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시륄니크는 (-) 자기 책에서 피에르 페예레젠을 인용한다. "아이, 여자, 외국인, 흑인 들, 이렇게 타인들 때문에 고통받아야 했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신경쓰는 노력 없이 인성을 발달시킨 사람들에 비해 더 나은 관찰자가 된다."
파스칼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이어, 모든 인간의 행위에는 행복을 찾으려는 의지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따귀 뒤에도, 쓰다듬는 손길 뒤에도 숨어 있는 행복에 대한 의지는 모든 인간을 움직이고 모든 행동의 목표가 된다. 목을 매달려는 사람조차도 하나의 '시도'를 하는 것이다...... 그는 고통을 덜 길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존중에 대한 권유다. 나를 멍들게 하는 사람은, 어쩌면 솔직한 심정으로 자기 팔자가 좀 나아질 거라고 믿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설령 그가 다른 길을 택한다 해도, 그 길이 때로 비난받을 만한 길이라 해도, 그는 나와 같은 열망, 즉 행복해지겠다는 열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비정상인이다. 그 말은 다른 사람들이 할 만큼 했다. 나도 그걸 느꼈다. 사람들이 나의 작은 부분 하나하나를 점검할 때 그들의 눈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이의 시선이 내 눈길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좀더 아래쪽으로 내려와, 자기가 찾는 증거가 있는 바로 그곳에 가 닿는다. '이 녀석 장애인이군.' 그 두 눈이 훑어내리는 궤적, 집요한 아킬레스건 찾기, 약점 찾기...... 사람들 대부분이 보는 것은 몸짓의 어색함, 말의 어눌함,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거동 등이다. (-) 경련, 입 비죽거림, 균형 상실, 이런 현상들은 단호하고 가차없는 판단 뒤에 소리 없이 숨어 있다. 발달이 지체된 자가 여기 있는 것이다. 이 첫인상을 바꾸기란 힘들다.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채로, 그렇게 축소된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 건 고통스럽다. (-) 대화는 불가능하다. (-)
정상적인 것에 대한 숙고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마침내 열정의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런 숙고를 하다보면 나는 숱한 고통과 상처를 확실히 받게 된다. 처음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 장애인 수용 시설을 벗어나 '정상인'을 보고, 만지고, 느끼고, 알아보려 했다.
발레리는 자기 강연의 서두에서 이 말을 즐겨 반복했다. "여러분 앞에, 저는 모르려고 왔습니다." 고통에 대한 숙고를 시작하는 데 참으로 탁월한 서두가 아닐 수 없다. 자기가 그 주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또 자신의 연설로 미미한 효과라도 자아낼 수 있다고 자부할 사람이 누구겠는가? 고통으로 큰 타격을 받은 몸, 소중한 존재를 잃은 마음, 긴 세월 겪은 고독 앞에서 말이란 부질없는 것일 뿐이다. (-) 당신이나 나 같은 '전향적 인간'이 해답을 하나라도 제시해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사람을 낙담시키고 일그러뜨리고 상처내는 것에 대해 해답의 일면이라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를 움직이는 희망은 각각의 체험, 특히 가장 잔혹한 체험으로부터 유익한 것을 끌어내야 한다는 확신, 그러한 결정적 확신에 정확히 뿌리내리고 있는 것 아니던가?
인간이란 이렇게 생겨먹었다. 날마다 전투를 벌이고, 안 죽고 살아남아, 좀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 발전의 적―아마도 유일한 적―인 절망이 내면을 갉아먹는 고통, 더없이 외딴 방에서나 군중 한복판에서나 똑같이 마수를 뻗쳐가는 고통과 마주칠 때, 이럴 때 얼마나 많은 장애가 숨어서 그를 노리고 있는가? (-)
(-) 그 고통에 정면으로 맞서기란 종종 불가능해 보인다. 고통은 우리가 어떤 수단을 써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며, 일체의 말살 시도에 저항하는 지울 수 없는 어떤 딱지처럼 존속한다.
인간이라는 직업, 각자가 일상에서―종종 자기도 모르게―실천하는 이 숙명적 처세술에는, 따라서 수많은 원천이 필요하다. 삶을 승리로 만들기 위해, 삶의 조건을 감당하기 위해 재능이 지속적으로 펼쳐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내가 극단적일 만큼 취약한 인간임을 고백하고 싶다. 고통에 대해 얘기하는 것, 더 나아가 자기 육체로 그 고통을 직접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라는 직업이 없애지 못하게 금해놓은 무시무시한 시련이다. 하나의 인간성은 바로 그 인간성이 악을 뛰어넘으려 펼치는 거장다운 솜씨에서만 그 정수를 드러낸다.
유일한 확신, 우리가 품고 있고 매일 그 방향으로 서둘러 가고 있는 소멸의 전망, 거기서 출발하는 게 좋을까? 심지어 향유의 한복판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살아 있는 한에는 비극적인 것이 우리를 앞질러 가고 있다. (-) 슬피 우는 어머니에게, 어느 집에나 비극적인 일은 찾아온다고, 누구나 그런 일을 겪게 마련이라고 설명할까? 그런 설명에도 그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며, 그게 맞다. 우리가 마주치는 나쁜 일들은 어떤 일이든 핑계가 없다. 설령 핑계가 있다 치자. 핑계가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일을 좀더 잘 견뎌내는가? 자신이 겪은 나쁜 일이 때로 유용할 수도 있다는 걸 환자가 깨닫는다 치자. 그래도 그건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를 안다고 해서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며, 매 맞는 아이의 상처가 아무는 것도 아니다. 악의 문제는 이론적으로 명확히 밝혀진다 해도 엄연한 실존의 드라마인 것이다.
때로는 반전이 일어난다. 비극적인 것이 우리를 가르친다. (-) 귀는 쫑긋 곤두서야 하고, 의지는 다져야 한다. 그래서 신중한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려야 하고, 가장 기대할 수 없었던 곳에서 희망이 다시 솟아나야 한다. 그러니 이것이 첫번째 도전이다. 즉 삶을 빚어 만드는 것, 모래 위에 삶을 새기는 것이다. 이때 이 작업의 안내자는 가장 비참한 사람들, 즉 일체의 논리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취약한 선구자들, 끊임없이 위협받는 의미를 제시하는 상처받은 선구자들이다. (-)
(-) 그들이 취약한 존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게 보이지만, 그들은 그걸 감추지 않는다. 삶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의 몫이 따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제약을 받고 그 제약에 적응하면서, 그들은 어떤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구축하기 위해 모든 것을 가동한다. 잃을 것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이미 다 잃은 몸이니까! (-) 심각한 건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워낙 모든 게 심각하니까. (-) 이런 확언을 하고 나면 사람은 쓰러지기는커녕, 가벼움 쪽으로 인도된다. (-)
(-) 사람에게 가벼움은 매우 소중한 도구를, 세상을 폭발시킬 수도 있는 전대미문의 힘을 부여한다. 그 가벼움은 천진난만한 사람의 아둔한 낙관주의와는 거리가 멀며, 종종 고독이나 극복된 고통을 아주 건강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 그 기쁨은 만물이 불안정함을 알아차린다. 참 희한한 역설이다. 인도주의적인 일에 동참한 수많은 '선의'들은 비참과 실망만이 예고되던 영역에서 오히려 이 엉뚱한 뜻밖의 기쁨에 몸을 싣는 것이다.
절망의 미묘한 해독제인 가벼움, 그걸 채택한 사람은 (-) 성인이나 현자들을 살리는 것은 고통만이 아님을 이해한다. 가벼워지는 것, 그건 자신의 그림자를 말살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본 뒤에 겸손히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항거와 분노가 기승떠는 곳에서 저항을 긍정하는 것이다. (-) 가볍다는 것은 까칠해지거나 사람을 고립시키는 것에 맞서서 한껏 기쁨에 의지하는 것, 고통받는 이가 자신의 불행 속에 갇혀버리지 않도록 어깨를 쓰다듬어주는 것, 그를 지원하는 것이다. 가벼움은 역행한다. 즉 쪼그라드는 것에 역행하는 것이다.
(-) 가벼움은 격려의 말에 영감을 불어넣고, 사람을 구원하는 유머에 실려 확산되며, 혼란에 맞서 싸우는 사람을 해방하고, 아무리 미미한 발전도 기뻐하며, 곧 같은 처지인 사람의 경멸을 자아내는 원망을 무시한다. 병이, 절망이 자리잡을 때조차도 믿음을 간직하고 자신과 평온한 관계를 유지하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다. 머지않아, 우리는 악과 함께 삶을 통째로 미워하게 된다. (-) 가벼움의 추종자는 삶을 받아들이는 도전, 날마다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도전을 한다. (-)
가벼움은 또한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준다. 이 불길한 위협에 저항하는 힘은 고통받는 자들의 얼굴을 간혹 비추어준다. 그들의 표정을 잘 들여다보면, 거기 담긴 격려를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승리자는 종종 나쁜 편에 있다. 그러면 악이 승리하여 상처받고 슬픈, 폐쇄적이고 까다로운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 심술궂음의 이면에는―파고 들어가보면―거의 언제나 벌어진 상처가 있고, 실패의 좌절이 있다. 불교도들은 이 고통스러운 변증법을 다음과 같이 멋지게 보여주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을 몽둥이로 때릴 때 그 몽둥이는 분명히 당신을 쳤지만 행동의 책임자는 몽둥이가 아닌 것이다. (-) 당신을 공격하는 사람도 이 몽둥이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화를 내고 미워할 만한 대상이 아니다. 상처, 바로 그것이 진짜 죄인이다. 사람을 몽둥이처럼 도구화하는 상처, 지금 말한 우화의 메시지는 고통에도 놀랍도록 적용되며, 다시금 관용하라는 권유가 된다.
사람들이 인지하는 것은 타인이 겪은 번민의 편린들, 환자의 고통일 뿐이다. 사람들은 당장 지금 여기 있는 것만을 느낀다. 기쁨과 행복이 쉽게 여럿이 나눌 수 있는 것이라면 고통은 혐오감을 주고, 수치스럽고, 사람을 고립시킨다. 그러곤 거기에 고문이 또하나 덧붙는다. 남들의 판단을 받는 것, 이해받지 못하는 것, 너무 버거운 무게를 홀로 짊어지는 것, 그 어느 때보다도 누가 다정히 귀 기울여준다면 고통이 줄어들 것만 같은 그런 시점에 말이다. 고통받는 사람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어려운 연습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곁에 있을 수는 있다. 있으면서 힘이 되어주려고 노력하고, 특히 판단을 삼갈 수 있다. 고통당하는데 누가 있어준다는 것―아무리 있는 듯 없는 듯하더라도―, (-) 눈길 한 번, 미소 한 번, 말 한마디, 이것이 내 몫의 행동이다. 사랑하는 존재가 파멸해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그저 곁에 있어준다는 것, 힘을 주는 몸짓을 찾아내려 애쓴다는 것, 이것은 어려운 과제다. 그러는 동안 절망이 압도해버린다! 연약한 미소, 불분명한 말, 숱한 노력 끝에 얻어낸 지원, 이런 것들이 부질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없다면 핵심이 빠진 것이다.
고통받는 자는 남들의 놀림, 판단, 단죄를 받는 희생자가 되어 어떤 새로운 공격이든 피하려고 스스로를 가둬버린다. 원망, 쓰디쓴 감정, 고독, 수치심, 이 모든 것이 결국에는 매우 단단한 껍질을 분비하고 그 껍질은 끝내 감성을 위축시킨다. "너 자신을 보호해라! 철저히 무장해라!" 이는 상처 받은 심장이 외치는 소리다. (-) 나의 텅 빈 성채 안에서 애틋한 감정에 전혀 물들지 않고 나는 상처와 조롱에 무감각한 채로 남아 있다.
어떤 만남들의 악의와 잔인함을 피하려다보니 나는 스스로 애정이나 위안과 단절된다. 사람을 단죄하고 모욕하는 시선 과잉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다보니 결국 누구를 사랑하는 눈마저 질끈 감아버린다. (-)
(-) 젊은 엄마는 출산의 고통을 기쁘게 잊고, 트로피를 받은 승리자는 몸살과 찰과상이 씻은 듯 사라지지만, 대가도 결실도 없는 고통은 영영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 고통은 우리에게서 자유를 탈취하고 조금씩 앗아가버린다. (-) 에밀 시오랑이 한줄기 빛을 던져준다. "고통은 눈을 뜨게 하고, 고통이 아니었다면 인식하지 못했을 것들을 보도록 도와준다. 그러니 고통은 오직 앎에 쓸모 있을 뿐이며, 앎을 벗어나면 실존을 악화하는 데만 쓸모가 있을 따름이다"라고.
(-)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는 사람에게 모욕을 주어 무엇하겠는가? 피해자를 비난하고, 고통에 스스로 영합하여 내심 그걸 즐긴다고 비아냥하기 전에, (-) 그것이 심연 같은 깊은 절망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지를 확실히 알아봄이 마땅할 것이다. 사람은 고통의 포로인지라 필요한 희망도, 힘도 잃기 쉽다. 그리고 각자 하루하루 더 깊이 가라앉을 수 있다. 이러니 어째서 프리모 레비가 생존을 위해 그토록 분투한 뒤 자살했는지를 여전히 자문해볼 수 있겠다. 또한 전쟁 포로들이 풀려난지 얼마 안 되어 치명적 행동을 범한다는 사실도 보고된다. 틀에 박힌 일과, 일상이라는 함정이 본질―자기가 투쟁하는 이유를 아는 것, 존재 이유를 아는 것―을 지워버릴 수도 있을까? 사람이 너무 싸우다보면 진이 빠져 결국 죽는다는 것, 그걸 이해해야만 할까?
(-) 내 파트너는 즐거워하다가, 큰 행사 때만 자랑스레 신는 구두의 뾰족한 굽을 부러뜨렸다. 구두를 벗어던진 그녀는 더 멋지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축제는 한창 무르익었다. 그곳에 있는 나도 차츰차츰 변해갔다. 각자의 가족에겐 아마도 부끄러운 오점일 이 사람들, 그들이 내게 생 앞에서 한껏 기뻐하는 법을, 남에게 섬세하게 주의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고통은 거기, 두루 퍼져 있었다.
(-) 옆 사람의 몸과 같지 않은 몸은 당혹스럽게 하고 충격을 준다. 시선―그리도 딱딱한―을 받는 시련을 겪으면 사람은 삐딱한 길을 택하게 된다. 군중을 피하게 되고, 앉아만 있게 되고, 움직이지 않게 되고...... 요컨대, 남들에게 등을 보이고 아주 멀리 떨어져 앉아 있으면 나로서는 어떤 장애도 남 앞에 표출하지 않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타인의 시선의 노예가 된 나는 점점 몸에 대해 남과 다를 권리를 부정하게 된다. (-)
타인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은 나를 이루기도 하고 나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 점잖으면서도 욕된 '타인'이라는 말 뒤에 숨은 것은 수많은 얼굴과 미소 들, 있을 수 있는 숱한 관계들이다. 비록 내가 본질적으로는 혼자라 하더라도―나는 혼자 고통받고 혼자 죽는다―, 타인의 존재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따라다닌다.
군중 속에 나 혼자 있을 때, 내 동작 때문에 주변에 웃음이 터질 때, 나는 깨닫는다. 시선이라는 게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타인은 나를 압박한다. 타인의 존재는 무게가 된다. 조롱으로 번득이는 두 눈을 어떻게 바꾸겠는가? 타인이 오직 나의 우스꽝스러운 측면만 보고 내 삶에 덜컥 침범하는 것을 어떻게 너그러이 참아 넘기겠는가? 내가 처음으로 본 두 눈이 나를 엿보고 있으며, 나와 대적하고 있다. 비록 그들이 나를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림자 부분을 드러낸다. (-)
주변인의 체험, 다름을 드러내는 자로 있어야 할 의무, 비정상으로 분류된 자로 살아야 할 의무, 이런 것은 복잡한 문제 제기를 축약한다. 일생 내내 그는 특수성을 받아들이려고 애써야 하며, 특히 그 특수성을 하나의 장점으로 이용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타인의 시선은 부담이 되고, 그 사람을 그야말로 사회적 '결격자'로 만들 위험이 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슬그머니 다름이나 장애가 극복할 수 없는 난관들이 덧붙는다. (-) 알랭 말처럼 누구나 남들이 그린 자신의 초상화와 닮으려고 애쓰는 법이라면, 모두들 "난 키가 작다"라고 소리치는 세상에서 난쟁이는 어떻게 자기가 타인과 같은 모습이라 여길 수 있겠는가?
장애인은 (-) 연민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어린애 취급까지 당한다. 장애로 비틀거리면서 식당에 들어가보라. 부드럽지 못한 동작으로 인해 멍한 모습만 보여도 사람들은 대뜸 반말을 할 것이다. 당신이 어떤 메뉴를 고를지는 동행자에게 물을 것이다. 신중하게 배려한답시고 아마도 그 동행자가 '사회복지' 쪽에서 일한다고 지레짐작하고 참 헌신적이라며, 이렇게 시간 내어 장애인과 동행하는 정성을 칭찬할 것이다.
(-) 상처주는 시선에서 놓여나는 것은 실제로 자신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신감은 힘들게 얻어지는 것이며, 집요한 시선 앞에서는 아주 빨리 위축되어버릴 우려가 있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완벽한 금욕주의를 표방해? 창과 방패로 무장하고 그뒤에 숨어버려? 우리와 동류인 장애인들에게 무관심한 채로 살아가? 숨어드는 것이나 도망치는 것은 모욕에 대한 플라시보 처방인데, 차라리 상처를 받으면 치료하면 되지만 이런 건 상처보다 훨씬 심각한 아픔을 준다. 그래서 앞에서도 말했지만, 조롱을 피하는 자는 스스로 고립되어버리며, 얼마 안 가 애정 어린 미소도 누리지 못하고, 안으려고 활짝 벌린 두 팔에 안기지도 못하게 된다. 여기서도 문제를 기적처럼 풀어주는 해결책이나 치료약은 전혀 없다. 전투는 계속 끝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날마다 나는 너무 성급한 판단에 맞닥뜨려야 하고, 나라는 존재를 새삼 문제삼아야 한다. 26년의 경력을 쌓은 후에도 나는 상처주는 시선에 익숙해지지 않았고, 내 쪽에서 그들에 대해 무관심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해결을 하지도 못했다.
(-) 릴케는 <젊은 친구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낌없이 풍성한 격려를 보내고 나서 놀랍도록 심오하게 이런 고백을 한다. "당신을 위로해주려는 사람이 가끔씩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단순하고 차분한 말들 속에서 별 노력 없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그의 삶에도 숱한 고통과 슬픔이 있어 그 친구도 그런 고통과 슬픔 속에 내팽개쳐져 있다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결코 그런 위로의 말들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오." (-) 즉 고통받는 사람은 자기에게 힘을 주는 친구가 내심으로는 자기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그 말을 믿도록 노력해야 한다. 신기한 믿음. 신중함과 믿음으로 작동하는 신기한 요구.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무게와 풍요로움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신기한 요구.
일상에서 감당하는 상처로부터 나타나는 싸움과 기쁨은 끊임없이 외친다. 다시 시작하라고, 노력을 계속하라고, 다시 행진하라고, 허약함 위에 뭔가 쌓아올리라고. 거듭거듭. 사람들은 그 상처가 극복되길 바란다. 사람들은 서두르고 싶고 어서 페이지를 넘겨 다음 장으로 가고 싶다. 그러나 상처는 다시 나타나 실존을 꿰뚫는다. (-)
(-) 인간이라는 직업, 심각한 주제, 때로 엄중한 이 주제는 그러므로 지속적인 참여를, 세상에 새로운 시선을 던지고자 하는 경쾌함을 요구한다. (-) 샹포르의 다음과 같은 격언(-) "모든 날 중에 가장 망한 날은 웃지 않은 날이다." 여기서 웃음이란 기쁨과 함께, 낙담에 대적하는 무기가 된다. 웃음은 조롱과는 달라서, 모든 것을 모으고, 합치고, 좀더 강하게 만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