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속죄의 저편 - 정복당한 사람의 극복을 위한 시도
장 아메리 지음, 안미현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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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에는 "Rien n'arrive ni comme on l'espère, ni comme on le craint"라는 구절이 있다.* 실제로는 어떤 것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어나지 않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로 일어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건이 '상상력을 능가하기' 때문이 아니라(그것은 양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이지 상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

​*원래 알퐁스 카(Alphonse Karr)의 말을 프루스트가 인용한 것이다.

 

하나의 사건이 우리에게 최고조로 도전해 오는 곳에서는 평범함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지점에는 어떤 추상성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현실에 근접하기만 하는 상상력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누군가를 매단 채 달린다면 그것을 신문에서 읽을 때만, 그리고 우리가 전단지를 포장하는 동안에는 이성적으로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됐지?'라고 말할 때만 당연하다. 어느 날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는 다르고, 족쇄의 압력은 미리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길은 낯설고, 게슈타포 숙소의 문 앞을 이전에도 무수히 지나다녔을지라도 수감자로 그 문지방을 넘으면 다른 모습과 다른 장식과 다른 마름돌을 가진다. 우리가 현실에 내던져지고 현실의 빛이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들고 골수까지 파고 들면 모든 것은 저절로 이해되고, 또 그 어떤 것도 자명하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상적인 삶'이라고 부른 것은 미리 취한 상상 속이나 유치한 진술 속에서나 펼쳐질 수 있다. (-)

 

(-)실제로 본래의 고문과 함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단순 구차는 일반인에게까지 파급되는 메아리를 남기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고통을 당해야 하는 사람에게 그 경험은 깊이 각인된다. 소모적인 대단한 말 대신 짧게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끔찍함에 대한 경험이다. 첫 번째 구타는 수감자에게 자신이 무력함을 깨닫게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나중에 닥칠 모든 일의 싹을 이미 인식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을 테고, 물론 그같은 앎이 생명의 빛깔을 가졌을 리 없겠지만, 이 첫 번째 구타에서 감방에서의 고문과 죽음을 이미 실제적인 가능성으로, 말하자면 확실한 사실로 예상하게 된다. 사람들이 주먹으로 내 얼굴을 가격한다면, 둔중한 놀라움 가운데 내가 희생제물임을 깨닫고, 마찬가지로 둔중하지만 확실하게 그 사람들이 내게 자기들이 원하는 짓을 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바깥에서는 아무도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 누구도 나를 위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아내든, 어머니든, 형제든, 친구든, 도와주려고 하는 어느 누구도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구타를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 첫 번째 구타와 더불어 수감자는 인간의 존엄을 상실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술하는 바가 별로 없다. 나는 인간의 존엄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함을 고백해야 한다. 날마다 목욕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을 인간의 존엄을 상실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관공서에서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말해야 할 때, 존엄성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 그래서 나는 경찰관들에게 구타당한 사람이 인간의 존엄을 상실한 것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에게 가해진 첫 번째 구타와 더불어 우리가 세상에 대한 신뢰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것을 이미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다른 사람이 명문화된 혹은 명문화되지 않은 사회적 계약을 바탕으로 나를 보호해 주리라는 믿음, 그 사람이 나의 신체적 상황과 더불어 나의 형이상학적 상황도 존중한다는 확신을 말한다. 내 몸의 경계는 내 자아의 경계이기도 하다. 피부는 외부 세계에 대해 나를 보호한다. 내가 신뢰를 가지려면 내 피부의 표면에서 내가 느끼고자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첫 번째 구타와 함께 세상에 대한 이 같은 신뢰가 무너진다. 내가 세상에서 신체적으로는 반대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 첫 번째 구타로 내게 자신의 육체성을 강요한다. 그는 내게 접촉함으로써 나를 파멸시킨다. 그것은 강간, 곧 두 당사자 중 한 사람의 동의가 없는 성행위와 같은 것이다. 성공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 내 편에서 정당방위를 시도할 것이고, 나 자신의 육체성을 객관화할 것이며, 나의 지속적인 존재를 위해 신뢰를 다시 회복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이 우리의 신체를 제압하는 것은 결국 완전히 실존적인 절멸 행위가 된다.

도움에 대한 기대, 도움에 대한 신념은 실제로 인간이나 동물의 근본적인 경험에 속한다. 자연에서의 상호간의 도움에 대해 말했던 나이든 크로포트킨과 근대 동물행동 연구가인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는 이에 대해 설득력 있는 주장을 내놓았다. 도움에 대한 기대는 심리적인 구성요소인 동시에 존재를 위한 투쟁이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아이에게 어머니는 "잠시만 기다려, 금방 따뜻한 우유를 줄게, 네가 그렇게 아프게 두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당신에게 약을 처방할 것이고, 그 약은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라고 의사는 환자를 안심시킨다. 전장에서조차 적십자의 앰뷸런스는 부상자를 향한 길을 찾아낸다. 삶의 거의 모든 상황에서 신체적 훼손에는 도움에 대한 기대가 뒤따른다. 신체적 훼손은 도움에 대한 기대로 균형을 잡는다. 그러나 경찰 주먹에 의한 최초의 일격에 대해서는 그 어떤 방어도 있을 수 없고, 어떤 도움의 손길도 막아줄 수 없으며, 그로써 우리 삶의 일부를 끝내고, 결코 다시는 일깨울 수 없게 된다.

 

 

여기서 내게 가해진 고통에 대해 기술하려는 것은 생각 없는 짓이다. 그것은 "내 어깨를 불에 달구어진 쇠로 지지는 것 같다" 혹은 그것은 "나의 뒤통수에 가해진 둔탁한 나무 몽둥이 같다"라고 할까? 이 같은 비유적 이미지는 다른 사람에게는 어울릴 수 있고, 결국 우리는 비유어의 절망적인 회전목마 속에서 차례로 웃음거리가 된다. 고통은 고통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감정의 질은 비교할 수도, 기술할 수도 없다. 그것은 언어를 통한 전달 능력의 한계를 나타낼 뿐이다. 자신의 신체적 고통을 전달하려 하는 사람은 그것을 가해보고, 스스로 고문 집행자가 되어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육체화는 고문에서 완벽해진다.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폭력에 내맡겨진,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어떤 정당방위의 가능성도 없이 고문을 당하는 사람은 오로지 육체일 뿐,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

 

 

바타유는 사디즘을 성 병리학적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실존심리학적으로 파악하는데, 이때는 다른 것의 과격한 부정인 동시에 사회 원칙과 현실 원칙의 부정으로 나타난다. 고문과 파괴, 죽음이 승리하는 세계가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사디스트는 세계의 존속에 대해 개의치 않는다. 정반대로 그는 세계를 지양하려 하며, 매우 특정한 의미에서 '지옥'인 이웃 사람을 부정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의 전체적인 주권을 현실화하려 한다. (-)가해자이자 살인자는 고문을 받는 사람과는 달리 그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은 채 자신의 파괴적인 육체성을 실현한다. 그는 적절한 때에 고문을 행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의 외침과 단말마는 그의 손에 달려 있고, 그는 육체와 정신, 삶과 죽음의 주인이다. 그 같은 방식으로 고문은 사회계(sozialwelt)를 전체적으로 뒤엎는다. 이웃에게 생명을 보장할 때만 우리는 그 사회 속에서 살 수 있고, 우리 자아의 확산 욕구를 억제하고, 이웃의 고통을 완화할 수 있다. (-)

 

 

그것은 일단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지나가지 않았다. 나는 22년이 지난 후에도 탈구된 팔로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헐떡거리면서 나 자신을 비난한다. 거기에는 '억압'(Verdrängen)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화상의 자국을 제거할 수 있는가? 성형외과 의사에게 흉터를 제거하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이식된 피부는 그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는 피부는 아니다.

우리는 저항력의 가능성이나 한계에 대한 질문을 떨쳐낼 수 없듯이 고문을 떨쳐내지 못한다. (-)

 

 

고문을 이겨내고 그 고통이 조금 완화되는(그것이 나중에 다시 극심해지기 전에) 시간에는, 말하자면 일시적인 평화가 깃드는데, 그것은 사고를 가능하게 해준다. 고문당한 사람은 한편으로는 자기가 오로지 육신이란 것, 그것으로 자기가 모든 정치적 관심사에서 자유롭다는 것에 만족한다. (-) '말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함으로써 나는 완전히 이루어냈어. 너희는 너희 자신과 세상과 나의 사라짐을 어떻게 대할지 스스로 보고 있겠지.'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과 고문에서 드러났던 육체성의 허망함, 몸에서 일어났던 엄청난 혼란의 종식과 함께 공허한 안정성을 되찾은 것이 만족과 위로를 주기도 한다. (-)

 

그 생각이란 엄청난 놀라움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이겨냈다는, 그 엄청난 소동이 곧바로 신체의 폭발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묶인 손으로 쓰다듬을 수 있는 이마가 여전히 있다는, 떴다 감았다 하는 눈과 지금 거울을 들여다보면 낯익은 선을 보여줄 입이 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다. 어떻게? 스스로에게 묻는다. 단순한 치통 때문에 가족에게 화를 냈던 사람이 탈구된 팔로 매달릴 수 있고 그러고도 계속해서 살 수 있을까? 담뱃불에 손가락을 살짝만 데어도 기분이 나빠졌던 사람이 여기서는 황소 채찍으로 피부가 터지는 상처를 입고도 이제 고문이 지나가자 거의 느낄 수 없다니? (-)

고문의 경험(-) 그것은 엄청나게 놀라운 인식이고, 이후의 그 어떤 인간적인 의사소통에 의해서도 상쇄될 수 없는 세계에서의 낯설음에 대한 경험이다. 고문당한 사람은 이 세계에 절대적인 지배자로서의 타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거기서 지배란 고통을 가하고 파멸시키는 권리로 드러난다는 것을 경악과 함께 경험한다. 자신의 제물에 대한 고문 담당관의 지배권은 사회적 계약의 바탕 위에서 행해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배력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그것은 보행자에 대한 교통경찰관의 지배력, 납세자에 대한 세관원의 지배력, 소위에 대한 대위의 지배력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명령하는 과거의 수장이나 왕의 세속적인 권위도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신뢰의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왕은 화가 나면 포악해질 수 있지만, 온화할 때는 선량할 수도 있다. 그의 권력은 통치의 일종이다. 그 밑에서 고문당하는 사람이 신음해야 하는 가학자의 권력은 세상에서 고통과 죽음으로 내쫓긴 사람에 대한 살아남은 자의 무제한적인 승리와 다르지 않다. 

고문 속에서 스스로를 주장하는 다른 사람의 실존에 대한 놀라움, 인간이 스스로 될 수 있는 것에 대한 놀라움, 곧 육신과 죽음에 대한 놀라움, 고문당한 사람은 취향에 따라 영혼 혹은 정신이라 부르든, 아니면 의식, 혹은 자아 정체성이라 부르든 간에 어깨관절이 일그러지고 부수어지면 모든 것이 파괴된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을 다시는 잊지 않는다. 생명은 부수어지기 쉽다는 것, 이 자명한 진리를 그는 여전히 알고 있고, 셰익스피어가 "단지 바늘 하나로"라고 말한 것처럼 끝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을 그렇게 육체화하고 그렇게 해서 삶에서 반쯤 죽음의 약탈물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는 고문을 통해 그런 사실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고문에 시달렸던 사람은 이 세상을 더 이상 고향처럼 느낄 수 없다. 절멸의 수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부분적으로는 첫 번째 구타에서, 그러나 전체 범위에서는 결국 고문 속에서 무너진 세계에 관한 신뢰는 다시 얻어지지 않는다. 이웃을 적대자로 경험했다는 것은 고문당한 사람 속에 경악으로 굳어진 채 남아 있다. 그 누구도 그것을 넘어 희망의 원칙이 지배하는 세계를 바라볼 수 없다. 고문당한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공포에 내맡겨진다. 그 공포는 계속해서 그 사람 위에 왕홀(王笏)처럼 흔들린다. 그런 다음에는 사람들이 원한이라고 부르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끝끝내 남아 있고, 거품을 내면서 스스로를 정화하는 복수욕으로 굳어질 기회를 갖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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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하는 어른 - 김지은 평론집
김지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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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쓰는 건 단 한 사람이 될지 모르는 사람을 설득하는 작업이다. 한 사람이라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설득할 수 있는 고리는 무엇으로 찾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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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빛깔 무지개 - 본격 LGBT 휴먼 사이언스 로맨틱 다큐멘터리
임근준 외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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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빈님 편 팟캐스트를 반복해서 들었는데 같이 출연한 남자분이 식이어서... 내용도 좋았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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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에서 인류애로 - 성적 지향과 헌법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강동혁 옮김, 게이법조회 해제 / 뿌리와이파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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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1고 싶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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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진스키 영혼의 절규
바슬라프 니진스키 지음, 이덕희 옮김 / 푸른숲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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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건 병사들의 얼굴이지. 그건 전쟁이야." (-)

  (-) '쉬브레타 하우스'의 공연이 있던 날 (-) 그는 연습복을 입고 무대에 나타나서 "여러분에게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고통받는가를, 우리 예술가들이 어떻게 창조하는가를 보여주겠다."라고 말한 뒤 의자 하나를 집어 관중들을 마주하고 앉아 거의 30분 동안 꼼짝도 않고 그들을 응시했다. 관중들은 최면에 걸린 듯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윽고 그는 일어나 흑백의 벨벳 두루마리를 몇 개 집어서 그걸 가지고 방 길이만한 검은 십자가를 만들어 그 자신 살아 있는 십자가로서 두 팔을 벌린 채 십자가 꼭대기 위에 섰다.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전쟁을 춤추겠습니다. 전쟁의 고통과 파괴를, 그로 인한 죽음을, 여러분이 저지하지 않았던 전쟁, 그래서 여러분에게도 역시 책임이 있는 전쟁을."


점심 식사는 아주 좋았다. 살짝 익힌 달걀 두 개와 기름에 튀긴 감자와 콩을 먹었으니까. 나는 콩을 좋아하지만, 그것들은 메마르다. 나는 마른 콩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속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


(-) 죽음은 삶이다. 인간은 신을 위해 죽는다. 신은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필요한 것이다. 육체는 죽지만 정신은 산다. 나는 살고 싶다. 하지만 내 손은 힘이 빠지고 있다. 손이 내게 복종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오랜 시간을 쓰겠다. 신은 내게 나의 삶을 기술하기를 원한다. 그는 나의 삶이 훌륭할 것이라 여긴다. 나는 '훌륭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달리 생각했다. 나는 나의 삶이 훌륭하지 못할까봐 두렵지만 나의 삶이 훌륭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만 나 자신은 사랑받지 못한다. 나는 내일 계속해서 쓰겠다. 신은 내가 쉬기를 바라기 때문에……

 

  (-) 나는 내가 쓰는 모든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기분이 좋다. 나는 신의 자손이지 원숭이의 자손이 아니다. 만약에 내가 느끼지 못한다면 나는 한 마리 원숭이다. 만약에 내가 느낀다면 나는 신이다. (-)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춤을 추겠다. 아내에게 나는 완벽한 가구들이 갖추어진 집을 주고 싶다. 그녀는 내가 곧 죽을까봐 겁이 나서 나의 분신인 어린 사내아이를 갖고 싶어한다. 그녀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건 그녀가 너무 많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육체에 깃들인 감정이지 육체 속의 지성이 아니다. 나는 육신이다. 나는 감정이다. 나는 육신과 감정 속의 신이다. 나는 인간이지 신이 아니다. 나는 단순하다. 사람들은 나를 생각해선 안 된다. 그들은 나를 느끼고 느낌을 통해서 나를 이해해야 한다. (-)


 (-) 나는 조용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삶을 사랑한다. 나는 삶을 원한다. 나는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바란다. 나는 신뢰받기를 바란다. (-) 나는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도록 하고 싶다. 나는 살인을 원치 않는다. 나는 아내에게 내 노트를 읽는 자는 누구라도 쏘아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에 내가 총을 쏜다면 나는 흐느껴 울 것이다.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 나는 인간들을 사랑한다.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내가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앓고 있지 않다. (-) 신은 아내가 나를 버리기를 바란다. (-) 나는 그녀가 내 곁에 남기를 기도하겠다. (-) 나는 그들이 나를 감옥에 집어넣기를 바란다고 생각한다. 나는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울고 있다. 나는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감옥에서 살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리볼버 권총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 나는 그녀를 울게 하려고 그녀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나는 눈물을 좋아하니까 말이다. 나는 슬픔 때문에 쏟아지는 눈물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녀에게 가서 입맞춤을 하겠다. (-) 나는 그녀의 사랑을 원한다. (-) 내 어린 딸은 노래하고 있다. "아, 아, 아, 아."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러나 그 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느낀다. 그 애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모든 것은―아! 아!― 공포가 아니고 기쁨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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