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백은선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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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한 2021년 3월 6일 오후 네시 오십분 서울광장에 있다가 시청역 2호선 건대 방향 전철에 타서 36페이지를 읽으니 피식 웃겨서 두근거리던 심장도 참을 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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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이해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 지음, 박민철 옮김 / 하나의학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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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남은 게살을 마지막 한 점까지 싹싹 해치운 나는 위스키 잔의 얼음을 초조하게 계속 흔들어대고 있었다. 잭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딘지 불안하고 불편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자살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굳은 약속을 했다. 만약 한쪽이 또다시 자살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때는 케이프 코드에 있는 잭의 별장에서 만나서, 자살 충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일주일을 보내면서 자살을 단념시키도록 상대편을 설득하자는 맹세였다. 자살 충동은 리튬 복용을 중단한 탓일 테니(-) 왜 다시 리튬을 복용해야 하는지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이유를 들려주자고 했다. (-)

(-)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런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껏 우울증이 재발할 때마다 엄습했던 자살 충동과 싸우면서, 수화기를 들어 친구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

하지만 디저트로 수플레가 나왔을 즈음에는 잭도 나도 그 계획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자기기만은 조증 상태에 있는 조울병 환자 특유의 설득력 넘치는 자신감과 증폭된 에너지와 열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잭은 나에게, 나는 잭에게 전화를 걸 것이고, 우리는 힘을 합쳐서 체스판에서 '흑기사'를 물리치고 내쫓아버릴 것이라고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 잭은 벌써 몇 해 전에 결혼을 했고, 나는 워싱턴으로 이사를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잭이 머리에 총을 쐈어요, 그의 가족이 말해주었다. 그가 자살했다고.


(-) 자살은 20년도 넘은 내 직업상의 관심 분야였으며,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개인적인 관심사였다. 괴로웠던 나의 경험을 통해 자살이 얼마나 인간을 무력화하고, 지배하고, 속이고, 황폐화시키며, 파괴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런 자살의 위력에 이제 거의 존경심마저 품을 지경이다. (-)



세인트 로렌스 섬의 유트 에스키모들은 누군가가 자살 의사를 세 번 표명하면 친척들이 그의 자살을 도와줘야 했다.



자살의도 척도(자살기도자용)


고립

0. 누군가 옆에 있음

1. 가까이에 또는 보이거나, 말을 걸 수 있는 범위 안에 사람이 있음

2. 가까이에 또는 보이거나, 말을 걸 수 있는 범위 안에 아무도 없음.



달리는 자동차에서 뛰어내리려 한 6세 소녀는 정신병원에 와서 이렇게 설명했다. ‘배가 너무 고파 참을 수가 없어서 사람을 물어뜯어 먹으려고 해요. 전 나쁜 아이니까 죽어야 해요.’



인간의 이해력에는 한계가 있다. 망자가 남긴 마지막 신호나 메시지, 이를 우리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는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봐도 끊어져 버린 목숨을 되살릴 수는 없다. 자살자의 정신세계를 재구성해보고 싶다고 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간접적이고 불충분한 일들뿐이다.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가기란 어려운 일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자살할 좋은 이유가 있다. 바로 이 점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15세였던 한 소년은 자살하기 2년 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오래전... 그는 시 한 편을 썼다

그리고 '촙스'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가 기르던 개의 이름이었고, 그리고

그 개에 대한 이야기만 쓰여 있었기에...


그리고 선생님은 그에게 'A'를 주시고, 

황금별도 주셨다.

어머니는 이를 주방문에 붙여놓고

이모들에게 읽어주었다.


오래전... 그는 또 시 한 편을 썼다.

그리고 '물음표가 붙은 천진함'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의 슬픔의 이름이었고, 그리고

슬픔에 대한 이야기만 쓰여 있었기에...

선생님은 그에게 'A'를 주시고

이상한 얼굴로 그를 한참을 바라보셨다.

어머니는 이 시를 주방문에 붙여놓지 않았다.

어머니에게는 그 시를 절대로 보지 못하게 했기에...


오래전, 새벽 3시에... 그는 또 시를 썼다.

그리고 그 시에 제목은 붙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기에

그는 자신에게 'A'를 주고

축축이 젖은 양 손목을 칼로 그었다.

그리고 그 시를 욕실 문에 붙여놓았다.

주방까지는 갈 기력이 없었기에...



아무리 상실감이나 낙심이 크고, 아무리 수치심이나 소외감이 깊다 하더라도 정신적 고통이나 스트레스만으로는 대부분의 경우 자살의 충분조건이 되지 않는다. 죽음을 결심할지 여부는 보통 사건의 해석으로 좌우되며, 대부분의 사람은 정신적으로만 건강하다면, 어떤 일을 겪더라도, 그 일을 자살의 정당한 이유가 될 정도로 파멸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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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람들
박솔뫼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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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럴수가 묻지도따지지도않고 바로사야한다는 솔뫼작가님의 책이나왓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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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의 기술 - 다큐멘터리스트는 무엇을 발견하고 어떻게 설득하는가
김옥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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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스무 겹의 매트리스 아래 콩 한 알의 질문



어릴 때 읽었던 동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어느 폭풍우 치는 밤, 한 여인이 왕궁의 문을 두드리며 하룻밤 묵어갈 것을 청했다. 그녀는 자신이 공주라고 했지만 왕비는 그 말이 의심쩍어, 매트리스를 스무 겹 쌓고 그 위에 다시 오리털 이불을 스무 겹 쌓은 특별한 침상 위에서 그녀가 자도록 했다. 아침에 일어난 그녀는 무언가가 등에 배겨 한잠도 못 잤다고 불평을 했다. 그제야 왕비는 그녀가 진짜 공주임을 인정한다. 전날 밤 왕비는 그 침상의 맨 아래쪽에 완두콩 한 알을 넣고 그 위에 매트리스와 오리털 이불을 쌓아두었던 것이다. 즉 스무 겹의 오리털 이불과 스무 겹의 매트리스 아래 있는 그 완두콩의 존재를 몸으로 느낀 ‘예민함’이 동화에서는 공주의 자격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자격을 ‘공주’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스트’로 바꾸어 부르고 싶다. 다큐멘터리스트는 천성적으로 혹은 후천적으로 불편함에 예민한 인간들이며, 인간들이어야만 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통상적으로 무시되어온 것들에 대한 예민함이다. 그것은 우리의 타성적인 사고에 대해, 관습화된 인식에 대해, 표피적으로만 소비되는 우리 사회의 온갖 현상에 대해 무심코 지나치지 못하는 ‘문제의식’에서부터 시작한다. 생각하면 의심하게 되고 의심하게 되면 질문하게 된다. 그래서 ‘좋은 다큐멘터리스트는 좋은 회의주의자’인 것이며, 다큐멘터리는 그 자체가 항상 질문이며 질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것은 그 질문을 ‘독백’이 아니라 ‘대화’의 형태로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나’의 질문을 ‘우리’의 질문으로 치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즉 다큐멘터리는 사람과 사물과 행위와 풍경 같은 보이는 것들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감정과 생각과 의미와 가치까지 영상에 담는 일이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배열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그 영상의 흐름에서 어떤 서사와 담론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나아가 그 서사와 담론에 공감하고 동의하게 하는 일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략적 사고와 기술적 고려가 필요하다.


다큐멘터리 연출자들은 ‘전략적’이라는 말에 흔히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낸다. 다큐멘터리는 ‘있는 그대로’ 찍는 것이며 ‘진정성’이 가장 중요한 장르인데, 무슨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만드는 사람이 대상에 대해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저절로 작품에 투영되는 것은 아니다. 보는 이가 그것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져야만 느껴지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만든다’는 것 자체가 만드는 이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의자’를 만들려면 자신이 만들려는 것이 ‘의자’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그것을 어떤 형태로 만들 것인지 의도해야 하며, 자신이 의도하는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 어떤 재료들을 확보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공급해야 하며, 그 재료들을 적소에 배치해 못을 박든 접착제로 붙이든 순차적으로 형태를 만들어내야 한다. 자신의 의도에 가장 근접한 의자를 만들어내려면 이러한 일련의 행위가 그 의도에 기여하도록 해야 하고, 기여하도록 하는 그 사고 과정 자체가 ‘전략적 사고’인 것이다.


 


(-) 다큐멘터리에 입문하는 이들이 알아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것은 ‘사고하는 법’이다. (-)


내가 만들려고 하는 다큐멘터리가 무엇인지, 대상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발견해야 하는지,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왜 그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과연 그 말이 발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 말을 하기 위해 어떤 에피소드와 어떤 이미지가 동원되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한 세계 속에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는 것이다. (-)


(-) 이 책은 (-) 다큐멘터리가 무엇이며, 다큐멘터리의 이야기 구조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자 한다. 다큐멘터리란 장르에 대한 총체적 이해 없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획은 가능하지 않으며, 구조에 대한 이해 없이 ‘이야기 경로’를 생각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무 겹의 요 아래의 콩알

―동화 4



발바닥이 아프다. 왕의 집에선 어디서나

여문 콩알이 흩어져 있어,

잘자려무나 깊은 밤

왕의 소유인 두꺼운 양털구름 스무 장쯤 빌려 깔고 

모든 땅의 돌기들을 무시할 것

왕의 잠으로써

눈떠 있는 콩알들을 지워버리고

내 온몸의 눈 평화롭게 꼭 감을 것


바깥엔 길고 어두운 비가 온다.

새파란 콩알들은 스무 층 아래 있다.


꿈도 없는 잠 속에서

위험하게 흔들리는 구름의 성(城)

콩알들은 스무 층 아래!

콩알들은 스무 층 아래!

스무 충 아래! 새파란 현실은, 새파란 대낮은.


그러나 마디마디 배기고 아파서

소리없이 입을 딱딱 벌리는 어둠

돌아누워도,

떠나가도 떠나가도 모든 흐느끼는 바다 위를 배는 갈 것이었다.

평화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었다.

한 겹의 요 혹은 스무 겹의 요의 배반.

콩알들은 싹이 트고 무섭게 자라기 시작한다.

스무 겹의 요를 뚫고

누워 있는 내 가슴을 뚫고 돛대 끝까지

넝쿨이 감겨 오르고


잘 자려무나 깊은 밤

음험한 왕은 껄껄 웃고 있다.



김옥영 시집 『어둠에 갇힌 불빛은 뜨겁다』 중에서






영상뿐 아니라 무엇이든 질문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게 실마리가 되어줄 책이 아닌가. 무작정 쓰기만 했지 이것을 어떤 형태로 가공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을 때 웹진에 연재되던 김옥영님의 글은 머리를 청량하게 씻어주고 가벼운 용기를 손에 들려주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을 원하지 않아도 무시로 반복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읽어야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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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
유성원 지음 / 난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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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콘 섹스 문제에 관해서 조금 더 얘기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제가 글을 쓸 때 계속 고민했던 부분들이 그런 거였어요. 게이, 남성 사이의 노콘 섹스는 분명히 이성 간의 노콘 섹스와는 다른 맥락이고 삽입하는 남성과 삽입당하는 남성이라는 면에서 봤을 때는 기존의 어떤 젠더관념이나 성적인 수행 면에서 다른 이야기가 나올 부분이어서. 그리고 성소수자 인권포럼 당시 조금 논란이 되었던 “안에 싸도 돼요?”라는 세션 이름을 제안했을 때는, 저는 기존 성소수자, 게이 단체, 아이샵 등에서 하는 캠페인 구호가 와닿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콘돔을 써라, HIV테스트를 받아라, 하는 말이 좋은 말인데 그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왜인지, 그들에게 가닿을 수 있는 언어나 소구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인지 그 부분에 접근해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좋은 말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조심스럽게 던지는 질문, 섹스를 하다가 처음에는 콘돔을 쓰기로 약속했지만 분위기가 좋아지고 상대가 허락할 것 같으니까 어떤 협상의 수단으로, 네가 이걸 허락하지 않으면 관계를 중지할 거야, 하는 협박이나 내가 더 매력적이니까 나보다 덜 매력적인 너는 이걸 포기해, 라는 방식으로 그게 강제되는 경우가 있다는 걸 저는 많이 경험하고 있었고. 


우리가 만남 사이트에서 메시지로 표현하는, 노콘 가능, 안에 싸는 걸 허락한다거나 하는 말들 그런 언어로 다가가야 해당되는 사람들이 반응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트위터에서 이것을 이성 간의 노콘 섹스와 연관지으면서 그러면 앞에 남성인 걸 뜻하는 ‘형’이라는 말을 넣어주지 그랬느냐, 해서 제가 그 의견을 적극 수렴에서 책에는 “형, 안에 싸도 돼요?”라고 했는데요. 그분께는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웃음) 

근데 하나 또 말씀드리고 싶은 건, 지금 이성 간의 관계에서 말씀하셨던 스텔싱이라든지 한국 사회에 현존하고 있는 젠더적인 위계, 그 폭력을, 상황들이 해소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요원해 보이는 이 맥락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 말이 제대로 가닿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분명히 그걸 고려해야 되고 노콘 섹스라든지 안에 싸도 돼요?라는 말에 공포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 부분이 계속 저에게도 어려움으로 남았었어요. 다만 저의 경우에 제가 경험한 게이 사회에서 콘돔 사용 여부가 계층을 가르는 하나의 상징이나 지표 같은 것이었어서, 저는 나와 동일한 삶을 살거나 동일한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사람을 판별하는 방식으로 노콘이 가능한지 여부를 따져 물었던 거 같아요.


게이로 정체화하면서 배우게 되는, 사회화된다고 해야 할까요? 어떤 몸이 인기 있고 권력을 갖는지 배우는 과정 같아요. 사람의 취향에 따라서 영역은 세분화되지만 대체적으로 더 나은 몸이 있고 수치심을 가져야 하는 몸이 있다고 느끼게 되죠. 저는 사람의 몸이 그의 삶이나 그가 살아온 역사가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어떤 사람이 근육질에 자기관리가 잘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 영역만 뛰어난 게 아니고 자신을 그렇게 관리하도록 살아오게 한 배경이나 영역들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계속 하게 돼요. 


글에서 미청년, 젊은이라고 이야기할 때는 단순히 그 사람의 신체조건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제가 저임금의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하는 노동자성을 지닌 것과 어떤 사람이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온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게이인 경우는 다르다고 봤거든요. 몸이라기보다는, 몸으로 상징되는 그 사람의 삶 전체, 제가 그렇게 될 수 없고 살 수 없었던 삶 자체를 욕망했던 거 같아요. 그렇지만 그들과 관계맺는 데 계속 실패하게 되면서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기 시작했고 욕망해도 안전한 것, 상처받지 않는 것들, 원하면 가질 수 있는 것들로 주변을 점점 구성해나갔어요. 그러면서 제가 선호한다고 말하게 되는 관계의 양식과 만나는 대상이 점점 변화하는 거예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세상에 있겠지? 했는데 잘 보이지 않았어요. 나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언어나 글로 접하기는 어려웠고,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을 문학이 아니더라도 다른 텍스트에서 찾으면 그것을 저의 경험에 비추어서 생각해보는 시간들이었죠. 출판편집자로 일하기 시작한 게 2013년 무렵인데 계속 들었던 생각은 이런 책은 세상에 나오는데 어떤 글은 세상의 빛을 볼 수 없는가, 이런 생각을 계속 했거든요. 누군가가 선택하는 거잖아요. 이런 이야기는 세상에 있어도 돼, 이런 이야기는 세상에 있으면 안 돼, 이런 기준 같은 것이 있어서 사람들이 거기에 부합하는 글을 쓰도록 훈련되는 느낌? 세상과 소통할 수 있거나 나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고 싶은데 그 방법을 계속 모르는 채로 쓰기만 하는 거죠. 이게 언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지, 그런 날이 찾아오기는 할지, 그 전에 내가 사라지지는 않을지 그런 생각들을 계속 하면서 저한테 다짐하듯이 했어요. 내가 누군가가 읽기에 불편하지 않고 편안한 이야기를 쓴다면 그 편안한 이야기는 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계속 했어요. 누군가에게 불편하거나, 왜 이런 글을 썼지?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글을 써야 된다는 마음이 제게 있었고 그런 이야기에 분명히 저와 같은 사람, 비슷한 사람이 반응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그런 글을 계속 기다렸으니까. 세상에 있는 저와 비슷한 사람에게 말을 거는 방법으로 글을 썼는데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 사람이 읽고 싶어하는 글이 뭘까.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원할까? 나만 할 수 있고 내가 아니면 안 할 이야기들을 원할까. 이걸 물어봤을 때 저는 후자였거든요. 


HIV/AIDS 운동의 성과가 코로나 팬데믹 시절에 많이 반영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는 좀 문제적인 상황이 많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 안 좋은 말일 수 있는데 저는 한국에 HIV감염인 수가 너무 적다, 좀 많아야 된다. 저는 한 백만 명 정도면 좋을 거 같거든요. 백만 명 정도면 한국에서 병원을 못 간다거나, 손가락이 절단됐는데 치료를 안 해준다거나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어떤 사람이 몸에 바이러스를 갖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모욕해도 된다거나 직장에서 해고해도 된다거나 우리의 커뮤니티에서 배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건강할 수 없거든요. 


남자를 좋아한다는 게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났을 때, 우리는 모든 삶의 조건과 토대가 동일한 채로 출발하지 않는데 마치 남자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출발선이 같은 것처럼 관계맺게 되는 커뮤니티가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웠거든요. 사람들과 어울리는 비용이나 입고 다니는 옷, 하는 말, 문화, 겨울이면 스키를 탄다거나 하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남자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울리려는 노력을 했다는 것이 어떤 시절엔 굉장히 수치스럽기까지 했어요.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가 삶의 조건이 다 같지 않은 곳에서 어떤 사람에 대고 너는 이런 조건을 가졌으니까 죽어도 돼, 너는 부랑자니까 추운 겨울에 갈 곳이 아무데도 없어도 돼, 너는 일을 하지 않잖아, 이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렇게 내몰리게 되는 조건과 과정을 살펴야 된다는 거죠. 누구나 처지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저는 오히려 코로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나. 돈이 없어 마스크를 구입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마스크를 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감염되었을 때 그 부담을 사회 전체가 짊어지게 된다, 이런 것을 배우고 있잖아요. 그래서 취약한 부분, 사각지대가 있는지 살피고 있고. 


HIV 같은 경우도 혐오세력이 물고 늘어지는 부분은 동성 간 감염률이 높다는 건데 어처구니가 없잖아요. 동성 간 감염률이 높으면 이들을 어떻게 지원해줄 건지, 어떻게 낮출 건지 살펴야 하는데 그들의 해결책은 동성애를 하지 말래요. 그러면 답은 간단하죠. HIV에 걸리지 않으려면 다 죽으면 돼요. 죽으면 바이러스에 걸릴 수 없잖아요. 그런 식의 해결책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 있을 수 있는 방식으로, 공존하는 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런 고민을 코로나가 시켜주고 있지 않나. 나는 잘살고 쟤는 못살아도 돼, 이게 아니라 저 사람이 못살면 그 영향을 간접적으로 직접적으로 내가 받게 된다는 사실을.


저는 죽어가는 방식으로서의 살아 있음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글을 쓸 때 항상 느끼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거였어요. 내가 처한 어떤 처지나 상황 같은 게 너는 죽어야 돼, 너는 살아야 할 필요가 없어, 넌 살아 있을 이유가 없어, 너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을 거고 미래는 나아지지 않을 거야, 라는 그 어떤 반복되는 말 앞에서 제가 그것을 받아적거나 쓰는 것만으로 그 쓰는 동안은 제가 살아 있는 거잖아요. 그게 어떻게 보면 어떤 사람이 죽는 데 10초가 걸린다고 할 때 그 사람은 죽어가고 있지만 10초 동안은 살아 있는 거거든요. 그런 방식으로 글쓰기를 이해했던 시절이 있었던 거 같아요.


물론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윤리적 기준에서 이 일은 나쁜 일이고 세상에 있어선 안 되는 일이야, 하는 게 있을 거예요. 저도 당연히 그런 게 있고. 그 기준을 넘어서지 않는 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법이나 규칙, 암묵적인 합의로 규정한 ‘하면 안 되는 일들’에 대해서는 늘 의문과 시험하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요. 이것이 정말 나쁜 거야? 노콘 항문 섹스가 나쁜 거야? HIV감염 위험이 있는 사람과 노콘 항문 섹스를 하면 HIV에 걸릴 수 있어서 나쁘다고 한다면 HIV에 걸리지 않는 방법을 제공해줘야지 그걸 제공해주지 않는 게 나쁜 일 아닐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돼요. 어떤 사람들이 자기가 살아 있으려고 수행하는 일들, 이 책에 묘사된 유성원의 모습이 누군가의 눈과 가치관으로 봤을 땐 이해할 수 없고 나쁘다라고도, 안타깝다라고도 말할 수 있는 모습이라고 해도 저는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방식으로서 그 시기를 지나왔다면 저는 그 행위를 나쁘다고 보고 싶지 않거든요. 판단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 사람이 처한 조건은 해결해줄 수 없으면서 그 사람이 처한 조건 안에서 분투하는 노력은 너무나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물론 이것은 그걸 변명한다거나 이게 감정적인 문제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야, 라고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아까의 당부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드려야겠지만. 


글을 쓰는 것은, 만약 여러분이 세상에 혼자 남았는데 당분간 죽을 예정도 아니에요. 고양이도 없고 개도 없고 아무 생물도 없는 채로 앞으로 50년 정도를 살아 있어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저는 제가 느꼈던 어떤 외로움이나 고립감은 그런 느낌이었거든요. 저는 훌륭한 알바생,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 왜 일을 저렇게까지 하지? 싶은 사람은 될 수 있는데 그리고 저는 그런 여러 면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면만이 나라고 보여지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받아들여지는 편안한 나만이 나라고 생각되고 싶지 않아서 계속해서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를 썼던 거 같아요. 


전파매개행위금지 조항이 제 글 친절한 설명에도 나오는 감염인의 콘돔 없는 성관계를 처벌하는 조항이거든요. 내가 나를 긍정하고 실천하는 것과 별개로 사회에서 법으로 명문화해서 나의 행위를 처벌대상으로 삼는 일은 현실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죠. 그래서 그런 부분에 계속 관심을 갖게 되는 거 같아요. 그냥 나만 혼자 괜찮다고 하면 되는 게 아니구나, 뭔가를 바꿔야 되는구나. 


저는 나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발견하는 방법 중 하나가 사우나에서 만났을 것, 그런 찜방이나 디브이디방에서 만났는데 콘돔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하는 경우에 굉장한 동질감을 느껴요.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다가 이렇게 노콘 섹스를 선호하게 되었을까 (웃음) 하면서 저의 서사와 이분의 한 많은 삶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저 같은 경우는 마음에 들어도 상대가 콘돔을 쓰길 원하는 경우는 아, 나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삶을 경험해왔고 그러니까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조심하게 되는 것은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같지 않다는 건데요. 우리가 합의라고 얘기하지만 합의를 과연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늘 의문이거든요. 넌 정말 동의한 거야, 넌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걸 허락한 거야, 하고 상대가 응, 응, 정말, 하고 각서까지 쓰고 혈서까지 썼다고 해도 그 사람이 사후적으로 그 경험을 되돌아봤을 때 그게 정말 자신이 동의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게 저에게는 문제적인 고민이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조심해야 되는 사람으로 콘돔 사용을 원하는 사람을 꼽죠. 나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겠구나, 그러니까 이런 부분들을 좀더 예민하게 봐야겠다, 생각하게 되고요. 


프렙 얘기도 했었는데 프렙은 비감염인이 복용하면 예방약이고 감염인이 복용하면 치료제잖아요. 친구사이 같은 곳에서 왜 프렙을 구체적으로 알리는 활동을 하지 않을까 예전에 잠깐 했었는데 제가 상대방의 감염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프렙을 권했을 때 상대가 감염인일 수 있잖아요. 그런 부분이 조심스러워서 이걸 이야기하기 까다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노콘 섹스를 하는 파트너들 대상으로 프렙 임상 연구가 진행된다거나 지원 사업이 있으면 카톡으로 근처 병원을 알려주고 가보라고 하는데 상대방이 저에게 감염 사실을 감추고 있다면 그런 메시지를 받고 어 그래 가볼게, 하더라도 가지 않는 그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생각은, 우리가 이렇게 신체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접촉하고 기쁨을 느끼고 심지어 사랑을 느끼기까지 한다고 생각하는 행위를 하는 경우에 상대에 대해 이렇게 몰라도 될까? 상대가 HIV감염인이라면 그가 미검출 상태인지 아니면 어떤 사정으로 약을 못 먹고 있는 상태인지 최소한 우리가 관계맺으면서 발견하고 알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사람과 섹스를 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처해져 있는 어떤 조건들이 그런 부분들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게 하고 우리가 만남을 가지는 공간에서는 그런 것들이 금기시되고 콘돔과 젤 사용, HIV검사를 받으라는 말이 굉장히 공허하게 느껴지는데 어떻게 하면 이런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이 돼요. 이런 익명성이라는 것이 상대방에게 폭력을 합리화하기 좋은 핑계잖아요. 내가 저 사람을 모르고 저 사람도 나를 모르니까 나에게 좀 나쁜 짓을 하거나 찜찜한 짓을 하더라도 두 번 다시 안 볼 거니까, 혹은 내가 누군지도 어디에 사는지도 모를 테니까 괜찮아 하고 넘어가는 부분들을 점점 줄여나가야 되지 않나? 하는 여러 생각이 드네요.


분개하는 경우 어떻게 견디나, 저는 이것이 저한테는 글쓰기의 방식이기도 했거든요. 사실 저는 글을 쓰면 스트레스가 해소돼요. 뭐냐면 저를 빡치게 한 상황을 글과 맞바꾸는 느낌? 나를 분노하게 한 이걸 자원으로 이 글을 썼으니까 됐다, 이런 생각도 하게 되고. 저 같은 경우는 사춘기 때부터 글을 썼는데 글에 모든 나쁜 말을 다 썼어요. 저는 누가 저를 화나게 하면 그 사람을 글 속에서 정말 난도질을 했거든요. 그 사람을 현실에서 보면 미안할 정도로. 내가 좀 심했구나. (웃음) 그런 묘사를 악마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잔혹하고 끔찍하고 내가 상상 속에서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고통을 줬거든요. 나를 힘들게 하고 모욕하고 수치스럽게 하고 창피 준 사람을. 그런 일을 반복하다보니까 분노는 글 속에 있는데, 한 번 크게 화를 내면 같은 일로 두 번 화를 내기가 뻘줌해요. 이미 화를 한 번 내서 멋쩍어지는데 그런 부분이 저에게는 글쓰기의 원동력이 되었죠.


문제는 이것이 사회조건을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할 때는 무력감도 같이 오는 거잖아요. 나의 이 분노가 딱 정확하게 가닿아서 물리쳐야 될 대상을 물리치고 바꿔야 할 조건이 바뀌고 이러면 참 좋겠는데 그 조건은 제자리인 상태에서 분노만 계속 안게 되니까 그 부분이 어려워요. 저는 이제 에이즈 운동에 대해서도 잘 몰랐는데, 요양병원 대책위 했던 선생님이 했던 얘기 보면, 에이즈 환자가 요양병원에 입원했는데 거기서 인권침해가 일어나서 감염인이 사망하고 거기에 대해 제대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문제가 개선되지 않아서 요양병원 대책위를 마련하고 긴 시간이 지났는데 그 대책위를 가리켜서 그러시는 거예요, 우리는 대책 없는 대책위다. 저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더라고요. 되게 물어보고 싶었어요. 어떻게 이걸 계속 하셨어요? 책에도 잠깐 나오는데, 저는 여기에 발을 담근 것도 아니고 잠깐 기웃거리기만 한 건데도 이게 1년을 하면 끝난다, 2달을 바짝 하면 끝난다 이런 것이 아니고 어떤 언어로 어떻게 이 시스템에 접근해서 내가 원하는 바를 관철시켜야 할지 깜깜한 상황에서 단지 나에게 누군가가 어떤 사정을 호소하고 그걸 외면할 수 없어서 이 판에 뛰어든 사람들이 굉장히 그 앞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이 분노를 무력감으로, 그래서 문제 제기해도 현실은 바뀌지 않으니까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 패배감에 젖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정말 누구도 풀기 어려운 문제 같아요. 그래서 그런 분개할 만한 상황 앞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거기에 너무 나의 모든 것을 잃지 않도록 하는 거. 내가 정말 뛰어나고 매력적이어서 모든 사람이 내가 무슨 한마디만 하면 달려들어서 그걸 다 바꿔주고 받아들여주고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게 자명한 현실을 견딜 수 있는, 분노에 내 모든 것이 잠식되지 않게 하는 아주 작은 나만의 무언가라도 발견하려는 노력을 계속 해야만 이걸 지속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서 그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 저에게는 의미 있었거든요. 이게 개선될 것 같지 않은데 글을 계속 쓰다보면, 제가 찜방에 가서 누구한테 거절당했거나 폭력적인 관계를 맺었다면 그 경험을 1년 전에도 했는데, 3년 전에도 한 거예요, 그렇게 누적되다보면 조금씩 달라지는 것들이 생기더라고요. 내가 동일한 경험을 한다고 하더라도 예전에 내가 겪어본 경험상 여기까지는 이런 결과가 나온다는 값을 지닌 상태로 그걸 경험하는 것이어서 게임을 한 판 다시 하는 느낌으로. 저는 그 방식이 기록이었는데 여러분에게 그게 어떤 방식일지는 모르겠어요. 각자 누구나 내가 돈을 받거나 대가를 받는 것이 아닌데 꾸준히 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 거거든요. 그것을, 그 힘을 발견하고 소중하게 지속해나가는 것이 이 분노에 자신이 상하지 않는 아주 작은 도움을 주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두번째 질문은 제가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 있는데 나의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나와 조건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을까. 저는 그래서 말을 안 했어요. (웃음) 저는 말을 안 했어요 그냥, 글을 썼어요. 말을 해도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너무 잘 느끼고 있거든요. 내가 저 남자들, 사람들과 자리에 있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말이 정해져 있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직장생활에서 성원씨, 이거 괜찮아? 물었을 때 아뇨, 못하겠는데요, 하면 안 되는 상황 있잖아요. 내가 너한테 이런 무례와 큰 폭력을 저질렀는데 이것에 대해서 너는 나한테 문제 제기하지 않을 거지?라는 말에 문제 제기 할 거예요, 라고 할 수 없으니까 네 괜찮아요, 하고 말잖아요. 그게 우리 현대 직장인 우울증의 원인이고. 그런 면에서 아까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언어, 사람들이 생각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형식의 말하기를 발견해야 되고 그런 것을 찾아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나는 저 사람에게 말하지 않지만 내 경험이나 느낌, 감정 같은 것은 어떻게든 남아 있게끔 나의 것으로 만드는 길이 뭐가 있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있으면 좋을 거 같아요.


저는 인류학이라는 분야를 잘 몰랐고 인류라는 말이 너무 크게 느껴졌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인류라는 것을 이루는 아주 작은 어떤 한 사람을 들여다보는 일에서부터 출발하는 게 이런 학문인가보구나 하고 혼자 오해 아닌 오해를 해보네요.


중요한 건, 저는 사람들이 말을 할 때 검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검열의 기준이 중요한데 남들이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내부의 윤리,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숙고했을 때 그것이 하면 안 되는 일이어서 안 하는 거여야지, 사회문화적으로 결정돼 있다고 생각해서, 그게 공고하다고 느껴서 그냥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여러분이 각자 삶에서 갖고 있는 질문들, 풀어내야 하는 숙제들을 안고 씨름하실 때 모두가 가는 방향이 아니라 실패하는 방향으로 가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도 후대를 위한 멋진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고요. 그런 실패의 순간을 제가 좋아하거든요. 누가 아프다고 하면 좋아하고 누가 망했다고 하면 좋아하고 누가 속상하다고 하면 좋아하니까 그런 이야기 있으면 저에게 많이 나눠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11월 21일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인류학과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으로 본 몸의 출현' 북토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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