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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에 가는 달팽이들의 노래 - 가브리엘 르페브르의 그림과 함께 읽는 시
자크 프레베르 지음, 가브리엘 르페브르 그림, 오생근 옮김 / 문학판 / 2017년 3월
평점 :
눈물의 열차는 굴러갈 수 없을지 모르지
그리고 풍경을 바라보지
보기 싫은 풍경이 나타나도
풍경이 아름다워지기를 기다리면 되겠지
절망의 세관원들이
내 가방을 찢어서 열어볼 수도 있겠지
내 몸을 여기저기 만지면서 나를 심문할 수도 있겠지
신고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사랑도 나처럼 여행 중이지
언젠가 그 사랑을 만날 수가 있겠지
사랑의 얼굴이란 보자마자
금방 알아볼 수 있는 법
_「마음의 소리─앙리 크롤라에게」中
우선 문이 열린
새장을 하나 그릴 것
다음에는
새를 위해
어떤 예쁜 것
어떤 단순한 것
어떤 아름다운 것
어떤 유익한 것을…
그 다음에 그림을 나무에
정원에
작은 숲에
큰 숲에
걸어놓을 것
아무 말 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나무 뒤에 숨어 있을 것
때로는 새가 빨리 오기도 하지만
그런 결심을 하는 데
여러 해가 걸릴 수도 있으니까
실망하지 말고
기다릴 것
필요하다면 여러 해를 기다릴 것
새가 빨리 오거나 늦게 오거나
그림의 성공과는 무관하니까
새가 날아올 때
날아오면
아주 깊은 침묵을 지킬 것
새가 새장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릴 것
새가 들어간 다음에
조용히 붓으로 새장을 닫을 것
그리고 새의 어떤 깃털도 건드리지 않으면서
모든 창살을 차례차례 지울 것
그러고는 가장 아름다운 나뭇가지를 골라
나무의 초상을 그릴 것
푸른 잎새와 서늘한 바람을
여름의 더위 속에서 우는 풀벌레 소리를
햇빛의 가루를 그릴 것
그리고 새가 노래하기를 결심할 때까지 기다릴 것
새가 노래하지 않으면
그건 나쁜 징조
그림이 잘못된 징조
그러나 새가 노래하면 그건 좋은 징조
당신이 사인해도 좋다는 징조
그러면 당신은 아주 살며시
새의 깃털 하나를 뽑아서
그림 한구석에 당신의 이름을 쓰면 된다
_「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하여」 전문
그는 머리로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가슴으로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는 그렇다고 말하지만
선생님에게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선생님이 질문을 한다
온갖 질문이 쏟아졌지만
갑자기 그는 폭소를 터뜨린다
그러고는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숫자도 단어도
날짜도 이름도
문장도 질문의 함정도
교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우등생 아이들의 야유를 받으면서도
온갖 색깔의 분필을 들고
불행의 검은색 칠판 위에
행복의 얼굴을 그린다.
_「열등생」 전문
둘에 둘은 넷
넷에 넷은 여덟
여덟에 여덟은 열여섯
다시 한 번! 선생님이 말한다
둘에 둘은 넷
넷에 넷은 여덟
여덟에 여덟은 열여섯
그런데 저기 하늘을 날아가는
금조琴鳥가 있다
아이는 새를 바라본다
아이는 새가 우는 소리를 듣는다
아이는 새를 부른다
나를 구해줘
나와 놀자
새야!
그러자 새가 내려와
아이와 함께 논다
둘에 둘은 넷…
다시 한 번! 선생님은 말하고
아이는 논다
새는 아이와 논다…
넷에 넷은 여덟
여덟에 여덟은 열여섯
그리고 열여섯 열여섯은 얼마지?
열여섯에 열여섯은 아무것도 되지 못해
서른둘은 절대로 아니야
어쨌든 그것들은 사라진다
아이는 책상 속에 새를 감춘다
모든 아이들은
새의 노래를 듣는다
모든 아이들은
새의 노래를 듣는다
모든 아이들은
음악을 듣는다
그러자 여덟에 여덟이 사라진다
넷에 넷, 둘에 둘도 가버린다
하나에 하나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하나에 하나도 같이 가버린다
종달새는 놀고
아이는 노래하고
선생님은 소리친다
바보짓은 이제 그만 해야지!
그러자 모든 아이들은
음악을 듣고
교실의 벽은
조용히 무너진다
유리창은 다시 모래가 되고
잉크는 다시 물이 되고
책상은 다시 나무가 되고
분필은 다시 절벽이 되고
펜대는 다시 새가 된다.
_「복습노트」 전문
차가운 길 돌바닥 위에 어느새 아침 우유병 내려놓는 소리가
온 동네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면
우유 배달하는 작은 자동차가 길 모퉁이를 돌아가기도 전에 우유병은 모두 사라지겠지
그리고 길은 다시 한적해지겠지
그러나 집집마다 부엌의 창들에서는
아주 젊은 목소리가 날아오르겠지
잘못 열어놓은 새장에서
슬픈 새가 기쁨에 넘쳐서 날아가듯이
가을은 겨울을 기다렸고
봄은 여름을 기다렸고
밤은 낮을 기다렸고
차茶는 우유를 기다렸고
사랑은 사랑을 기다렸고
나는 외로워서 울었지
한 번도 날아본 적 없는 새가 나무에 부딪쳐 숲의 언저리에서 죽어가듯이
푸르른 이른 아침의 짧은 빛 속에서
아주 순수한 목소리 하지만 어느새 쓸쓸해진 목소리
그 목소리도 사라지겠지
_「어느새 아침 우유병 내려놓는 소리가」 전문
서로 사랑하는 아이들이
밤의 문에 기대어 서서 입맞춤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손가락질한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분노를 돋우며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것은
아이들의 그림자뿐이다
어른들의 분노 그들의 경멸 그들의 비웃음 그들의 시샘
서로 사랑하는 아이들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아이들은 밤보다 더 먼 곳에
햇빛보다 더 높은 곳에
첫사랑이 찬란하게 빛나는 다른 세계에 가 있다
_「서로 사랑하는 아이들」 전문
Les portes de la nuit | Marcel Carné 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