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회귀의 신화 신화 종교 상징 총서 5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심재중 옮김 / 이학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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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불행”과 “역사”


고통의 “당연성”


(-)

전통적인 문화 속의 인간에게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것은 초인간적인 모델에 따라 사는 것이고, 원형들과 일치되게 사는 것이다. (-)

그러한 실존의 테두리 안에서, “고통”과 “괴로움”이란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마치 혹독한 기후처럼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에 “감내”할 수밖에 없는 무의미한 경험은 결코 아니었다. 고통의 성격이나 그 표면적인 원인이야 어떠하든, 인간의 고통에는 의미가 있었다. 항상 원형과 부합하지는 않더라도, 인간의 고통은 의심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어떤 질서와 부합하는 것이었다. 고대의 지중해적인 모럴과 비교하여 기독교의 가장 큰 장점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부정적인 상태의 고통을 “긍정적”이고 영적인 내용의 경험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고통이 지닌 구원의 능력 때문에 기독교가 고통에 가치를 부여했고 나아가 고통을 추구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주장은 옳다. 그러나 고통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또 영적 향상과 정화의 수단이라는 의미를 고통에 부여하지도 않았지만(드문 예외는 있었다), 기독교 이전의 인류도 고통을 무의미한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사건으로서의 고통, 역사적인 사실로서의 고통이고, 우주적인 재앙(가뭄, 홍수, 폭풍 등)이나 침략(방화, 노예신세, 굴욕), 사회적인 불의 따위로 인해 생겨나는 고통이다.

그런 고통들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고통들이 터무니없거나 공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판이 가뭄으로 황폐해지고, 가축들이 질병으로 죽어가고, 자식이 아프고, 열병에 걸리고, 사냥 운이 없어서 매번 허탕을 치거나 하면, 원시인은 그 모든 일들이 우연이 아니라 어떤 악마적이거나 주술적인 힘 때문에 생겨나며 그 힘에 맞설 수 있는 무기가 사제나 주술사에게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우주적인 재앙이 닥쳤을 경우엔 공동체 전체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그도 주술사를 찾아가 주술의 효력을 없애 달라고 청하거나 사제에게 찾아가 신의 호의를 빌어달라고 청한다. 주술사나 사제가 관여했는데도 아무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당사자들은 그동안 거의 잊고 지내 왔던 지고한 존재를 다시 생각해내고 그에게 희생 제물을 바쳐서 기도한다.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의 셀크만Selkman 유목민들은 “높은 곳에 계신 그대, 내 아이를 빼앗아가지 마소서. 아직 너무 어립니다”라고 빌고, 호텐토트족Hottentots은 “오, 츠니-고암Tsuni-goam이여, 제게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은 당신만이 압니다”라고 탄원한다. 폭풍이 몰아칠 때면 세망Semang 피그미족은 대나무 칼로 장딴지를 긁어 피를 사방에 뿌리며, “타 페든Ta pedn이여, 저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 잘못의 대가를 치르오니, 제발 받아주소서!”라고 소리친다. 『종교사 개론』에서 이미 자세하게 밝힌 바 있지만, 이참에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사실이 있다. 소위 원시민족의 종교 의식에서 천상의 지고한 존재들은 언제나 최후의 수단으로만 간주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원시민족들은 “고통”(가뭄, 폭우, 재난, 질병 등)을 쫓기 위해 우선 신들과 악령들, 주술사들에게 청원해보고, 그 청원들이 실패했을 때에만 지고한 존재를 찾는다. 그 경우에, 세망 피그미족은 자기들이 범했다고 생각되는 과오들을 고백하는데, 과오의 고백은 다른 곳에서도 간혹 발견되는 관행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과오의 고백은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에 항상 따라다닌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종교-주술적인 처치의 모든 계기들은 고통의 의미를 아주 명료하게 보여준다. 즉 고통은 적의 주술적인 영향, 금기 위반, 지나가선 안 될 불길한 장소를 지나가는 것, 신의 분노, 그리고―다른 모든 가정들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에는―지고한 존재의 의지나 분노에서 비롯된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원시인에게―(-)원시인만 그런 것은 아니다―아무 까닭 없는 “고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은 개인적인 과오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종교적인 과오임이 분명한 경우) 이웃의 악의 때문에 생겨날 수도 있지만(주술사에 의해 주술의 영향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경우), 언제나 그 바탕에는 과오가 놓여 있다. 과오가 아니라면 최소한 어떤 원인, 결국에 가서는 인간이 호소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자 잊고 있었던 대상인 <지고신>의 의지 속에서 확인되는 어떤 원인이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고통”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고 그럼으로써 감내할 만한 것이 된다. 원시인은 가능한 모든 종교-주술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그 “고통”과 맞서 싸운다―그러나 고통이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는 그 고통을 견뎌낼 수 있다. “고통”의 가장 결정적인 계기를 이루는 것은 고통의 난데없는 출현이다. 그 원인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때에만 고통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이나 가축들이 죽고, 가뭄이 계속되고, 폭우가 심해지고, 사냥거리가 사라지고 하는 일들의 원인이 주술사나 사제에 의해 일단 밝혀지기만 하면, “고통”은 견딜 만한 것이 된다. 고통에 원인과 의미가 있고, 따라서 고통도 이제 하나의 체계 속에 끌어들여져 설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인도인들은 일찍이 카르마Karma라는 보편적인 인과율의 관념을 생각해냈다. 카르마는 개인이 겪는 현재의 사건들과 고통을 해명해주면서 동시에 윤회의 필연성도 설명해준다. 카르마의 법칙에 비추어볼 때, 고통은 단지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가치마저 획득한다. 현재의 삶에서 겪는 고통은 받아 마땅한 것이지만―사실상 고통은 전생에서 행한 과오와 죄악의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동시에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각 개인을 짓누르면서 장차 그 개인이 겪게 될 삶의 순환을 결정짓는 카르마의 빚을 부분적으로 줄이거나 청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인도인들의 관념에 의하면, 인간은 빚을 지고 태어나지만 또한 새로운 빚을 질 자유도 동시에 지니고 태어난다. 인간의 삶은 차용과 지불의 기나긴 연속이다. 그리고 그 셈이 항상 분명한 건 아니다. 지능이 완전히 결핍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자신에게 가해지는 불의와 타격, 고통과 괴로움 등을 침착하게 견디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고통들 하나하나가 전생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던 카르마의 방정식을 풀고 있기 때문이다. (-) 다른 모든 인도의 해탈 방법들이 그렇듯이, 불교 역시 단 한순간도 고통의 “당연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베단타Vedanta의 관점에서도 고통은 <우주> 전체가 “덧없는” 한에서만 덧없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스러운 경험도 <우주>도 존재론적인 의미의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

(-) 거의 모든 곳에서 발견되는 고대적인 관념에 의하면, (-) 어쨌든 모든 고통은 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수확을 망치는 일, 가뭄, 적에 의한 도시의 약탈, 자유의 상실이나 죽음, 온갖 종류의 재난(전염병, 지진 등) 등등 초월적인 존재나 신의 섭리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설명되지 않거나 정당화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패배한 도시의 신이 승리한 군대의 신보다 덜 강했다든지, 공동체 전체나 한 집안이 어떤 신에게 의례상의 과오를 범했다든지, (-) 아무튼 개인이나 집단의 고통에는 항상 어떤 설명이 주어진다. 결과적으로 고통은 견딜 만하고, 견딜 만해진다. 

나아가 지중해-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사람들은 일찍부터 인간의 고통을 신의 고통과 관련지어 생각하였다. (-) 탐무즈의 고통과 죽음, 부활에 관한 아주 오래된 신화는 고대 동방 세계의 거의 전역에 걸쳐 복제와 모방을 낳았고, 기독교 이후의 그노시스파에까지 그 시나리오의 흔적들을 남겼다. (-) 탐무즈(혹은 어떤 다른 농경-우주신)의 고통과 죽음, 부활을 기리는 민중들의 애도와 환희는 고대 동방인의 의식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이점을 생각해보면 그러한 반향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죽음 다음의 부활에 대한 예감도 예감이었지만, 각각의 개인에게는 탐무즈의 고통이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고통도 탐무즈의 드라마를 떠올리면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신화의 드라마는 고통이 결코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죽음에는 항상 부활이 뒤따른다는 것, 모든 패배는 최후의 승리에 의해 백지화되고 극복된다는 것을 인간에게 상기시켜주었던 것이다. (-) 여기서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탐무즈가(-) “정의로운 자”의 고통을 정당화해준다는 사실, 달리 말하면 고통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이다. 신―무한히 “의롭고” “순수한” 존재인―은 아무 죄 없이 고통을 당했다. 신은 굴욕을 당하고, 피가 나도록 맞고, “우물” 속에, 즉 <지옥>에 갇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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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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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이 대박적인 책이 품절이라니??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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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론 - 인간과 종교, 제사, 축제, 전쟁에 대한 성찰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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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폭력에 호소해서 질서를 회복시킨다. 그러나 내게 신적 내밀성을 열어준 것은 복수가 아니라 죄악이다.`(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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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의 집 사람들 -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는 정신장애인들의 희망공동체
베델의 집 사람들 지음, 송태욱 옮김 / 궁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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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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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직업 - 고통에 대한 숙고
알렉상드르 졸리앵 지음, 임희근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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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시륄니크는 (-) 자기 책에서 피에르 페예레젠을 인용한다. "아이, 여자, 외국인, 흑인 들, 이렇게 타인들 때문에 고통받아야 했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신경쓰는 노력 없이 인성을 발달시킨 사람들에 비해 더 나은 관찰자가 된다." 



파스칼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이어, 모든 인간의 행위에는 행복을 찾으려는 의지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따귀 뒤에도, 쓰다듬는 손길 뒤에도 숨어 있는 행복에 대한 의지는 모든 인간을 움직이고 모든 행동의 목표가 된다. 목을 매달려는 사람조차도 하나의 '시도'를 하는 것이다...... 그는 고통을 덜 길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존중에 대한 권유다. 나를 멍들게 하는 사람은, 어쩌면 솔직한 심정으로 자기 팔자가 좀 나아질 거라고 믿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설령 그가 다른 길을 택한다 해도, 그 길이 때로 비난받을 만한 길이라 해도, 그는 나와 같은 열망, 즉 행복해지겠다는 열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비정상인이다. 그 말은 다른 사람들이 할 만큼 했다. 나도 그걸 느꼈다. 사람들이 나의 작은 부분 하나하나를 점검할 때 그들의 눈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이의 시선이 내 눈길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좀더 아래쪽으로 내려와, 자기가 찾는 증거가 있는 바로 그곳에 가 닿는다. '이 녀석 장애인이군.' 그 두 눈이 훑어내리는 궤적, 집요한 아킬레스건 찾기, 약점 찾기...... 사람들 대부분이 보는 것은 몸짓의 어색함, 말의 어눌함,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거동 등이다. (-) 경련, 입 비죽거림, 균형 상실, 이런 현상들은 단호하고 가차없는 판단 뒤에 소리 없이 숨어 있다. 발달이 지체된 자가 여기 있는 것이다. 이 첫인상을 바꾸기란 힘들다.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채로, 그렇게 축소된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 건 고통스럽다. (-) 대화는 불가능하다. (-)

 


정상적인 것에 대한 숙고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마침내 열정의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런 숙고를 하다보면 나는 숱한 고통과 상처를 확실히 받게 된다. 처음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 장애인 수용 시설을 벗어나 '정상인'을 보고, 만지고, 느끼고, 알아보려 했다.



발레리는 자기 강연의 서두에서 이 말을 즐겨 반복했다. "여러분 앞에, 저는 모르려고 왔습니다." 고통에 대한 숙고를 시작하는 데 참으로 탁월한 서두가 아닐 수 없다. 자기가 그 주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또 자신의 연설로 미미한 효과라도 자아낼 수 있다고 자부할 사람이 누구겠는가? 고통으로 큰 타격을 받은 몸, 소중한 존재를 잃은 마음, 긴 세월 겪은 고독 앞에서 말이란 부질없는 것일 뿐이다. (-) 당신이나 나 같은 '전향적 인간'이 해답을 하나라도 제시해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사람을 낙담시키고 일그러뜨리고 상처내는 것에 대해 해답의 일면이라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를 움직이는 희망은 각각의 체험, 특히 가장 잔혹한 체험으로부터 유익한 것을 끌어내야 한다는 확신, 그러한 결정적 확신에 정확히 뿌리내리고 있는 것 아니던가?

인간이란 이렇게 생겨먹었다. 날마다 전투를 벌이고, 안 죽고 살아남아, 좀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 발전의 적―아마도 유일한 적―인 절망이 내면을 갉아먹는 고통, 더없이 외딴 방에서나 군중 한복판에서나 똑같이 마수를 뻗쳐가는 고통과 마주칠 때, 이럴 때 얼마나 많은 장애가 숨어서 그를 노리고 있는가? (-)

(-) 그 고통에 정면으로 맞서기란 종종 불가능해 보인다. 고통은 우리가 어떤 수단을 써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며, 일체의 말살 시도에 저항하는 지울 수 없는 어떤 딱지처럼 존속한다.



인간이라는 직업, 각자가 일상에서―종종 자기도 모르게―실천하는 이 숙명적 처세술에는, 따라서 수많은 원천이 필요하다. 삶을 승리로 만들기 위해, 삶의 조건을 감당하기 위해 재능이 지속적으로 펼쳐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내가 극단적일 만큼 취약한 인간임을 고백하고 싶다. 고통에 대해 얘기하는 것, 더 나아가 자기 육체로 그 고통을 직접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라는 직업이 없애지 못하게 금해놓은 무시무시한 시련이다. 하나의 인간성은 바로 그 인간성이 악을 뛰어넘으려 펼치는 거장다운 솜씨에서만 그 정수를 드러낸다.



유일한 확신, 우리가 품고 있고 매일 그 방향으로 서둘러 가고 있는 소멸의 전망, 거기서 출발하는 게 좋을까? 심지어 향유의 한복판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살아 있는 한에는 비극적인 것이 우리를 앞질러 가고 있다. (-) 슬피 우는 어머니에게, 어느 집에나 비극적인 일은 찾아온다고, 누구나 그런 일을 겪게 마련이라고 설명할까? 그런 설명에도 그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며, 그게 맞다. 우리가 마주치는 나쁜 일들은 어떤 일이든 핑계가 없다. 설령 핑계가 있다 치자. 핑계가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일을 좀더 잘 견뎌내는가? 자신이 겪은 나쁜 일이 때로 유용할 수도 있다는 걸 환자가 깨닫는다 치자. 그래도 그건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를 안다고 해서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며, 매 맞는 아이의 상처가 아무는 것도 아니다. 악의 문제는 이론적으로 명확히 밝혀진다 해도 엄연한 실존의 드라마인 것이다.



때로는 반전이 일어난다. 비극적인 것이 우리를 가르친다. (-) 귀는 쫑긋 곤두서야 하고, 의지는 다져야 한다. 그래서 신중한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려야 하고, 가장 기대할 수 없었던 곳에서 희망이 다시 솟아나야 한다. 그러니 이것이 첫번째 도전이다. 즉 삶을 빚어 만드는 것, 모래 위에 삶을 새기는 것이다. 이때 이 작업의 안내자는 가장 비참한 사람들, 즉 일체의 논리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취약한 선구자들, 끊임없이 위협받는 의미를 제시하는 상처받은 선구자들이다. (-)



(-) 그들이 취약한 존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게 보이지만, 그들은 그걸 감추지 않는다. 삶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의 몫이 따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제약을 받고 그 제약에 적응하면서, 그들은 어떤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구축하기 위해 모든 것을 가동한다. 잃을 것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이미 다 잃은 몸이니까! (-) 심각한 건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워낙 모든 게 심각하니까. (-) 이런 확언을 하고 나면 사람은 쓰러지기는커녕, 가벼움 쪽으로 인도된다. (-)

(-) 사람에게 가벼움은 매우 소중한 도구를, 세상을 폭발시킬 수도 있는 전대미문의 힘을 부여한다. 그 가벼움은 천진난만한 사람의 아둔한 낙관주의와는 거리가 멀며, 종종 고독이나 극복된 고통을 아주 건강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 그 기쁨은 만물이 불안정함을 알아차린다. 참 희한한 역설이다. 인도주의적인 일에 동참한 수많은 '선의'들은 비참과 실망만이 예고되던 영역에서 오히려 이 엉뚱한 뜻밖의 기쁨에 몸을 싣는 것이다.

절망의 미묘한 해독제인 가벼움, 그걸 채택한 사람은 (-) 성인이나 현자들을 살리는 것은 고통만이 아님을 이해한다. 가벼워지는 것, 그건 자신의 그림자를 말살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본 뒤에 겸손히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항거와 분노가 기승떠는 곳에서 저항을 긍정하는 것이다. (-) 가볍다는 것은 까칠해지거나 사람을 고립시키는 것에 맞서서 한껏 기쁨에 의지하는 것, 고통받는 이가 자신의 불행 속에 갇혀버리지 않도록 어깨를 쓰다듬어주는 것, 그를 지원하는 것이다. 가벼움은 역행한다. 즉 쪼그라드는 것에 역행하는 것이다.

(-) 가벼움은 격려의 말에 영감을 불어넣고, 사람을 구원하는 유머에 실려 확산되며, 혼란에 맞서 싸우는 사람을 해방하고, 아무리 미미한 발전도 기뻐하며, 곧 같은 처지인 사람의 경멸을 자아내는 원망을 무시한다. 병이, 절망이 자리잡을 때조차도 믿음을 간직하고 자신과 평온한 관계를 유지하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다. 머지않아, 우리는 악과 함께 삶을 통째로 미워하게 된다. (-) 가벼움의 추종자는 삶을 받아들이는 도전, 날마다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도전을 한다. (-)

가벼움은 또한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준다. 이 불길한 위협에 저항하는 힘은 고통받는 자들의 얼굴을 간혹 비추어준다. 그들의 표정을 잘 들여다보면, 거기 담긴 격려를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승리자는 종종 나쁜 편에 있다. 그러면 악이 승리하여 상처받고 슬픈, 폐쇄적이고 까다로운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 심술궂음의 이면에는―파고 들어가보면―거의 언제나 벌어진 상처가 있고, 실패의 좌절이 있다. 불교도들은 이 고통스러운 변증법을 다음과 같이 멋지게 보여주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을 몽둥이로 때릴 때 그 몽둥이는 분명히 당신을 쳤지만 행동의 책임자는 몽둥이가 아닌 것이다. (-) 당신을 공격하는 사람도 이 몽둥이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화를 내고 미워할 만한 대상이 아니다. 상처, 바로 그것이 진짜 죄인이다. 사람을 몽둥이처럼 도구화하는 상처, 지금 말한 우화의 메시지는 고통에도 놀랍도록 적용되며, 다시금 관용하라는 권유가 된다.


사람들이 인지하는 것은 타인이 겪은 번민의 편린들, 환자의 고통일 뿐이다. 사람들은 당장 지금 여기 있는 것만을 느낀다. 기쁨과 행복이 쉽게 여럿이 나눌 수 있는 것이라면 고통은 혐오감을 주고, 수치스럽고, 사람을 고립시킨다. 그러곤 거기에 고문이 또하나 덧붙는다. 남들의 판단을 받는 것, 이해받지 못하는 것, 너무 버거운 무게를 홀로 짊어지는 것, 그 어느 때보다도 누가 다정히 귀 기울여준다면 고통이 줄어들 것만 같은 그런 시점에 말이다. 고통받는 사람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어려운 연습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곁에 있을 수는 있다. 있으면서 힘이 되어주려고 노력하고, 특히 판단을 삼갈 수 있다. 고통당하는데 누가 있어준다는 것―아무리 있는 듯 없는 듯하더라도―, (-) 눈길 한 번, 미소 한 번, 말 한마디, 이것이 내 몫의 행동이다. 사랑하는 존재가 파멸해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그저 곁에 있어준다는 것, 힘을 주는 몸짓을 찾아내려 애쓴다는 것, 이것은 어려운 과제다. 그러는 동안 절망이 압도해버린다! 연약한 미소, 불분명한 말, 숱한 노력 끝에 얻어낸 지원, 이런 것들이 부질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없다면 핵심이 빠진 것이다.



고통받는 자는 남들의 놀림, 판단, 단죄를 받는 희생자가 되어 어떤 새로운 공격이든 피하려고 스스로를 가둬버린다. 원망, 쓰디쓴 감정, 고독, 수치심, 이 모든 것이 결국에는 매우 단단한 껍질을 분비하고 그 껍질은 끝내 감성을 위축시킨다. "너 자신을 보호해라! 철저히 무장해라!" 이는 상처 받은 심장이 외치는 소리다. (-) 나의 텅 빈 성채 안에서 애틋한 감정에 전혀 물들지 않고 나는 상처와 조롱에 무감각한 채로 남아 있다.

어떤 만남들의 악의와 잔인함을 피하려다보니 나는 스스로 애정이나 위안과 단절된다. 사람을 단죄하고 모욕하는 시선 과잉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다보니 결국 누구를 사랑하는 눈마저 질끈 감아버린다. (-)


(-) 젊은 엄마는 출산의 고통을 기쁘게 잊고, 트로피를 받은 승리자는 몸살과 찰과상이 씻은 듯 사라지지만, 대가도 결실도 없는 고통은 영영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 고통은 우리에게서 자유를 탈취하고 조금씩 앗아가버린다. (-) 에밀 시오랑이 한줄기 빛을 던져준다. "고통은 눈을 뜨게 하고, 고통이 아니었다면 인식하지 못했을 것들을 보도록 도와준다. 그러니 고통은 오직 앎에 쓸모 있을 뿐이며, 앎을 벗어나면 실존을 악화하는 데만 쓸모가 있을 따름이다"라고.

(-)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는 사람에게 모욕을 주어 무엇하겠는가? 피해자를 비난하고, 고통에 스스로 영합하여 내심 그걸 즐긴다고 비아냥하기 전에, (-) 그것이 심연 같은 깊은 절망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지를 확실히 알아봄이 마땅할 것이다. 사람은 고통의 포로인지라 필요한 희망도, 힘도 잃기 쉽다. 그리고 각자 하루하루 더 깊이 가라앉을 수 있다. 이러니 어째서 프리모 레비가 생존을 위해 그토록 분투한 뒤 자살했는지를 여전히 자문해볼 수 있겠다. 또한 전쟁 포로들이 풀려난지 얼마 안 되어 치명적 행동을 범한다는 사실도 보고된다. 틀에 박힌 일과, 일상이라는 함정이 본질―자기가 투쟁하는 이유를 아는 것, 존재 이유를 아는 것―을 지워버릴 수도 있을까? 사람이 너무 싸우다보면 진이 빠져 결국 죽는다는 것, 그걸 이해해야만 할까?



(-) 내 파트너는 즐거워하다가, 큰 행사 때만 자랑스레 신는 구두의 뾰족한 굽을 부러뜨렸다. 구두를 벗어던진 그녀는 더 멋지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축제는 한창 무르익었다. 그곳에 있는 나도 차츰차츰 변해갔다. 각자의 가족에겐 아마도 부끄러운 오점일 이 사람들, 그들이 내게 생 앞에서 한껏 기뻐하는 법을, 남에게 섬세하게 주의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고통은 거기, 두루 퍼져 있었다.



(-) 옆 사람의 몸과 같지 않은 몸은 당혹스럽게 하고 충격을 준다. 시선―그리도 딱딱한―을 받는 시련을 겪으면 사람은 삐딱한 길을 택하게 된다. 군중을 피하게 되고, 앉아만 있게 되고, 움직이지 않게 되고...... 요컨대, 남들에게 등을 보이고 아주 멀리 떨어져 앉아 있으면 나로서는 어떤 장애도 남 앞에 표출하지 않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타인의 시선의 노예가 된 나는 점점 몸에 대해 남과 다를 권리를 부정하게 된다. (-)



타인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은 나를 이루기도 하고 나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 점잖으면서도 욕된 '타인'이라는 말 뒤에 숨은 것은 수많은 얼굴과 미소 들, 있을 수 있는 숱한 관계들이다. 비록 내가 본질적으로는 혼자라 하더라도―나는 혼자 고통받고 혼자 죽는다―, 타인의 존재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따라다닌다.



군중 속에 나 혼자 있을 때, 내 동작 때문에 주변에 웃음이 터질 때, 나는 깨닫는다. 시선이라는 게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타인은 나를 압박한다. 타인의 존재는 무게가 된다. 조롱으로 번득이는 두 눈을 어떻게 바꾸겠는가? 타인이 오직 나의 우스꽝스러운 측면만 보고 내 삶에 덜컥 침범하는 것을 어떻게 너그러이 참아 넘기겠는가? 내가 처음으로 본 두 눈이 나를 엿보고 있으며, 나와 대적하고 있다. 비록 그들이 나를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림자 부분을 드러낸다. (-)

주변인의 체험, 다름을 드러내는 자로 있어야 할 의무, 비정상으로 분류된 자로 살아야 할 의무, 이런 것은 복잡한 문제 제기를 축약한다. 일생 내내 그는 특수성을 받아들이려고 애써야 하며, 특히 그 특수성을 하나의 장점으로 이용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타인의 시선은 부담이 되고, 그 사람을 그야말로 사회적 '결격자'로 만들 위험이 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슬그머니 다름이나 장애가 극복할 수 없는 난관들이 덧붙는다. (-) 알랭 말처럼 누구나 남들이 그린 자신의 초상화와 닮으려고 애쓰는 법이라면, 모두들 "난 키가 작다"라고 소리치는 세상에서 난쟁이는 어떻게 자기가 타인과 같은 모습이라 여길 수 있겠는가?


장애인은 (-) 연민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어린애 취급까지 당한다. 장애로 비틀거리면서 식당에 들어가보라. 부드럽지 못한 동작으로 인해 멍한 모습만 보여도 사람들은 대뜸 반말을 할 것이다. 당신이 어떤 메뉴를 고를지는 동행자에게 물을 것이다. 신중하게 배려한답시고 아마도 그 동행자가 '사회복지' 쪽에서 일한다고 지레짐작하고 참 헌신적이라며, 이렇게 시간 내어 장애인과 동행하는 정성을 칭찬할 것이다.



(-) 상처주는 시선에서 놓여나는 것은 실제로 자신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신감은 힘들게 얻어지는 것이며, 집요한 시선 앞에서는 아주 빨리 위축되어버릴 우려가 있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완벽한 금욕주의를 표방해? 창과 방패로 무장하고 그뒤에 숨어버려? 우리와 동류인 장애인들에게 무관심한 채로 살아가? 숨어드는 것이나 도망치는 것은 모욕에 대한 플라시보 처방인데, 차라리 상처를 받으면 치료하면 되지만 이런 건 상처보다 훨씬 심각한 아픔을 준다. 그래서 앞에서도 말했지만, 조롱을 피하는 자는 스스로 고립되어버리며, 얼마 안 가 애정 어린 미소도 누리지 못하고, 안으려고 활짝 벌린 두 팔에 안기지도 못하게 된다. 여기서도 문제를 기적처럼 풀어주는 해결책이나 치료약은 전혀 없다. 전투는 계속 끝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날마다 나는 너무 성급한 판단에 맞닥뜨려야 하고, 나라는 존재를 새삼 문제삼아야 한다. 26년의 경력을 쌓은 후에도 나는 상처주는 시선에 익숙해지지 않았고, 내 쪽에서 그들에 대해 무관심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해결을 하지도 못했다.

(-) 릴케는 <젊은 친구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낌없이 풍성한 격려를 보내고 나서 놀랍도록 심오하게 이런 고백을 한다. "당신을 위로해주려는 사람이 가끔씩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단순하고 차분한 말들 속에서 별 노력 없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그의 삶에도 숱한 고통과 슬픔이 있어 그 친구도 그런 고통과 슬픔 속에 내팽개쳐져 있다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결코 그런 위로의 말들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오." (-) 즉 고통받는 사람은 자기에게 힘을 주는 친구가 내심으로는 자기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그 말을 믿도록 노력해야 한다. 신기한 믿음. 신중함과 믿음으로 작동하는 신기한 요구.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무게와 풍요로움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신기한 요구.



일상에서 감당하는 상처로부터 나타나는 싸움과 기쁨은 끊임없이 외친다. 다시 시작하라고, 노력을 계속하라고, 다시 행진하라고, 허약함 위에 뭔가 쌓아올리라고. 거듭거듭. 사람들은 그 상처가 극복되길 바란다. 사람들은 서두르고 싶고 어서 페이지를 넘겨 다음 장으로 가고 싶다. 그러나 상처는 다시 나타나 실존을 꿰뚫는다. (-)



(-) 인간이라는 직업, 심각한 주제, 때로 엄중한 이 주제는 그러므로 지속적인 참여를, 세상에 새로운 시선을 던지고자 하는 경쾌함을 요구한다. (-) 샹포르의 다음과 같은 격언(-) "모든 날 중에 가장 망한 날은 웃지 않은 날이다." 여기서 웃음이란 기쁨과 함께, 낙담에 대적하는 무기가 된다. 웃음은 조롱과는 달라서, 모든 것을 모으고, 합치고, 좀더 강하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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