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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3 1호 - 2017년 1호, 창간호
문학3 기획위원회 지음 / 창비 / 2017년 1월
평점 :
품절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 「리듬 0」: 비인칭적 장소로서의 몸
(-) 그녀는 1997년 찌는 듯이 더운 한낮의 베네찌아 어느 건물 지하실에서 나흘 동안 매일 여섯시간씩 1500개가량의 소뼈에 묻은 피를 닦는 「발칸 바로크」라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유고 내전으로 죽은 수많은 사람들을 애도하는 이 퍼포먼스로 그녀는 그해 베네찌아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또한 2010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vramovi: The Artist is Present)에서는 3월 14일부터 5월 31일까지 매일 전시장 한가운데 의자에 앉은 채 침묵 속에서 건너편 의자의 관객을 응시하는 퍼포먼스를 총 736시간 30분 동안 진행했다. 1973~74년에는 리듬시리즈―「리듬 10」 「리듬 5」 「리듬 2」 「리듬 4」 「리듬 0」―를 제작했다. 가령 「리듬 10」은 20여 개의 온갖 칼을 이용해서 빠른 속도로 손가락 사이를 찍는 한시간가량의 퍼포먼스이고, 「리듬 2」는 긴장병과 조현병 환자가 먹는 약을 먹고 정신은 멀쩡하지만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뻣뻣해진 상태를 일곱시간 동안 견디는 퍼포먼스이다. 리듬시리즈의 마지막 퍼포먼스인 「리듬 0」는 전작들과 달리 작가 자신은 마조히스트 역할만 맡고 새디스트 역할은 관객들에게 넘긴 작업이다.
이딸리아 나뽈리에 소재한 스튜디오 ‘모라’에서 저녁 여덟시부터 새벽 두시까지 총 여섯시간 동안 아브라모비치는 물건처럼 정지해 있었다. 그저 지나가던 사람들을 포함한 관객들을 맞이한 것은 전시장 입구에 비치된 지침서의 문장 “사람들이 내게 하고 싶은 것을 도와줄 72개의 물건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퍼포먼스. 나는 물건/대상이다. 이 시간 동안 일어난 것은 전적으로 내가 책임진다.”였다. 그리고 전시장 한켠에는 그녀가 “매우 신중하게 골라온” 물건들, 즉 ‘쾌락’을 위한 물건―립스틱, 향수, 장미, 스카프, 거울, 유리잔, 카메라, 깃털, 헤어핀, 책 등―과 ‘고통’을 위한 물건―채찍, 사슬, 바늘, 가위, 망치, 톱 등―그리고 ‘죽음’을 초래할 물건들―총, 탄알―이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쭈뼛거리며 서로의 눈치만 보던 관객들은 세시간쯤 지나 마침내 아브라모비치에게 다가왔다. 우선 누군가가 면도칼로 그녀의 옷을 찢었고, 누군가는 립스틱으로 그녀의 몸에 글자를 적었고, 누군가는 그녀의 머리에 물을 부었고, 그녀의 노출된 상반신을 장미가시로 찌르는 사람이 있었고, 목에 면도칼로 상처를 내고 그 피를 마시는 사람이 있었고, 사소한 성폭력을 행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마침내 장전된 총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 그녀의 목을 겨누게 만든 누군가가 등장했다. 관객들은 작가를 보호하려는 측과 더 고통을 주려는 측으로 양분되어 싸우기도 했다. 물건/대상이었던 그녀는 함부로 다뤄지거나 존경과 연민의 대상이 되었다. 아브라모비치는 어떤 의도, 내면, 인간성도 없이 그냥 서 있거나 눕혀졌다. 새벽 두시 무렵 아브라모비치는 움직였고 관객에게 다가가자 그들은 도망갔다. 그녀는 이후 이 퍼포먼스를 두고 “내가 얻은 경험은 퍼포먼스가 아주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결정을 관객에게 맡기면 살해당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술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