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92호 - 2017.가을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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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의 일상은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하고 지루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종로의 다 쓰러져가는 퀴어 영화 전문 제작사 사무실에 앉아 인터넷 파일 공유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검색창에 '잠든 근육청년 탐하기'를 쳐넣었다.

귀사의 701045번 게시글이 저희 제작사의 작품 <잠든 근육청년 탐하기>의 저작권을 침해하고 있어 삭제 요청드립니다.

해당 영화는 요즘 내가 담당하고 있는 작품이며 실은 작품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정도의, 제목 그대로 훈훈하게 생긴 청년이 섹스를 하는 것이 전부인 동영상이다. 제작 단계에서부터 사용되었던 '잠든 근육청년 따먹기'라는 주제의식을 명확히 내포한 제목은 영상물등급위원회의 반려로 인해 '잠든 근육청년 탐하기'로 수정되었고, 옆집 남자 같은 주연 배우의 수수한 외모 덕분인지 게이들을 타깃으로 하는 불법 파일 공유 사이트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종로의 사무실에 앉아 곰팡내를 맡으며 저작권을 침해한 파일을 적발해내는 일이 내 오후 일과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내가 이러려고 죽도록 공부하고 돈 벌어 영화과를 나왔나, 자괴감이 들었던 시절은 옛적에 지나가버렸고, 제때 월급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을 땐 내 나이 서른을 훌쩍 넘겨버린 뒤였다.


(-)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 박감독. 박감독이 이등상 탄 거나 다름없어. 칸이었으면, 은곰상 받은 거야.

아, 네. (그건 베를린입니다만.) 감사합니다.

프로그래머 Q가 곰살맞은 말투로 덧붙였다.

김선생님 말씀이 맞으셔요. 우리 영화제가 돈이 없어서 그렇지, 진짜 여유만 됐으면 박감독님한테도 상 드렸을 거야. 나 박감독 영화 보다가 울었잖아.

예.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R감독이 오감독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 오감독이 상 받을 만했어. 이번에 물건 하나 나왔지.

흉물도 물건이긴 하지. 당시 일등상을 받은 오감독의 영화는 정말 대참사나 다름없었다. 순진했던 남자가 우연히 동성애자를 만나 짐승 같은 섹스를 하게 된다. 이후 그는 정체성의 갈등에 시달리며, 상대에게 깊은 정을 주었지만 (당연히) 성적 대상으로서 이용당하기만 할 뿐이다. 결국 온전한 사랑을 하는 데 실패한 남자는 완벽히 타락해 술집에서 몸을 팔기 시작한다. 익명의 상대들과 짐승 같은 섹스를 이어가던 남자는, 뜬금없이 헤테로섹슈얼들에게 윤간까지 당하고, 결국엔 자살까지 하게 되는 (얼씨구) 감동의 대서사시였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오감독이 이성애자라는 것을 백 퍼센트 확신하게 되었다. 이성애자 감독들이 그리는 동성애 섹스는 하나같이 엉덩이를 너무 과도하게 들썩거린다거나, 키스를 하는 건지 얼굴을 침으로 칠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지저분하게 핥아대는 등의 과장된 모습이기 마련이었다. 오감독의 영화가 딱 그랬다. 심지어는 주인공들이 섹스하다 울기까지 하네? 아니 남자랑 섹스하는 게 좋아서 욕먹어가며 동성애하는 건데 왜 울고불고 난리를 쳐대는 건지. 나는 오감독의 영화를 보고 그가 동성애자가 아님을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성애 섹스 전력조차 의심하게 되었다. 그의 영화는 성소수자를 심하게 대상화하고 있었고, 80년대 퀴어 서사에나 적합한 신파 코드로 점철되어 있었다. (-)평론가 김은 심사평에서 오감독의 영화를 두고, 성적 소수자의 고통을 잘 형상화해 동성애를 보편적 사랑의 경지로 끌어올린 수작이라고 평했다. 그들은 모두 보통 사람들이 누구이며 그들이 하는 보편적인 사랑이 뭔지 너무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동성애자들이 뭐 얼마나 특별한 사랑을 하고 산다는 건지, 동성애자인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이성애자가 연루되면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박감독 작품이 별로였다는 건 아냐. 근데 뭐랄까. 좀 현실적이지 못해.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일기나 다름없는데.)

아니 생각해봐. 주인공들이 너무 발랄해. 깊이가 없어.

깊이요?

응. 캐릭터들이 자기가 동성애자라고 우기기는 하는데 가슴속에 우물이 없어. 그게 말이 안 돼.

무슨 (좆같은) 말씀이신지.

박감독 세대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느끼기에는 그렇게 별 고통 없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인물이 동성애자인 게 너무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진다고. 너무 나이브하지 않나, 사회적으로 고립된 소수자들이 왜 그런 말투를 쓰는 건지.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프로그래머 Q가 친절한 말투로 거들었다.

맞아요. 저도 같은 지점을 느꼈어요. 게다가 박감독님 작품의 모든 게이들이 섹스에 미쳐 사는 사람들처럼 보여요. 과잉 성애화가 돼 있달까?

이성애자들 바람피우는 영화 보고 과잉 성애화되어 있다고 하진 않잖아요?

평론가 김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박감독,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잘 들어봐. 박감독 영화는 사실 특별한 지점이 부족해. 퀴어 영화다운 그런 지점. 동성애자들에 대한 감독의 성찰이 부족하달까? 그냥 일반인들 연애 얘기랑 다른 지점이 없잖아. 젊은이들이 나와서 술 먹고 춤추고 성관계하는 게 전부인데.

그들이 하도 지점, 지점거려서 난 뭐 프랜차이즈 업체를 말하는 건 줄 알았다. 그는 나에게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끓어오르는 화를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잘 보셨네요. 저 그냥 젊은 사람이 술 먹고 섹스하는 영화 만들고 싶었어요.

그럴 거면 동성애자 영화를 찍는 이유가 뭔가? 유행이라서?

전 동성애 영화 찍은 게 아니고 그냥 연애하는 영화 만든 건데요.

이 친구 참. 소박하다고 해야 하나, 당돌하다고 해야 하나. 성적 소수자들을 너무 소모적으로 다루는군. 이런 식이면 당신 그냥 짝퉁 홍상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는 거야.

그의 논리에 따르면 영화 속에 퀴어를 등장시키려면 무조건 합당한,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치명적인 '지점'이 있어야 하는 거였다. (-)


(-)

이거 보세요, 박감독님. 김선생님은 지금 당신 영화가 너무 단순하고 쉽게 만들어졌다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아시겠어요?

지금 뭐라고 했어요? 내가 영화 대충 만들었다고 말하는 거야?

대충까지는 모르겠고 쉽게 만든 건 맞지. 동성애자 캐릭터가 그렇게 발랄한 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들의 문제를 받아들이는 게 어색한 것조차 모르잖아. 당신, 소재에 대해 제대로 고민한 게 맞긴 맞아?

그러는 오감독님이야말로 동성애가 뭔지 알기나 알고 하는 소리예요? 동성애자 한 번 본 적이라도 있어요?

있다마다요. 저는 이번 영화 만들려고 게이바에서 일도 하고, 자료 조사도 철저히 했어요. 그러다보니 알겠더군요. 그들이 얼마나 공허하고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지. 매일 술을 마시고. 약에 취해 익명의 남자들과 섹스를 하고. 당신이 그런 속사정을 안다면 그렇게 쉽게 웃고 떠드는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겠죠.

닥치세요. 제발.

지금 뭐라고 했어.

닥치라고 씨발.

어디서 욕질이야. 어린놈의 새끼가.

(-)


이거 샤넬 거 맞죠.

음식점에 정적이 어렸다. 나는 재빨리 천장을 살폈다. 감시 카메라 두 대가 입구부터 우리의 테이블까지 사각지대 없이 샅샅이 비추고 있었다. 빼도박도 못하게 생겼군. 나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다고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고, 왕샤도 누구보다도 결백한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맞네. 샤넬 마이크. 견출지 떼는 거 다 봤어요. 이거 절도인 거 알죠?

남자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전화를 걸었다.

사장 엄마. 우리 마이크 찾았다. 여기 비욘세야. 얼른 와.

낙타처럼 인위적인 속눈썹을 붙인 샤넬의 오너가 비욘세 순대국밥에 당도했다. 그녀는 우리가 허락한 적도 없는데 멋대로 우리의 테이블에 앉더니 물컵에 소주를 따랐다. 그리고 우리가 뭐라 할 틈도 없이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오늘 우리 애들한테 육십만원 날렸다고 했어. 마이크 두 개 값. 그래서 일찍 문 닫았잖아. 오늘 장사 공쳤구나. 접자. 근데 이게 웬일이야. 내 아들이 마이크를 찾았대잖아. 이 새벽에, 그것도 비욘세에서.


_박상영_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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