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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ㅣ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그는 내게 사주를 물어 흰 종이에 받아적더니 그것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사주를 받아적은 종이의 여백에 알 수 없는 한자를 휘갈겨대더니 문진을 들어 종이 위에 올려놓았다.
“뭐가 되고 싶으십니까?”
그의 첫 질문이었다.
“글쎄요. 혁명가?”
무슨 심사로 그런 장난기가 동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령의 다음 행동을 보면 내 대답이 그의 흥미를 돋운 것은 분명했다. 도령은 밖에서 접수를 받는 여자(누이라는 소문이 있었다)를 불러 당분간 손님을 받지 말라고 일렀다. 그러고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고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돌입니다.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라고 다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힘이 들지요.”
(…)
“그럼 저는 어떤 일을 해야 되겠습니까?”
“사주에 말씀 언자가 둘이나 들어 있습니다. 말과 글로 먹고 살게 될 겁니다. 그쪽으로 가면 사십 년 대운입니다.”
(…)
시간이 흐르자 그의 예언은 하나둘 맞아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듬해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년쯤 후엔 잡지 등에 고료를 받고 글을 쓰기 시작했고, 얼떨결에 단행본도 출간하게 되었다. 그렇게 번 돈이 대학원의 등록금을 다 내고도 남았다. 대학원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오자마자 작가로 정식 등단을 했고 모교의 한국어학당에서 외국인들에게 한국말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후로 라디오 진행자나 교수, 시나리오작가 등을 거쳐 마침내는 전업 소설가로 먹고살게 되었으니 말과 글로 먹고살게 되리라던 그의 예언은 잘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
작가로 자리를 잡은 후에 머리를 길게 땋은 그 도령의 신통한 점괘 얘기를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그를 만나고 싶어했다. 그런데 내가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1989년에 날더러 ‘말과 글로 먹고살게 되리라’고 단언한 사람은 내 주변에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 오직 그 도령만이 예외였다는 것이다. 그는 마치 정해진 운명을 읽어주듯 담담한 확신을 가지고 말했고 나는 그의 말을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라고 여기고 피하지 않고 맞았던 셈이다.
우리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운명예정설 따위를 믿을 게 아니라면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우리에게 자기실현적 암시가 꼭 필요한 인생의 순간들이 있다는 것. 그 암시가 꼭 점쟁이나 관상쟁이에게서 나올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