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 - 신학자 현경이 이슬람 순례를 통해 얻은 99가지 지혜
현경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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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은 광주항쟁이 있었던 해이고, 내 나이 24세였다. 광주의 원혼이 떠돌며 울고 있던 한국에서 나는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항상 목이 말랐다. 김지하 시인의 시구,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가 주문처럼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당시 나는 한국기독학생운동에 깊이 참여하고 있었다. 서울 주변 빈민촌에서 도시 빈민들과 성 노동자 여성들의 아이들을 위한 야학 선생을 했고, 동대문 시장 근처의 한 노동조합에서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오락 선생도 했다. 그리고 대학원 1학년생으로 금서였던 한국의 민중신학, 남미의 해방신학 책들을 몰래 공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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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달리 용감하지도 철저하지도 못했던 나는 어떤 의미에서 학생운동의 '주변인'이었다. 그때는 잘 몰랐었지만 지금 뒤돌아보니 나는 선과 악이 칼날같이 구분되는 이분법적 우주를 영혼의 바닥에서부터는 믿지 않았던 것 같다. 좋은 시절에 태어났다면 무정부주의자, 자연주의자, 아니면 아무 주의자도 아닌 것이 내게 가장 어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는 "선과 악이 싸울 때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라는 시대의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대답은 어떤 편을 선택하는 행동으로 이어졌고 그 행동은 나 같은 주변인도 경찰서에 잡혀가게 만들었다.

어느 날 나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 명의 사복경찰에게 납치되어 눈이 가려진 채 까만 승용차에 실려 갔다. 그들이 데려간 곳은 경찰서 지하실이었다. 우리들이 '고문실'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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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주는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해도 내가 두렵지 않음은 주가 나와 함께하시고 그의 지팡이가 나를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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