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 랜덤 시선 19
이규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흰 모습

 

 

눈송이 뭉쳐 가만히 들여다보면

설핏 무슨 기미가 어른거린다

너무 흰 것엔 그늘이 있지

보호막 같은 그늘

 

흰 밥, 흰 고무신, 흰 상복, 흰 목련

모든 빛을 다 반사하므로 얻는다는

흰색은 사실 비어 있는 색

누군가 떠난 그늘의 색

 

눈 뭉쳐 등허리에 쑥 집어넣을 때

소스라치던 냉기는

눈의 그늘이었을까

눈물 그렁한 사람이 볼 수 있는

어쩌면 없는 짜안한 모습

 

서둘러 떠나는 사람을 더 오래 기억하듯

눈은 오래 머물지 않아서 그립고

그리움은 만질 수 없어서 멀다

만지면 없어지는 사람을

누가 미워할 수 있겠나

 

 

유월 비

 

 

중앙내과 2층 회복실에서 링거 주사 맞는다

유리창은 비 맞는다

창틀에 모여 머뭇거리다 떨어지는 비

주사기 대롱 속의 비

혈관으로 들어와 섞인다

사이랄까, 틈이랄까

링거 주사 맞을 댄 몸속으로 주사액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한 땀 한 땀 간격이 들어오고

, 톡 소리가 들어온다

한잠 푹 주무세요, 의사가 쓸데없는 곳을 만져 잠을 깨우지 않아도

간격과 소리 사이에서 잠이 툭 끊어진다

손짓 하나, 바라보는 눈짓 하나

한 꽃 피는 시간이나 따끔했던 연애도

끊어지지 않는 것 어디 있더냐

유월 비도 저렇게 끊어질 듯 내려와 닿고

한 생애를 위해 수만 컷의 필름이 서로 앙물려 있을 텐데

끊어지지 않는다면

목숨인들 여기까지 어떻게 왔을 건가

앞의 빗줄기가 뒤의 비를 마중하듯이

 

 

당나귀와 당나귀 같은 아이와

 

 

어느 집이나 자식 여럿이고 보면 순하고 좀 모자란 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아이는 대개 왜소하고 병약해 거친 일이 피해간다 욕심도 없고 말썽도 안 피우는 아이 겉으로 똑똑하고 잘난 형제들 모두 모이는데, 있는 듯 없는 듯 당나귀가 꼭 그렇다 무거운 수레도 못 끌고 쟁기질도 맞잖은, 괴나리봇짐이나 덜렁 안장에 얹어보면 착하게 생긴 눈을 반쯤 뜬 채 몸에 비해 커다란 머릴 설렁인다 없으면 허전하고 곁에 있어야 맘이 놓이는 덜 자란 아이, 좀 모자란 것이 내도록 눈에 밟히는 것은 그 속에서 덜 자란 자기 모습 보기 때문일까 당나귀가 식구를 키우는 집, 칠 벗겨진 그 집 대문이 눈에 익다

 

 

낮달

 

 

무슨 단체 모임같이 수런대는 곳에서

맨 구석 자리에 앉아 보일 듯 말 듯

몇 번 웃고 마는 사람처럼

 

예식장에서 주례가 벗어놓고 간

흰 면장갑이거나

그 포개진 면에 잠시 머무는

미지근한 체온 같다 할까

 

또는, 옷장 속

슬쩍 일별만 할 뿐 입지 않는 옷들이나

그 옷 사이 근근이 남아 있는

희미한 나프탈렌 냄새라 할까

 

어떻든

단체 사진 속 맨 뒷줄에서

얼굴 다 가려진 채

정수리와 어깨로만 파악되는

긴가민가한 이름이어도 좋겠다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있는

오래된 흰죽 같은,

 

 

부록

 

 

가려져 있나 싶지만

뒤에 있어서 더 자유롭고

자유롭기 때문에 과감한 것 같다

원래 타고난 끼가 가볍고 발랄해

책임질 일도 없다

장자가 못 된 설움을 분방함과 바꾸어라

그냥 지나치다 잠시 자리 잡았는데

월척이 올라온 것처럼

흘려놓은 상식들 주워 담다 보면

저렴하게 행운을 만나기도 한다

근엄하게 폼 잡은 본문보다

가려운 등 슥슥 긁어주는 부록이

효자손이다

효자손은 효자가 아니지만 가깝고

부록은 본문이 아니지만 재미있다

부록처럼 살아온 당신,

오늘부터 당신이 주인공이다

조실부모한 이가 그렇듯이

어긋나며 넘어지며 단단해진다

일찌감치 당돌해

좌충우돌 더 깨질 것도 없다

정수리에 야구모자 삐딱하게 눌러놓은

,

말고 너 뒤!

 

 

님짜장

 

 

운문사 가는 길, 동곡 지날 때쯤

짜장면집 있다

입구 작은 입간판에 님짜장이라 적혀 있는데

님과 함께 가는 곳인지

이곳에 함께 가면 님이 되는지

님과 짜장이 어울리지 않는 것도 같고

억지로 어울린다 생각할 수도 있는데

어쨌든 님이라면 그저 마음들이 너그러워져서

님 보듯이 짜장도 먹고 싶어진다

호기심 반 설렘 반으로 식당 안에 들어서는 순간

님짜장이란 다름 아닌

스님 짜장의 머리글자가 지워진 걸 알게 되는데,

그 짧은 순간에 구성한 별별 상상력이 객쩍어

급히 떠올린 님을 슬그머니 내려놓는데,

기름진 고기 대신 스님 머리 같은 버섯 듬뿍 넣은 게

이거야말로 님에게 먹이고픈 짜장 아닌가

주인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입간판 전혀 고칠 생각이 없는데

짜장면 먹다 생각해보니

우리에게 님은 잃어버린 지 하 오래여서

이때만이라도 님을 한번 생각해보란 뜻 아닌가 해서

 

 

,

 

 

잘 말하기는 반쯤 말하기라고,

말하지 않은 반 토막이

아주 잠깐 캄캄한 반 뼘이

쉼표는 아닐까

반쯤만 말하고 아쉽게 헤어진 연인들이

돌아볼까 말까 머뭇거리다

결심한 듯 다시 제 속도로 묵묵히 가는,

그런 순간

말보다 더 큰 울림

반 이상의 말이 휴지부에 있다

 

길을 잠시 끊는 개울이나

산자락이 숨겨놓은 느닷없는 절벽과 계곡은,

쉼표다

잘 흐르는 문장에 쏙 내민 혓바닥처럼

아찔한 붉은 꼬리점

좀 힘들겠지만

남겨둔 반쯤이 내일을 물고 온다

쪽잠처럼 자세를 다 풀지 않는 휴식

쉬어 가라고, 좀 조절하라고

뭣보다 체하지 말라고

딱 한 음절, 한 걸음이

전 문장을 꽉 잡고 있다

 

 

그 비린내

 

 

먹다 만 고등어 다시 데울 때

지독하게 비린내가 난다

두 번의 화형을 불만하는 고등어의 언어다

이렇듯 한 번 다녀갈 땐 몰랐던 속내를

반복하면서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물간 생선 먹는 일같이

마음 떠난 사람과의 입맞춤이 그렇다

요행을 바라는 마음 없지 않지만

커피잔에 남아 있는 누군가의 립스틱 자국처럼

낯선 틈이 하나 끼어든다

 

아깝다고 먹었던 건 결국 비린내였나

등푸른 환상이었나

재워줄 뜻이 없으면

어디서 자느냐고 묻지 말라 했다

갑남을녀들

서로 속는 척, 속아주는 척

 

먹다 만 고등어,

먹다 만 너,

사향 냄새는 생리 주기도 당긴다는데

벼리면서 단단해진다는데

그런데, 두 번씩 달구어 비리디비린

마음아 넌?

 

 

 

 

방금 대웅전을 둘러본 한 패거리의 남자들, 불두화 앞에서 키들거린다 스펀지 넣은 뽕브라자 같다느니 한 스물댓은 됐을 거라는 둥, 꽃송이째 손아귀에 넣고 조물조물한다 오랫동안 금욕에 들었던 꽃들, 불편해할 줄 알았는데 웬걸 머리를 더 꼿꼿이 치켜든다 자기표현에 서슴없는 요즘 아이들 같다 음핵들이 촘촘히 박혀 한 덩어리를 이룬 저 꽃을 누가 부처의 머리로 보았을까 저기 평생 젖가슴 조물거려야 할 후생들의 업보는 키들거리는 손가락 안에 머물러 있다 해도, 저들이야 웃든 말든 나, 꽃나무 옆 당간지주처럼 무뚝뚝해 있다가 슬그머니 다가가 꽃숭어리 어루어본다 저릿한 속살 맛이다 말하지 않은 것들이 내 안에도 너무 많다

 

 

어느 날, 우리를 울게 할

 

 

노인정에 모여 앉은 할머니들 뒤에서 보면

다 내 엄마 같다

무심한 곳에서 무심하게 놀다

무심하게 돌아갈,

어깨가 동그럼하고

낮게 내려앉은 등이 비슷하다

같이 모이니 생각이 같고

생각이 같으니 모습도 닮는 걸까

좋은 것도 으응

싫은 것도 으응

힘주는 일 없으니 힘드는 일도 없다

비슷해져서 잘 굴러가는 사이

비슷해져서 상하지 않는 사이

앉은 자리 그대로 올망졸망 무덤처럼

누우면 그대로 잠에 닿겠다

몸이 가벼워 거의 땅을 누르지도 않을,*

어느 날 문득 그 앞에서 우리를 울게 할,

어깨가 동그럼한 어머니라는

, 나라는 무덤

 

 

*브레히트의 시 나의 어머니에서 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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