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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기, 괴물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3월
평점 :
홀연 그의 눈앞에 깊고 검은 구멍 하나가 떠올랐다. 고향 마을의 우물이었다. 사내아이 하나가 고개를 꺾고 까마득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가을 한낮이었다. 엄마…… 아이는 작은 소리로 불러보았다. 검은 우물이 금방 되받아서 엄마, 하고 대답했다. 엄마. 그것은 아이에겐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의미와 감정의 이름이었다. 아니, 우주의 모든 감정과 의미가 담긴 유일한 이름이었다.
엄마, 나 없으면 어떡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 배가 미쳤나봐. 물이 들어오고, 컨테이너도 막 떨어지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영상 화면 속에서 남학생 아이들이 키득거리고 있었다. 야, 너 지금 방송 못 들었어? 구명복 입으랜다. 햐, 신난다. 근데 나는 없는데? 내꺼, 니가 입어라. 그럼 넌? 뭐, 하나 가져와야지…….
머리 위로 땡볕이 쏟아지는 한낮. 대숲 속 검은 바위 밑에 엎드려, 한 아이가 잡목과 풀 더미에 얼굴을 묻은 채 땅 밑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새신랑. 몽둥이 패에 끌려가 수중고혼이 된 그 젊은 사내가 최후로 숨어 있었다는 자리. 어째선지 아이는 얼굴도 본 적 없는 그 새신랑이 자신의 진짜 아비였더라면, 하고 내심 바란 적이 많았다. 말할 시간이 없을지 몰라서 문자 적어놓을게.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 아빠. 그런데 내 동생은 이제 누가 자전거 태워주지?
임철우_연대기, 괴물_실천문학 2015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