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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이해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 지음, 박민철 옮김 / 하나의학사 / 2012년 9월
평점 :
그날 밤, 남은 게살을 마지막 한 점까지 싹싹 해치운 나는 위스키 잔의 얼음을 초조하게 계속 흔들어대고 있었다. 잭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딘지 불안하고 불편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자살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굳은 약속을 했다. 만약 한쪽이 또다시 자살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때는 케이프 코드에 있는 잭의 별장에서 만나서, 자살 충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일주일을 보내면서 자살을 단념시키도록 상대편을 설득하자는 맹세였다. 자살 충동은 리튬 복용을 중단한 탓일 테니(-) 왜 다시 리튬을 복용해야 하는지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이유를 들려주자고 했다. (-)
(-)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런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껏 우울증이 재발할 때마다 엄습했던 자살 충동과 싸우면서, 수화기를 들어 친구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
하지만 디저트로 수플레가 나왔을 즈음에는 잭도 나도 그 계획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자기기만은 조증 상태에 있는 조울병 환자 특유의 설득력 넘치는 자신감과 증폭된 에너지와 열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잭은 나에게, 나는 잭에게 전화를 걸 것이고, 우리는 힘을 합쳐서 체스판에서 '흑기사'를 물리치고 내쫓아버릴 것이라고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 잭은 벌써 몇 해 전에 결혼을 했고, 나는 워싱턴으로 이사를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잭이 머리에 총을 쐈어요, 그의 가족이 말해주었다. 그가 자살했다고.
(-) 자살은 20년도 넘은 내 직업상의 관심 분야였으며,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개인적인 관심사였다. 괴로웠던 나의 경험을 통해 자살이 얼마나 인간을 무력화하고, 지배하고, 속이고, 황폐화시키며, 파괴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런 자살의 위력에 이제 거의 존경심마저 품을 지경이다. (-)
세인트 로렌스 섬의 유트 에스키모들은 누군가가 자살 의사를 세 번 표명하면 친척들이 그의 자살을 도와줘야 했다.
자살의도 척도(자살기도자용)
고립
0. 누군가 옆에 있음
1. 가까이에 또는 보이거나, 말을 걸 수 있는 범위 안에 사람이 있음
2. 가까이에 또는 보이거나, 말을 걸 수 있는 범위 안에 아무도 없음.
달리는 자동차에서 뛰어내리려 한 6세 소녀는 정신병원에 와서 이렇게 설명했다. ‘배가 너무 고파 참을 수가 없어서 사람을 물어뜯어 먹으려고 해요. 전 나쁜 아이니까 죽어야 해요.’
인간의 이해력에는 한계가 있다. 망자가 남긴 마지막 신호나 메시지, 이를 우리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는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봐도 끊어져 버린 목숨을 되살릴 수는 없다. 자살자의 정신세계를 재구성해보고 싶다고 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간접적이고 불충분한 일들뿐이다.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가기란 어려운 일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자살할 좋은 이유가 있다. 바로 이 점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15세였던 한 소년은 자살하기 2년 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오래전... 그는 시 한 편을 썼다
그리고 '촙스'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가 기르던 개의 이름이었고, 그리고
그 개에 대한 이야기만 쓰여 있었기에...
그리고 선생님은 그에게 'A'를 주시고,
황금별도 주셨다.
어머니는 이를 주방문에 붙여놓고
이모들에게 읽어주었다.
오래전... 그는 또 시 한 편을 썼다.
그리고 '물음표가 붙은 천진함'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의 슬픔의 이름이었고, 그리고
슬픔에 대한 이야기만 쓰여 있었기에...
선생님은 그에게 'A'를 주시고
이상한 얼굴로 그를 한참을 바라보셨다.
어머니는 이 시를 주방문에 붙여놓지 않았다.
어머니에게는 그 시를 절대로 보지 못하게 했기에...
오래전, 새벽 3시에... 그는 또 시를 썼다.
그리고 그 시에 제목은 붙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기에
그는 자신에게 'A'를 주고
축축이 젖은 양 손목을 칼로 그었다.
그리고 그 시를 욕실 문에 붙여놓았다.
주방까지는 갈 기력이 없었기에...
아무리 상실감이나 낙심이 크고, 아무리 수치심이나 소외감이 깊다 하더라도 정신적 고통이나 스트레스만으로는 대부분의 경우 자살의 충분조건이 되지 않는다. 죽음을 결심할지 여부는 보통 사건의 해석으로 좌우되며, 대부분의 사람은 정신적으로만 건강하다면, 어떤 일을 겪더라도, 그 일을 자살의 정당한 이유가 될 정도로 파멸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