‘필요한 희생’일 뿐이다. 문제는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에서 ‘보이는 것’의 중요성이 제대로 의심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보이는 것이 곧 존재하는 것’이라는 명제는 최소한 이를 믿고 싶어 하는, (여성) 퀴어-성소수자의 시각적 재현에 갈증을 느끼는 이들에게 진리처럼 작동하는 듯 보인다. 일단 이를 ‘가시성의 함정’이라 부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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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 ‘덜’ 보인다거나 ‘안’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버젓이 존재하는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은 안 보이는 것‘처럼’ 간주된다. 한편 ‘예술’이라는 범주에 초점을 맞춰보자면, 이 특수한 장르가 정체성 정치와 행동주의, 그리고 페미니즘 미술이라는 극단적인 두 스펙트럼에 걸쳐 포진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요컨대 레즈비언을 다른 시각적 재현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즉각 퀴어-페미니즘 이론과 비평의 정치적인 지형 안에서 수용된다. 그러므로 ‘오로지’ (여성) 성소수자로서만 독해될 수 있는 시각적 재현이란 (그것의 애매한 장르적 경계 때문이라기보단 강한 비평적 틀에 가려져) ‘덜’ 보이거나 ‘안’ 보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보이긴 보이되 지금까지의 (서구/남성/이성애 중심적인 방식으로 구성된) 예술사적/미학사적 해석과 평가의 체계를 통해서는 제대로 인지될 수 없는 방식으로만 미약하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잘’ 안 보이는 것들의 존재 양식을 설명하고 심지어 평가할 틀거리frame를 (지금으로서는)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오랫동안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이원론의 도식을 따르자면 보이지 않는 것은 곧 여성(적인 것)이며, 감정적인 것이며, 시각적인 것에 비해 '동물적'이라 간주되는 촉각적인 것이며, 무엇보다 비물질적인 것이다.


(여성) 퀴어-성소수자 시각 예술의 비가시성을 다루는 이 짧은 노트에서 나는 결론 대신 다음의 제안을 남기고자 한다. 차라리 우리는 이러한 보이지 않음을, 비가시성을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 존재하는 방식의 조건으로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 까? 이는 ‘가시성’에 집중하다 보면 잊기 쉬운, 그것의 ‘부재’라는 공백 속에 파묻힌 보이지 않는 기억과 감각을 어떻게 시각 예술의 형식을 통해 소환할지에 대한 질문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_<6장 레즈비언 황무지> 중에서



‘저급 이론들의 연합’은 잭 할버스탐Jack Halberstam의 책, 『실패의 퀴어 예술The Queer Art of Failure]에 등장하는 용어인 ‘저급 이론low theory’을 차용한 제목이다. 잭 할버스탐 역시도 스튜어트 홀Stuart Hal에게서 차용한 용어인 ‘저급 이론’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고급’과 ‘저급’의 이분법적인 위계를 겨냥할 뿐만 아니라 ‘저급’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옹호하고 긍정하기 위해 도입됐다. ‘고급’들의 반대항에 놓이는 ‘저급’은 결코 ‘정전canon’ ‘고전cassic’의 반열에는 오를 수 없을 하위문화적 생산물들, 그리고 자본주의 내에서의 성공과는 거리가 먼, 즉 계속 그런 식으로 산다면 필패가 예정되어 있는 ‘패배자loser’들에게 어울리는 단 하나의 이름이다. 내용물이야 어찌 되었든 ‘저급한 것’으로 자동 분류되는 하위문화적 생산물들과 마찬가지로, ‘패배자’들에게 ‘그런 식으로 살지 않을 수 있는’ 옵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애당초 당신이 가난하다면, 동성과 사랑에 빠진다면, 이성애-재생산 모델에 복무하지 못한다면, 아프고 장애가 있다면, ‘외국인’이라면, 나이가 들었다면, 자본주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실패하게 되어 있다. 아니 당신이 실패하기도 전에 실패가 당신을 선택한다. 이러한 단언은 ‘노오력’의 신화와 성공의 환상을 배반하기에 소수자들에게 특히 고통스러운 비관주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통을, 실패를 전유하기란 소수자들의 ‘전통적’ 기술이자 유일한 무기가 아니던가? 소위 ‘정상 사회’라고 하는 내부의 ‘구성적 외부’로서 내쳐지는 우리, 남들이 말하는 평균 그 미만에 위치하는 우리를 퀴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이처럼 울적한low 실패의 경험과 감각을 통해서다. 이러한 관점은 ‘다양한’ 성적 정체성을 아우르는 우산 개념으로서의 퀴어, ‘정상 사회’의 포용과 관용, 인정을 기다리는 ‘재미있는’ 문화적 용어로서의 퀴어를 거부한다. 퀴어는 실패자다. 퀴어(한) 예술이란 실패하는 예술 또는 기술이다. 실패를 기술로 간주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잘 실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것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_97-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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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숙: 아마 지금 여기에 계신 분들은 모두 다 의견이 다를 텐데, 저는 전인 작가님 말씀에 공감이 됩니다. 레즈비언이라는 이름을 가져가려는 사람은 그냥 가져다 써라. 왜냐하면 여기에는 딱히 좋은 것이 없으니, 일단 가져다 쓰고 싶으면 써라. 저 역시 이런 방식으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제 이 토크를 준비하면서 예전에 제가 팟캐스트 ‘퀴어 방송’을 한창 했을 때 대화를 나눴던 한 남성이 생각났습니다. 스스로를 이성애자 남성으로 소개한 그분은 레즈비언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6-7년 전인데도 아직까지 기억이 나는 게, 그분은 레즈비언이라는 주제에 대해 몹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저는 당시에 그분을 취향이 왜곡된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분과의 대화를 다시 떠올리면서 그분은 아마도 레즈비언이었던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레즈비언이라는 이름이 좋아서 가져가려는 사람은 이미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레즈비언이라는 자리는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닌데, 여기에 굳이 관심을 가지면서 무언가를 가져가려는 사람은 뭘까요. 물론 레즈비언을 좋아하는 성적 취향을 가진 이성애자 남성일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의 관심이라면 그 사람을 레즈비언이라고 쳐도 되지 않을까요. 122_123쪽


_이연숙, 『진격하는 저급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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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사회 144호 - 2023.겨울 (본책 + 하이픈)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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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적’ 읽으려고 동양서림에서 12월 15일 저녁 8시쯤 구입. “그리고 다음 순간, 기억이 난 듯 지금 이 순간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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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일 안에 장악하라 - 최신 개정증보판, 부임 3개월 안에 조직과 업무를 완벽히 장악하는 방법
마이클 왓킨스 지음, 박상준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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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일을 아는 것과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다르다. 성공과 실패는 여러분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밀어올리기도 하고 벼랑으로 내몰기도 하는 일상적인 선택들이 쌓인 결과다. 자기관리의 두 번째 기둥인 자기규칙이 바로 이것이다.

자기규칙이란 스스로를 절제하는 일상의 규칙들이다. 여러분이 가장 우선적으로 정해야 할 규칙은 무엇인가? 그것은 각자의 강점과 약점에 따라 달라진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잘 알고 있겠지만, 여러분을 잘 알고 신뢰할 만한 사람과 상담해보기 바란다. (360도 피드백이 여기서 유용할 수 있다.) 그들은 여러분의 강점과 약점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아래의 자기규칙들은 여러분이 절제하기 위해 설정해야 할 규칙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계획을 계획하라. 여러분은 계획-일-평가 사이클을 일일 단위와 일주일 단위로 실행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거나 규칙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계획에 더 철저해질 필요가 있다.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10분 정도 시간을 내서 그날의 목표를 얼마나 잘 달성했는지 평가해보고 다음 날의 계획을 세워라. 그렇게 하다 보면 이것이 습관화된다. 설령 계획대로 하지 못했을지라도 여러분은 자신의 삶을 더 온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중요한 것에 집중하라. 매일 가장 중요한 업무에 시간을 배정하고 있는가? 중요한 일이 많을 때 여러분은 서두르기 마련이다. 전화, 회의, 이메일 등 급한 업무들을 처리하다보면 장기적인 업무는 말할 것도 없고 중기적인 업무를 진행할 시간조차 내기 어렵다. 실질적으로 중요한 업무를 처리할 시간이 없어서 곤란한 상황이라면 아예 규칙을 정해서 단 30분이라도 좋으니 매일 사무실 문을 닫고 전화도 받지 말고 이메일도 무시하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라.

약속에 신중하라. 여러분은 즉석에서 약속을 했다가 나중에 후회해본 일이 없는가? 먼 미래의 일처럼 생각되어 그때까지 뭔가를 하겠다고 섣불리 약속했다가 약속한 날짜가 임박해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자신을 책망한 적이 없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즉흥적인 약속을 피하고 약속을 유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어떤 부탁을 해오면 이렇게 말하라. “재미있을 것 같군요. 한번 생각해보고 연락드리죠.” 즉석에서 약속하지 말라. 간청에 약한 여러분의 약점을 알고 누군가가 허락을 종용한다면 이렇게 말하라. “지금 당장 답해야 한다면 안 된다고밖에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 생각할 시간을 준다면 당신의 부탁을 더 고려해볼게요.” 처음엔 안 된다고 했다가 나중에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처음에 들어준다고 했다가 나중에 안 된다고 말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자신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시간 여유가 있는데도 당장 약속을 받아내려 하는 것은 먼 미래의 일처럼 여겨지는 지금이 약속을 받기 쉽기 때문이다.

높은 곳에서 조망하라. 상황이 어려울 때 너무 감정적 차원에 사로잡힌 경험이 있는가? 이럴 때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 높은 곳에서 전체를 내려다보면 뭔가 생산적으로 상황에 개입할 방안이 보인다. 많은 리더십 및 협상 분야 권위자들은 ‘높은 곳에서 조망하기’가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해왔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 어떤 결정에 따른 파장이 크고 감정적으로 흥분된 상태에서는 더욱 어렵다. 하지만 규칙을 정해서 연습하다 보면 향상될 수 있는 능력이다.

성찰하라. 여러분은 전환기의 여러 사건들에 자신이 보인 반응들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상황에 대해 체계적으로 성찰하도록 단련해야 한다. 신임 리더들 가운데는 자기성찰을 위해 매일 몇 가지 생각들, 인상들, 의문점들을 기록하는 사람들도 있다.매주 일정한 시간을 정해서 진행 상황을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러분도 적당한 방법을 찾아서 정기적으로 실행하라. 이 과정에서 얻은 통찰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쉬어갈 때를 알아라. 진부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보직 전환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스트레스가 성과 곡선의 정점을 자주 넘어선다면 여러분은 쉬어야 할 때 쉬도록 스스로를 규제해야 한다. 말이 쉽지 행동으로 옮기기는 매우 어렵다. 가령 마감시간이 임박했고, 한 시간만 더 일해도 결과가 확연히 달라진다고 해보라.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노력 대비 성과가 줄어드는 시점을 파악하라. 그 시점이 왔다면 잠시 휴식을 취하며 자신을 재충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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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말린 날들 - HIV, 감염 그리고 질병과 함께 미래 짓기
서보경 지음 / 반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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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저 앞줄에서 먼저 바이러스를 만난 것뿐입니다. 그래서 뒷줄에 서 계신 당신들께 알려드립니다. 우리가 먼저 경험한 것들을, 느끼는 것들을, 필요한 것들을 말이지요.


‘한국청소년‧청년감염인커뮤니티 알’의 활동가들은 코로나19 범유행의 첫해인 2020년 7월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의견서 초안에 이와 같이 썼다. 이 문장들은 의견서를 수정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흐름이 조금 달라졌지만, 나는 여기에 아주 깊은 진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나는 감염이라는 우연한 계기로 앞줄에 서게 된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보며, 경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한 공간에 있는 ‘우리’를 나누어 구별하는 선, (-)


(-) 많은 좀비 영화가 바로 이 앞줄과 뒷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시작한다. (-) 주인공은 혼란의 한가운데에 있지만, 자기 앞의 사람들이 먼저 공격을 당하는 사이에 상황을 모면하고 탈출할 겨를을 얻는다. 앞줄에 있던 사람들, 낯선 그 무언가에 먼저 휘말린 사람들은 이제 장면에서 사라질 차례이다.

운 좋게 뒤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우연히 앞에 서 있었던 사람의 시점에서 상황은 매우 다르게 펼쳐진다. 누군가는 결국 앞에 서게 될 수밖에 없는데, 앞과 뒤의 구분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장르는 (-) 감염한 존재에게는 들여다보고 의미를 읽어내야 할 표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의 얼굴은 (-) 표정을 가진 누군가의 얼굴은 될 수 없다. 얼굴에 표정을 부여하는 순간, 말의 가능성, 소통의 가능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HIV/AIDS 인권 활동가들이 앞줄과 뒷줄을 구분할 때의 위치 감각은 바로 이 새로운 출현이 동반하는 우발성과 경계 짓기의 폭력 속에서 사물화되어야 했던, 그래서 얼굴을 잃어야 했던 집합적 경험에서 나온다. (-)


‘내가 지금 맨 앞줄에 있다.’라는 HIV 감염인의 선언에는 (-) 새로운 연대성의 기획이 자리해 있다. 앞줄의 사람들은 바삐 숨거나 도망쳐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외려 뒷줄의 사람들에게 전해줄 말이 있는 이들이다. 해줄 이야기가 있다는 마음에는 두려움에 휩싸여 끝없이 달아나려는 탈주의 욕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용기가 있다. 전할 이야기가 있을 때, 앞줄은 버려진 사람들의 자리가 아니라 먼저 겪은 사람들의 자리, 다음 사람이 홀로 고통받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사람들의 자리이다. 경계선이 결정하는 운명을 바꾸고, 함께 있을 장소를 찾는 사람들의 자리이다.


(-)


(-) ‘감염시키다’, ‘감염되다’ 같은 표현은 바이러스 증식 과정이 마치 바이러스의 공격적 의지로 인해 일어나거나 혹은 이미 감염한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것처럼 상정하게 한다. (-) 나는 이 책에서 ‘감염’을 타자로부터 당하는 것이나 혹은 타자에게 강제로 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명 형식이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변형하는 과정으로 바라볼 때, 감염의 어법과 의미, 그에 대한 대응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인간은 바이러스에 ‘감염한다’. (-) 감염은 인간과 바이러스 모두의 속성이자 양자가 함께 겪는 일이다.

‘휘말림’이라는 우리말은 특히 ‘하다’의 능동성과 ‘당하다’의 수동성으로 나뉘지 않는 중동中動의 상태를 파악하는 데 유용하다. 사전적으로 ‘휘말리다’는 ‘휘말다’의 피동형으로 분류되지만, 말의 쓰임에서 이 단어는 외려 동사의 주체가 어떤 과정 중에 있음을 나타낸다. 휘말린 상태는 ‘하다’와 ‘당하다’로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싸움을 거는 것과 싸움에 휘말리는 것은 다르다. 내가 싸움을 시작하거나 싸울 의지를 가진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싸움을 하지 않은 것도아니다. 사랑에 혹은 분노에 휘말리는 것 역시 비슷하다. 그 감정을 내가 택한 것도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지만, 결국 이 강렬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


(-)


(-) 작가는 다만 일상의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그가 어떻게 콘돔을 사용하는 혹은 사용하지 않는 성행위를 다수와 반복해서 하고 있는지에 대해 쓴다. 그는 섹스 이외의 순간을 기술할 때는 종종 기쁨과 즐거움, 슬픔이나 불안의 감정을 드러내지만, 섹스에 대해 묘사할 때는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에 대해서 거의 기술하지 않는다. (-) 작가가 이 경험에서 반드시 전달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그가 무엇을 느끼는지가 아니라 그와 그의 상대들이 무엇을 하는지, 즉 행위의 상호 연쇄이다. 작가는 항문 섹스와 같은 행위가 도대체 어떤 쾌락을 주는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며, 자신이 하는 위반이 얼마나 짜릿한지 도발하지도 않고, 이러한 욕망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인정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성애 규범성의 기준에서, 또 계급과 자본, 외모와 연령, 거주 지역을 기준으로 가파르게 서열화된 게이 섹슈얼리티의 위계하에서도, 가장 불결하다고 분류되는 성적 실천이 자신으로부터 산출되고 있으며 산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 발생 자체에는 어떠한 신비도 없다는 점을 참을성 있게 반복적으로 보고한다. 그리하여 이 역시 사회적 삶의 한 형식이라는 점을 입증해낸다.


(-)


우리는(-) 누구든 원하면 방대한 양의 정보를 검색하고 제공받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어쩌면 지식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 (-) 실상 우리가 오래도록 결여해온 것은 질병에 관한 지식을 구성하는 개념 틀과 앎의 체계에 대한 비판적 인식론이다. 감염이라는 현상을 어떤 말과 생각의 도구들로 다루고 있는지, 그 사고방식이 어떤 이해와 실천을 당연시하고 동시에 불가능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치밀한 논의이다.

(-) 감염이 내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그 무언가에, 무수한 타자들에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감각을 준다면, 이는 스스로를 온전히 보호하지 못할 거라는 불안이나 불완전함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휘말림의 감각은 우리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서로를 연결하는 매듭의 전체를 완전히 가늠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이미 이어져 있다는 걸 알아차릴 때 생겨나는 윤리적, 정치적 가능성이다.


(-)


고쿠분 고이치로의 중동태 논의는 ‘감염되다’라는 표현이 옳다고 느끼는 사고 틀과 감염이라는 현상 앞에서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지를 가장 중요하게 떠올리는 대응 방식 사이에 훨씬 더 깊은 구조적 친연성이 있다는 걸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



(-)


한국에서 내가 HIV와 관련해 제일 재미있다고 생각한 은어는 ‘감자’와 ‘고구마’이다. (-)

감염을 휘말림의 움직임으로 그려내면서, 나는 감자와 고구마가 감염이 야기하는 차이를 빗대는 말놀이가 될 뿐 아니라, 물질적이면서도 가상적인 연결의 존재론을 감각하는 데도 좋은 비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 감자와 고구마는 수확하고 나면 한 알, 한 알 따로 나뉘어 세어진다. 그러나 감자와 고구마는 낱개로 태어나 자라는 게 아니라 여러 줄기와 뿌리의 와중에 함께 큰다. (-) 그리하여 한 알의 감자를 만질 때, 우리는 본 적도 없는 땅속줄기의 주름과 펼쳐짐을 어느새 만지고야 만다. 고구마 한 알은 뿌리라는 전체로부터만 비롯한다. 덩이를 이루는 식물처럼 사람인 우리 역시 낱낱으로, 각자의 몸에 기거하여도, 언제나 이미 연결의 긴 자취 속에 있다. 살아 있는 생명으로서 ‘우리’의 상호성은 어쩌면 이처럼 만질 수 있되 만질 수 없는 모양과 감촉에 대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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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퀴어, 보살핌 - 뉴욕의 백인 게이 바이러스 학자가 써내려간 작은 존재에 관한 에세이
조지프 오스먼슨 지음, 조은영 옮김 / 곰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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