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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하는 저급들 - 퀴어 부정성과 시각문화 ㅣ SeMA 비평프로젝트
이연숙 지음 / 미디어버스 / 2023년 12월
평점 :
(-) 그는 몇몇 인터뷰에서 전형적인 섭식장애 당사자처럼 말한다. “[52파운드를 감량하는 것은] 힘을 준다. (...)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_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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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 좋게 계획한 바에 따르면 이 글은 지난 몇 년간 서울에서 발표된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의 경향성을 다뤄야 한다. 물론 나는 이 주제에 강박적인 수준의 관심이 있다. 지난 10년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 주제에 관해 쓰고 또 말해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재미만이 동기는 아니었다. 매번 내게 이 주제, 그러니까 반복하자면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것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를 개간하는 일만큼이나 고생스럽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작업처럼 느껴졌으니까. 더구나 나만 이 작업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일단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라는 이름의 황무지에 들어가고 나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주 오랫동안 개간 작업을 해왔으며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유감스럽게도 이 작업은 전 지구적인 기후위기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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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결과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보일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보이게 만드는 일’이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의 지배적인 경향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더 나아가 보이기만 한다면 그것은 안 보이는 것보다 질적으로 더 우월한 듯이 평가되기도 한다(‘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는 와중에 비시각적인 기억• 경험•감각은 때로 시각적 재현의 체계에 들어맞지 못해 공적인 ‘가시성’의 영역에 진입하지 못하고 누락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 이는 ‘부수적 피해’ 또는 ‘필요한 희생’일 뿐이다. 문제는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에서 ‘보이는 것’의 중요성이 제대로 의심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보이는 것이 곧 존재하는 것’이라는 명제는 최소한 이를 믿고 싶어 하는, (여성) 퀴어-성소수자의 시각적 재현에 갈증을 느끼는 이들에게 진리처럼 작동하는 듯 보인다. 일단 이를 ‘가시성의 함정’이라 부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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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 ‘덜’ 보인다거나 ‘안’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버젓이 존재하는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은 안 보이는 것‘처럼’ 간주된다. 한편 ‘예술’이라는 범주에 초점을 맞춰보자면, 이 특수한 장르가 정체성 정치와 행동주의, 그리고 페미니즘 미술이라는 극단적인 두 스펙트럼에 걸쳐 포진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요컨대 레즈비언을 다른 시각적 재현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즉각 퀴어-페미니즘 이론과 비평의 정치적인 지형 안에서 수용된다. 그러므로 ‘오로지’ (여성) 성소수자로서만 독해될 수 있는 시각적 재현이란 (그것의 애매한 장르적 경계 때문이라기보단 강한 비평적 틀에 가려져) ‘덜’ 보이거나 ‘안’ 보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보이긴 보이되 지금까지의 (서구/남성/이성애 중심적인 방식으로 구성된) 예술사적/미학사적 해석과 평가의 체계를 통해서는 제대로 인지될 수 없는 방식으로만 미약하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잘’ 안 보이는 것들의 존재 양식을 설명하고 심지어 평가할 틀거리frame를 (지금으로서는)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오랫동안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이원론의 도식을 따르자면 보이지 않는 것은 곧 여성(적인 것)이며, 감정적인 것이며, 시각적인 것에 비해 '동물적'이라 간주되는 촉각적인 것이며, 무엇보다 비물질적인 것이다.
(여성) 퀴어-성소수자 시각 예술의 비가시성을 다루는 이 짧은 노트에서 나는 결론 대신 다음의 제안을 남기고자 한다. 차라리 우리는 이러한 보이지 않음을, 비가시성을 (여성) 성소수자-퀴어 시각 예술이 존재하는 방식의 조건으로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 까? 이는 ‘가시성’에 집중하다 보면 잊기 쉬운, 그것의 ‘부재’라는 공백 속에 파묻힌 보이지 않는 기억과 감각을 어떻게 시각 예술의 형식을 통해 소환할지에 대한 질문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_<6장 레즈비언 황무지> 중에서
‘저급 이론들의 연합’은 잭 할버스탐Jack Halberstam의 책, 『실패의 퀴어 예술The Queer Art of Failure]에 등장하는 용어인 ‘저급 이론low theory’을 차용한 제목이다. 잭 할버스탐 역시도 스튜어트 홀Stuart Hal에게서 차용한 용어인 ‘저급 이론’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고급’과 ‘저급’의 이분법적인 위계를 겨냥할 뿐만 아니라 ‘저급’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옹호하고 긍정하기 위해 도입됐다. ‘고급’들의 반대항에 놓이는 ‘저급’은 결코 ‘정전canon’ ‘고전cassic’의 반열에는 오를 수 없을 하위문화적 생산물들, 그리고 자본주의 내에서의 성공과는 거리가 먼, 즉 계속 그런 식으로 산다면 필패가 예정되어 있는 ‘패배자loser’들에게 어울리는 단 하나의 이름이다. 내용물이야 어찌 되었든 ‘저급한 것’으로 자동 분류되는 하위문화적 생산물들과 마찬가지로, ‘패배자’들에게 ‘그런 식으로 살지 않을 수 있는’ 옵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애당초 당신이 가난하다면, 동성과 사랑에 빠진다면, 이성애-재생산 모델에 복무하지 못한다면, 아프고 장애가 있다면, ‘외국인’이라면, 나이가 들었다면, 자본주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실패하게 되어 있다. 아니 당신이 실패하기도 전에 실패가 당신을 선택한다. 이러한 단언은 ‘노오력’의 신화와 성공의 환상을 배반하기에 소수자들에게 특히 고통스러운 비관주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통을, 실패를 전유하기란 소수자들의 ‘전통적’ 기술이자 유일한 무기가 아니던가? 소위 ‘정상 사회’라고 하는 내부의 ‘구성적 외부’로서 내쳐지는 우리, 남들이 말하는 평균 그 미만에 위치하는 우리를 퀴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이처럼 울적한low 실패의 경험과 감각을 통해서다. 이러한 관점은 ‘다양한’ 성적 정체성을 아우르는 우산 개념으로서의 퀴어, ‘정상 사회’의 포용과 관용, 인정을 기다리는 ‘재미있는’ 문화적 용어로서의 퀴어를 거부한다. 퀴어는 실패자다. 퀴어(한) 예술이란 실패하는 예술 또는 기술이다. 실패를 기술로 간주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잘 실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것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_97-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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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숙: 아마 지금 여기에 계신 분들은 모두 다 의견이 다를 텐데, 저는 전인 작가님 말씀에 공감이 됩니다. 레즈비언이라는 이름을 가져가려는 사람은 그냥 가져다 써라. 왜냐하면 여기에는 딱히 좋은 것이 없으니, 일단 가져다 쓰고 싶으면 써라. 저 역시 이런 방식으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제 이 토크를 준비하면서 예전에 제가 팟캐스트 ‘퀴어 방송’을 한창 했을 때 대화를 나눴던 한 남성이 생각났습니다. 스스로를 이성애자 남성으로 소개한 그분은 레즈비언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6-7년 전인데도 아직까지 기억이 나는 게, 그분은 레즈비언이라는 주제에 대해 몹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저는 당시에 그분을 취향이 왜곡된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분과의 대화를 다시 떠올리면서 그분은 아마도 레즈비언이었던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레즈비언이라는 이름이 좋아서 가져가려는 사람은 이미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레즈비언이라는 자리는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닌데, 여기에 굳이 관심을 가지면서 무언가를 가져가려는 사람은 뭘까요. 물론 레즈비언을 좋아하는 성적 취향을 가진 이성애자 남성일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의 관심이라면 그 사람을 레즈비언이라고 쳐도 되지 않을까요. 122_123쪽
_이연숙, 『진격하는 저급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