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삶 -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화단의 꽃잎이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화단에 물을 주는 당번이 되었다. 조례시간마다 화단에 물을 주도록 배정되었다. 담임이 조례시간마다 내 얼굴을 보는 것이 싫다며 그 일을 내게 시켰다. 나도 조례시간마다 담임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보다는 화단에 나와 있는 것이 좋았다.

담임이 던져주고 간 호스를 수도꼭지에 연결했다. 호스는 짧았다. 화단의 끝까지 닿질 않았다. 가까운 꽃들에게만 물을 줬다. 매일매일, 병신이라고 중얼거리며 물을 줬다. 몇 주 지나지 않아 물을 많이 먹은 꽃들이 무성하게 썩기 시작했다. 이파리가 누렇게 변색되었다. 줄기에는 허옇고 미끌미끌한 곰팡이가 들러붙었다. (-) 물을 먹지 못한 꽃들은 진짜 병신이 되어갔다. 줄기가 앙상해졌다. 다섯 개가 되어야 할 꽃잎이 세 개, 혹은 두 개가 되었다. 길게 드러눕기도 했다. 햇볕이 내리쬘수록 허리가 꼬부라들었다. 그러면서도 가지는 햇살을 향해 뻗어나갔다. 텔레비전에서 본 화상 환자가 연상되었다. 심한 화상을 입은 환자일수록 손을 뻗어 물을 달라고 애원했다. 누군가 물을 주면 환자는 죽었다. 꽃들은 죽기 위해 햇살을 받으려는 것 같았다. 꽃들은 물 대신 햇살로 목을 축였고, 그래서 오히려 타들어갔다.


(-)


(-) 나는 미래를 예측해본 적이 없었다. 미래를 다짐해볼 때는 많았다. 언젠가 먼 곳까지 가볼 것이다. 먼 곳에서 더 먼 곳을 향해 가며 살 것이다, 이불 속에서 얌전하게 죽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종류의 다짐이었다. (-)

엄마는 크기가 다른 냄비를 써도 라면 물의 양을 정확히 예측했다. 반장은 중간고사에 어떤 문제가 나올지 정확히 예측했다. 선생은 무슨 말을 해야 아이들이 웃을지 예측했고, 아이들은 어떤 말을 해야 선생이 화를 낼지 예측했다. 그렇지만 나는 예측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읍내동에서 쌓아왔던 예측의 기술은 전민중학교에서는 번번이 빗나갔다. 읍내동 중학교의 영어시간에는 유창한 발음으로 영어 교과서를 읽는 아이가 놀림의 대상이 되었지만, 전민중학교의 영어시간에는 모두가 원어민이 되었다. 내가 읍내동에서 선행학습반에 뽑혀 한 학년 위의 수학 문제를 풀고 있을 때, 전민동 아이들은 미분이니 적분이니 하는 두세 학년 위의 수학 문제를 풀었다. 이해받을 거라는 예측으로 던진 말에 선생들은 화를 냈고, 화낼 거라는 예측으로 던진 말에 친구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읍내동에서 그나마 똑똑한 아이로 취급받던 나는 전민동에 오자 멍청한 아이가 되었다. 달라지는 상황 앞에서도 예측이 정확한 사람은 대단한 사람처럼 보였다. 얼마나 많은 냄비를 써봐야 어느 냄비를 쓰든 라면 물을 정확히 맞출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문제를 풀어봐야 어떤 선생이든 무슨 문제를 낼지 알아맞힐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이 꽃을 키워봐야. 얼마나 많이 꽃을 죽여봐야. (-)


(-) 질문에 잘못 대답하면 무언가를 잃었다. (-) 어떤 질문도 우리가 궁금해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를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인터넷 사이트 따위도 (-) 회원가입을 하려면 질문과 답을 선택해야만 했다. 잊어버린 비밀번호를 되찾기 위한 장치라고 사이트는 설명했다.

'존경하는 선생님의 이름은?'

'감명깊게 읽은 책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나는 아무 질문이나 선택하고는 대답 칸에 '재떨이'라고 적어놓았다. 처음 그 답을 입력하던 PC방에서 재떨이가 내 옆에 놓여 있었다. 아무렇게나 적어놓은 답을 반복하자 세상에 없는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재떨이라는 이름의 선생님, 재떨이라는 책, 재떨이라는 장소. 아무렇게나 선택한 낱말 하나가 고유한 대답이 되었다. 누군가 질문을 해올 때마다, 나는 대답하고 싶어졌다.

"주민등록번호가 뭐야."

"재떨이."

이렇게 대답하는 날이 온다면, 처음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그들에게 고백한 날이 될 것 같았다.

어느 날인가부터 인터넷 사이트의 질문 항목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을 선택했다. 답으로 '무인 모텔'을 적었다. 친구의 생일이 다가오면 우리는 몇 주씩 돈을 모았고, 그 돈으로 무인 모텔에 갔다. 환하게 불을 밝힌 무인 정산기는 친절했다. 정산기는 우리를 반가워했다.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고, 질문을 하지 않았다. 무인 모텔은 재떨이를 닮았다. 어니에나 있고, 아무나 쓰고, 아무나 더럽히고, 더럽혀도 다시 새것이 되고, 우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 아침이 되면 순서대로 화장실에 들어가 비치되어 있는 칫솔 두 개로 차례차례 이를 닦았다. 같은 샴푸로 머리를 감고 같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거울 앞에 놓인 스킨과 로션을 같이 발랐다. 아무나 쓸 수 있는 샴푸 냄새와 로션 냄새를 풍기며 같은 냄새가 되었다. 나는 친구들이었다. 전날에 묵었던 손님이었다. 옆방, 윗방, 아랫방 손님이었다. 내일 묵을 손님이었다. 아무나였다. 그날은 세상 누구나의 생일이었다.


(-)


눈썹을 다듬으면서 소영이 내게 물었다.

"강이야. 넌 꿈이 뭐냐."

엄마가 내게 자주 묻던 질문이었다. 

"우리 강이는 꿈이 뭐야?"

어렸을 적에 나는 대답했다.

"종이접기 박사."

어린이날 선물로 아빠가 사준 종이접기 대백과 안에는 색종이 한 장을 접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드는 방법이 들어 있었다. 책의 날개에는 저자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사진 아래에 '종이접기 박사'라고 적혀 있었다. (-)

"그래, 박사님이 될 거구나."

엄마는 나의 대답을 좋아했다. 하지만 가족과 의논해서 장래희망을 적어 내라는 숙제를 받았을 때, 엄마는 '종이접기'라는 글자를 수정펜으로 지우고 '박사'라는 단어만 남겨두었다. 나는 그 종이로 종이접기를 했다. (-)

이제 나의 꿈은 종이접기 박사가 아니었다. 나는 단어를 떠올렸다. 병신. 하지만 최소한 병신은 되고 싶지 않다는 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머리를 긁적였다. 내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또다른 꿈을 떠올리려 해보았다. 나의 태몽이 떠올랐다. 엄마에게 태몽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엄마는 감자 캐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커다란 감자 한 알을 캐서 집에 가져와 불에 구워먹었다고 했다. 숟가락으로 파먹고 또 파먹다가 설익은 부분이 나오면 다시 구워서 여기저기 계속 파먹었다고 했다. 그게 다냐고 물었더니 그게 다지만 맛있게 먹었다고 했다. 파먹히는 감자가 꿀 수 있는 꿈에 대해 생각하다가 나는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


"GPS를 선발하자."

아람은 되도록이면 소영과 함께 있지 않으려고 했다. 우리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아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람과 함께 지내는 것이 조금 더 편안하기 때문에, 친구들은 아람과 함께 있겠다고 했다. 나 역시 그러겠다고 했다. 나도 친구들도 소영에게 미안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이 일을 정의로운 일이라 여겼다. 나도 가끔은 그런 착각에 빠졌다. 아람은 아이들에게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했다. 몰려다니다가 소영과 우연히 마주치는 것을 모두들 피하고 싶어했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아이는 GPS가 되어 소영에게 갔다. GPS는 장소가 바뀔 때마다 우리에게 문자를 보냈다.

"전민상가로 이동중."

우리는 전민상가 정반대로 방향을 틀었다. (-)


(-)


"엄마. 할말이 있어."

"강이야. 무슨 일 있어?"

엄마는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친구 때문에 곤란해졌어."

잠시 입안에서 말을 골랐다.

"나 좀, 응원해줄 수 있을까."

말이 끝나자마자 엄마가 대답했다.

"지금 어디야? 학교니?"

"응, 학교지."

엄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구나. 친구랑 다퉜어?"

"응, 엄마 그게……"

"엄마는 언제나 강이를 응원하지. 살다보면 곤란한 일도 생기고, 친구랑 다투기도 하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들고 그러는 거야. 그렇지만 강이 뒤에는 항상 든든한 엄마 아빠가 있잖아. 곤란할 것 하나도 없는 거야. 당당하게, 도망가지 말고, 어깨 쫙 펴고, 학교 안에서 꿋꿋하게 헤쳐나가는 거야. 학교 밖으로 나가면 지는 거야. 알겠지?"

엄마는 연설을 시작했다. 내가 학교 밖으로 또 도망을 갈까봐 그것만 걱정하고 있었다.

"학교 잘 마치고 집으로 올 거지?"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책상 아래서 대걸레 자루의 나사를 풀기 시작했다. 대걸레의 봉을 쥐고 뒷문을 조용히 나서는 나를 상상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다. 대걸레 봉을 몸 뒤로 숨긴다. 소영의 반 뒷문을 연다. 아니다. 뒷문은 소영의 자리까지 거리가 너무 멀다. 소영의 반 앞문을 연다. 아니다. 앞문 바로 앞에는 선생이 수업을 하고 있다. 다시 뒷문을 연다. 용무가 있는 것처럼 선생을 향해 걸어간다. 방향을 틀어 소영을 향해 달려간다. 봉을 꺼낸다. 소영을 내리친다. 봉이 부러질 때까지 나는 외친다.

"주제에."


(-)



아이들이 없는 전민놀이터를 지나, 국기가 없는 국기 게양대를 지나, 전민상가로 들어갔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피트니스센터를 지나, 유독 다리가 길어 보인다는 교복을 똑같이 수백 장씩 걸어둔 교복 가게를 지나, 전민마켓이 보였다. 마켓 안으로 들어가 둘러보았다. 아는 얼굴은 없었다. 다시 마켓 밖으로 나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상가 이층으로 올라갔다. 마켓 입구가 내려다보이는 난간에 섰다. 몇 시간을 기다렸다. 소영의 엄마가 마켓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층에서 내려와 마켓으로 들어갔다. 진열대를 천천히 돌아다녔다. 정육점 코너에 소영의 엄마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한우 팩을 손에 든 채 소영의 엄마가 돌아보았다.

"강이구나. 뭐 사러 왔니?"

"엄마가 식칼을 사오라고 전화를 해서요. 칼이 잘 안 든대요. 그런데 칼 종류가 많아서 어떤 칼을 골라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소영의 엄마는 나와 함께 주방용품 코너로 갔다.

"어떤 용도로 쓴다고 하시던?"

"고기요."

(-)


(-)


책상에 앉았다. 아이들은 인사를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나를 보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책상 옆에 걸었다. 가방의 지퍼를 조금 열어두었다. 가방에 손을 넣어보았다. 어렵지 않게 식칼이 잡혔다. 잘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필통을 꺼냈다. 아이들은 책상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손거울을 보며 립글로스를 바르면서, 잘게 부순 라면을 먹으면서, 나를 주시했다. 아람이 다가왔다. (-)

"튀김 숙제 했어?"

"뭐?"

아람은 내 필통 속에 있는 볼펜들을 하나씩 꺼내 구경했다.

"일 교시 튀김이잖아."

"아니."

"나도 안 했는데. 같이 맞게 생겼네."

아람은 볼펜을 다시 필통에 넣은 후 일어났다. (-)


수학 선생이 들어왔다. 손에는 튀김용 나무젓가락이 들려 있었다. 튀김 선생은 숙제를 하지 않은 아이들의 손등을 튀김용 나무젓가락으로 때리곤 했다. 맞은 아이들의 손등에는 새빨간 줄이 생기곤 했다.

"숙제 펴서 책상 위에 올려놔. 안 해온 사람 일어나."

나와 아람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손등을 내밀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지난번에 교무실 한켠 학생주임과 담임 옆에 튀김 선생은 앉아 있었을 것이다. 튀김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나와 부모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튀김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음."

선생은 교탁으로 돌아가 튀김 젓가락을 휘두르며 말했다.

"다음에 또 안 해오면 두 배로 맞을 줄 알아."

운이 좋은 날이었다. 운이 나쁠 징조였다.


쉬는 시간에 다시 아람이 내 앞에 앉았다. 내 볼펜들을 꺼내 다시 구경했다.

"아람아."

나를 보고 '좆밥'이라고 말했던 아이가 교실 뒷문에 서 있었다. 아람은 내 볼펜으로 자기 손바닥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문에 서 있던 아이가 나와 아람을 향해 다가왔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가방은 왼편에 있었다. 나는 오른손잡이였다.

'오른쪽에 놓을 걸 그랬나.'

나는 침을 삼켰다.

'어이, 좆밥. 학교 왔냐.'

'아람아, 좆밥 자리에서 뭐해.'

아람이 손바닥에 '좆밥'이라고 쓰고 있을 것 같았다. 아람과 그 아이는 아람의 손바닥을 보며 함께 커다란 목소리로 그걸 읽을 것이다.

'좆밥.'

뒷골에 전율이 왔다.

"뭐해?"

그 아이가 아람의 손을 보며 물었다.

"펜이 잘 나와."

아람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고양이 한 마리가 윙크를 하고 있었다.

"그러네."

아람은 볼펜을 필통 속에 넣었다. 그 아이와 아람은 복도로 나갔다.


기다렸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쉬는 시간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방만 보면서 준비를 했다. 아이들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나를 놀리지 않았다. 부르지 않았다. 바라보지 않았다. 내부인도 외부인도 아닌,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


아람은 가끔씩 식판을 들고 내 자리로 왔다. 가끔씩 아람은 소영의 반에 가서 소영과도 급식을 먹었다. 책가방에는 식칼 한 자루가 늘 있었지만,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까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식칼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나 혼자였고, 그 식칼을 무서워하는 것도 나 혼자였다.

화장실에 가기 시작했다. 밥을 먹으면 예전처럼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선생이 던지는 농담에 아이들을 따라 웃기 시작했다. 최악의 병신이 될 희망은 점점 사라져갔다. 가짜 희망들이 몸을 간질였다. 웃지 않은 것 같았는데 입이 먼저 웃었다. 병신이 된 후에도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는 것이 진짜 병신이었다. 급식으로 특식이 나오는 날에는 기분이 나아졌고, 엎드려 잠이 들었을 때 등에 떨어지는 햇살은 포근했고, 아람이 가끔은 괜찮은 아이로 느껴졌고, 하루하루가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 나는 최악의 병신이 되는 일에도 실패한 최악의 병신이었다.

칼을 꺼낼 용기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 그런 나를 편안해하기 시작했다.


(-)


"왔으니까 된 거야."

텔레비전을 바라보면서 아빠가 말했다. 그리고 바람이 빠지는 공처럼 스르륵 자리에 누웠다. 드라마다 끝나자 엄마와 나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잠시 후 엄마는 말없이 일어났다. 이불을 가져와 아빠에게 덮어주었다. 걸레를 들고 텔레비전을 닦고, 방을 닦았다. 닦을 것을 다 닦고 나자 행주를 삶았고, 행주를 다 삶고 나자 집안을 서성거렸고, 그러다 정화수 앞에서 절을 했다. 예전에 엄마는 절을 할 때마다 기도의 내용을 내가 다 들을 수 있게 큰 목소리로 읊곤 했다. 그러다 울먹거리는 음성을 기어이 내게 들려주곤 했다. 오늘의 엄마는 달랐다. 울먹이는 목소리 없이, 자신의 손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절을 반복했다.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내 방은 변한 것이 없었다. 다만, 내 물건을 뒤덮고 생필품들이 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내 필통과 공책들이 그대로 있었지만, 개사료 포대와 명절 선물 세트 몇 개가 가방을 놓던 자리에 놓여 있었다. 침대 위에는 떡가래 같은 흰 초가 한가득 들어 있는 상자가 올려져 있었다. 다른 용도가 되어버린 내 방을 둘러보며 내가 알던 부모도, 이 방에 살던 나도, 이제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

'사라사라 시리시리 소로소로 못쟈못쟈 모다야 모다야……'

경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되어 있었다.

"무슨 뜻이야?"

"엄마도 몰라. 알아서는 안 되는 거야."

"알면 안 된다고?"

"우주선에 원숭이를 태운다고 해보자. 우주선의 원리를 원숭이가 알 수는 없겠지. 하지만 원숭이도 우주선의 빨간 버튼 하나만 누르면 우주에 갈 수 있잖니. 신의 뜻도 사람은 알 수 없는 거야. 하지만 경을 외면 지옥에 떨어진 사람도 꺼낼 수가 있어."

엄마는 천수경의 한쪽 페이지를 나의 손에 쥐여주었다.

"읽어봐. 아무것도 이해하려 하지 말고."

엄마는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그만두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엄마에게 천수경을 돌려주고 일어섰다. 부엌 찬장을 열어 칼갈이를 찾아 방에 들어왔다. 옷장 속에 칼갈이를 넣어두었다.


(-)


"소영아."

나는 식칼을 꺼냈다. 소영이 뒤돌아보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나를 보았다.

"나야."

소영은 눈을 깜빡거렸다. 소영의 눈꺼풀이 소영의 눈동자를 닫고 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소영의 기억이 조금씩 열리는 것을 보았다.

"아, 읍내동 살던 애."

소영은 식칼에 한번 눈길을 주고는 내 얼굴을 다시 보았다.

"뭐하니?"

차 한 대가 우리 옆을 느리게 지나갔다. 나는 식칼을 숨기지 않았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소영은 떨리는 칼을 바라보았다.

"찌르려고?"


(-)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갔다. 아람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가 바뀌었더라도 상관없었다. 아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강이."

아람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공중전화 부스의 유리창에 손을 대어보았다.

"그 집으로 돌아갔구나."

"응."

"나한테 왜 그랬어?"

아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유리창의 마른 빗물 자국을 나는 손끝으로 닦아보았다. 선명한 얼룩이었지만 이 안에서는 만져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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