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인간이효영신생아실유리 너머로 처음 보았다신비한 나의 조카야너는 자랄 수 있지너는 잘할 수 있지건강할 수 있지똑똑할 수 있지친구를 많이 사귈 수 있지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선생님에게 사랑받는학생이 될 수 있지외롭지 않을 수 있지아프지 않을 수 있지어디에나 잘 어울리고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지무엇보다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지뭐든 할 수 있지나처럼 안 될 수 있지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가장 거대한 인간지금은 시치미 뚝 떼고조그만 아기로 누워 있네청소년 시선 『나는 산책 중에도 길을 잃어요』에서
거대한 인간
이효영
신생아실
유리 너머로 처음 보았다
신비한 나의 조카야
너는 자랄 수 있지
너는 잘할 수 있지
건강할 수 있지
똑똑할 수 있지
친구를 많이 사귈 수 있지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선생님에게 사랑받는
학생이 될 수 있지
외롭지 않을 수 있지
아프지 않을 수 있지
어디에나 잘 어울리고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지
무엇보다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지
뭐든 할 수 있지
나처럼 안 될 수 있지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가장 거대한 인간
지금은 시치미 뚝 떼고
조그만 아기로 누워 있네
청소년 시선 『나는 산책 중에도 길을 잃어요』에서
서너 해 전에 마지막으로 썼던 자기소개서 파일은 아 직 남아 있다. 읽어보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편집자로서 밟아온 어쭙잖은 궤적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러 출판사의 이름과 그곳에서 만들었던 책, 만났던 사람들,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 미래의 목표와 계획 따위가 나름대로 단정하게, 하지만 무미건조하게 기술되어 있다. 항상 내 편이었던 것만은 아닌 시간들에 대한 회한도 얼마간 묻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희망만은 엿보인다. '나는 일하고 싶다'라는 희망. 이 자기소개서도 언젠가는 찾을 수 없어질 것이다._본문 중에서
의료적 트랜지션을 시작하기 위해 정신과에서 진단용 검사를 했던 때를 기억한다. 의사는 나에게 사람을 그려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남자, 그다음에는 여자를 그렸다. 그는 내가 그린 사람들이 누군지 물었고, 나는 둘 다 나라고 답했다. 의사는 이들이 미래에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멍하니 종이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사라져요./(기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