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애들한테 동화를 읽어주고 세상에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고 가르치죠.” 내가 『부모와 다른 아이들』을 쓸 때 수가 내게 한 말이다. “지금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선해질 능력이 있고 또 나쁜 선택을 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하겠어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선한 면과 악한 면, 둘 다를 사랑해야 한다고요.”
“이 일이 일어났을 때 처음에는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아예 결혼도 하지 않았더라면.’ 생각하곤 했어요.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서 톰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딜런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 끔찍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하고요.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 아이들을, 바로 그 아이들을 낳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아픔을 겪긴 했지만, 그래도 내 아이들에게 느끼는 사랑이 내 삶에서 가장 큰 기쁨이었으니까요. 제가 말하는 아픔은 제 아픔이지 다른 사람들의 아픔은 아니에요. 하지만 제 아픔은 받아들였습니다. 삶은 아픔으로 가득하고 이 아픔은 제 것이지요. 딜런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세상에는 더 좋은 일이었다는 것을 알아요. 그렇지만 저에게는 그렇지 않아요.”
딜런을 키우는 일은 끝이 났다. 이 아이를 만들어내는 데 들였던 모든 사랑과 노력이 끝이 났다.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 불교 경전에 기사 고타미라는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는 이 여인의 아기가 죽으면서 시작된다. 기사 고타미는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의원에게 약을 달라고 하는데, 의원은 어떤 방법을 써도 아이를 살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의원은 기사 고타미를 붓다에게 보내고, 붓다는 아무도 고통을 겪은 일이 없는 집에서 흰 겨자씨 너덧 알을 얻어오라고 시킨다. 기사 고타미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아기를 살릴 약이 필요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겨자씨를 내주려고 했지만, 그 사람들에게 가까운 사람을 잃은 일이 있냐고 확인해보면 하나같이 그렇다고 답했다. 결국 기사 고타미는 붓다에게 돌아간다.
“아니요. 그렇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일이 없는 사람은 없음을 알게 되어 제 아이를 편히 쉬도록 놓아주었습니다.”
내 마음속에 딜런이 쉴 곳을 찾는 데에는 여러 해가 걸렸다. 그리고 나 자신이 쉴 곳을 찾기 위한 답을 찾는 데에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바이런이 자살할까 봐 겁이 났다. 나는 바이런을 부당하게 괴롭혔다. 바이런이 당연히 괜찮지 않을 때 괜찮다는 다짐을 받으려고 했다. 실상 괜찮아야 한다고 강요한 셈이다.
끔찍한 폭력이 벌어졌다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나도 범인의 가족은 어떤 이들일까 생각했었다. 부모가 가엾은 아이에게 어떻게 했길래 저런 사람으로 자라났을까 생각했다. 따뜻한 환경에서 사랑으로 키운 아이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족에게 책임이 있다는 설명을 언제나 한 치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부모가 무관심하고, 무책임하고, 어쩌면 학대했을지도 모른다고 확신했다. 엄마가 아주 신경질적인 사람이거나, 숨 막히게 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무기력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딜런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어야 해요. 친구나 동지가 옆에 있어줬어야 했는데. 분노와 우울을 부추기는 게 아니라 달래줄 친구요.
이건 아셔야 해요. 부모님은 그 친구가 되어줄 수 없다는 걸요. 형 바이런도 마찬가지고요. 성장과 분리 과정에 있기 때문에 감추어왔던 고통스러운 문제를 부모나 형제자매에게 털어놓기는 극히 힘듭니다.
C. S. 루이스는 아내가 죽은 뒤에 쓴 아름다운 사색록 『헤아려 본 슬픔』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한다. “슬픔이 공포와 비슷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 지역 대학에서 일할 때 학생 한 명이 장애인으로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인지 말해준 적이 있다.
“누구든 장애를 가장 먼저 봐요. 그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사람이기 이전에 장애인인 거예요.”
그때에는 그 말에 담긴 통찰이 내 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런데 콜럼바인 이후에야, 그 학생이 한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영원히 살인자를 키운 엄마로 비춰질 것이며 어느 누구도, 나 자신조차도, 나를 다른 존재로 보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가스등」이라는 고전 영화에서 샤를 부아예가 맡은 인물은 잉그리드 버그먼이 연기하는 자기 아내를 미친 사람으로 몰아가려고 한다. 샤를 부아예는 그림과 보석을 다른 데로 치우고 아내의 가방에 엉뚱한 물건을 넣어두고 아내가 ‘훔쳤다’고 주장한다. 효과가 있어서 아내는 자신의 현실감각을 의심하게 되고 신경쇠약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 무렵에 나의 정체성을 다시 찾으려고 애쓰던 나는 이 영화를 종종 떠올렸다. 나는 내가 좋은 엄마라고 생각했었다. 내 아들을 사랑하고 뿌듯하게 여겼었다. 딜런이 살아 있을 때에는 딜런이 정말 중대한 문제를 겪고 있다고 생각할 만한 모습은 전혀 보지 못했다. 지금 돌아보아도 뚜렷하고 확실한 징후는 없었다. 그래서 인지부조화가 심했다.
“좋은 부모라면 아이들이 어떤 상황인지 알죠.” 컴퓨터교사의 말이 어떤 악의에 찬 독설보다도 더 아프게 나를 찔렀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료들이 자신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나는 내 고통은 그게 아무리 막대하고 엄청나게 느껴지더라도 나의 고통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도 고통을 받았다. 이들도 끔찍한 일을 겪고 살아나갔다.
에릭과 딜런이 책상으로 가서 무기를 다시 장전했다. 에릭이 딜런이 아는 존 새비지라는 아이를 봤다. 존이 딜런에게 뭐하는 거냐고 묻자 딜런이 “어, 그냥 사람들 죽이는 거야.”라고 대답했다. 존은 자기도 죽일 거냐고 물었다. 딜런이 존에게 가라고 했다. 존은 달아났다.
마지막 부분이 가장 짧았다. 나한테는 가장 힘겨운 부분이었다. 아이들이 계획을 수행하러 학교로 가기 전에 잠깐 멈춰서 작별의 말을 하는 영상이었다. 둘이 소풍이라도 가는 듯 주위에 짐이 쌓여 있었다. 에릭은 가족들에게 자기 물건을 어떻게 나누어주라고 이야기했다.
딜런은 분노의 말을 내뱉거나 미움과 복수 같은 것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죽음이나 파괴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앞쪽에 보이던 허세도 사라지고 없다. 그런다고 울지도 않는다. 체념한 듯 무미건조하다. 학교로 가서 자기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으니까. 카메라에서 시선을 돌리고 혼잣말하듯 작은 소리로 말한다. “이제 더 나은 곳으로 간다는 건 아니까. 사는 게 그다지 좋지 않았으니…….”
“‘정신’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죠. 그래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불안, 오명이 덧붙여집니다. 하지만 뇌에는 영상으로 보고 측정하고 수량화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물리적·실제적 증거가 있습니다. 뇌건강과 뇌질환이라는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세계로 이해의 범위를 옮겨가야 합니다.”
이 학술지에 청소년 자살 예방에 대한 글이 있었다. 첫 번째 문단에서 저자가 이런 말을 했다. “콜럼바인 비극을 폭력적 비디오게임이나 느슨한 총기관리법 같은 외부의 영향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기는 쉽다. 그렇지만 그날 일어난 엄청난 사망과 부상 가운데 자살로 죽은 두 소년이 있었다.”
자살을 생각하는 것은 병의 증상이고 무언가 이상이 있다는 징후다. 대부분의 자살은 한순간에 충동적인 결정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자살은 대부분 고장 난 사고와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싸워오다가 마침내 그 싸움에서 패배했을 때 일어난다. 자살하려는 사람은 자기 고통을 더 이상 감내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죽고 싶지는 않더라도, 죽으면 이 고통이 끝나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한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세상에서 딜런을 왕따로 보는 것에 저항해왔다. 딜런에게 가까운 친구가 있었고(에릭뿐 아니라 잭과 네이트도 있었다.) 남녀 구분 없이 다른 아이들과도 잘 어울려 놀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딜런의 일기가 우리가 생각하는 딜런의 삶과 딜런 자신이 바라보는 것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자살 유가족들이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도 하다.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정리해주면 도움이 될 것 같군요.
1. 부모님이 어떻게 해서, 혹은 어떻게 하지 않아서 딜런이 그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2. 딜런이 어떤 상태인지 부모님이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딜런은 원래 비밀이 많은 아이고 자기 내면을 부모님뿐만 아니라 자기 주위 모든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감추었습니다.
3. 삶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딜런의 심리작용은 심하게 악화되어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4. 이렇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딜런의 이전 자아가 아직 남아 있어서 총격 도중에 최소 네 명을 살려주었습니다.
—피터 랭먼 박사의 이메일(2015년 2월 9일)
(-) 에드 코피는 ‘완벽한 우울증 관리’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에 속한 사람들의 자살률을 0으로 유지하는 게 목표다. 누군가가 자살하는 사람을 0으로 줄이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냐고 물으면 이렇게 쏘아붙인다고 한다. “그럼 목표를 몇으로 잡을까요? 여덟 명?
(-) 학교 총격 사건을 일으킬 잠재성이 있는 아이들 여럿과 대화를 나누어 끔찍한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막았다. 란다조 박사는 이 아이들의 정신적 동요와 좁은 시야를 자세히 묘사했다. “절망의 어떤 단계에 이르면 탈출구를 찾는다. 다른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1월, 참사가 일어나기 세 달 전에 톰이 왼쪽 어깨 관절 일부를 치환하는 수술을 받았다. 종일 병원에 있다가 저녁 때 집에 돌아왔는데 딜런이 내가 시키고 간 일을 해놓지 않았다. 무슨 일을 시켰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저녁에 먹게 브로콜리를 다듬어놓으라거나 가게에 가서 우유 한 통 사오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자동응답기를 들어보니 딜런이 수업도 하나 빼먹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양이 밥도 주지 않고 방에서 자고 있었다. 내가 병원에서 아빠를 돌보는 동안에 딜런은 이렇게 엉망으로 하고 있었다는 게 화가 나고 실망스러워서, 딜런에게 그렇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자살로 식구를 잃은 다른 사람들과 수도 없이 나누었다. “왜 자기 짐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얼마 전에 만난 엄마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기적으로 굴지 말라고 야단쳤어요.” 말다툼을 벌이고 나서 나흘 뒤에 딸이 죽었다. (-)
참사 이후로 이날의 대화를 다시 떠올려보지 않는 날이 단 하루도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딜런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간다. 멍한 표정(자살연구가 토머스 조이너는 “1000야드 시선”이라고 부른다)은 자살이 임박했다는 경고 증상인데 놓치기가 아주 쉽다.
톰이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해 몇 마디 하자 딜런은 자기는 아이는 낳지 않을 거라고 한다. 톰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하자 딜런이 말한다. “알아요, 알아요. 언젠가는 이때를 돌아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하겠죠?”
어느 날 오후, (자살과는 상관이 없는) 오래된 친구와 같이 점심을 먹었다. 친구는 이렇게 물었다. “넌 딜런이 한 일을 용서할 수 있니?” 나는 충격을 받아 할 말을 잃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크게 갈라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머릿속에는 영화 「보통 사람들」에서 벅의 젖은 손이 콘래드의 손에서 미끄러져 벅이 물에 빠져 죽는 장면만 떠올랐다. 나는 방어적으로 들리지 않게 내 감정을 말하려고 생각을 골랐다. “딜런을 용서한다고? 내 자신을 용서하는 게 내 일이야.” 벅처럼, 딜런은 내 손에서 미끄러졌다. 내가 딜런을 실망시킨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어느 날 나는 포도 넝쿨 너머에서 동료가 이렇게 말하는 걸 우연히 엿들었다. “아이가 그런 일을 겪는데 엄마가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돼요.” 그 동료와 내가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나는 상처를 받았다. 동료가 내가 딜런의 계획을 알았다고 생각한다는 것, 딜런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끊을 계획을 세우는 데에도 수수방관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자 딜런이 죽은 직후처럼 돌 연마기 속으로 다시 들어간 것 같았다.
그 말을 계속 곱씹지 않을 수가 없었고, 나보다 이 길에 들어선 지 더 오래된 유족 한 명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렇게 생각했었어요. ‘당신도 이런 일을 당해보면 그렇게 말하지 않겠지. 당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잔인한 말을 했는지 깨달을 기회가 오기를 바라.’”
(-) 지금 나는 불안은 내가 평생 함께 살며 관리해야 할 뇌의 이상이라는 걸 안다. 위기를 겪고 있지 않을 때에도 언제든 불안이 닥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취약성이 있기 때문에 나는 내 스트레스 반응을 세심하게 살핀다. 뇌졸중 고위험군이 혈압을 신중히 관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명상, 요가, 심호흡을 하고 날마다 운동을 한다. 심리치료를 받고 그걸로 부족할 때에는 항우울제를 먹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내 불안에 귀를 기울이고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일러주는 지표로 인식하게 되었다.
하버드대학교 심리학자이자 자살연구가 매슈 녹 박사는 ‘의사결정기능장애’라는 내 마음에 쏙 드는 표현을 썼다. 자살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겨진다면, 그게 진정한 자유의지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
(-) 물론 딜런이 그냥 자살로 생을 끝낸 것은 아니다. 살인을 저질렀다. 사람을 죽였다. 누구나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의 분노를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충동을 느꼈던 것 자체에 놀라고 질겁하는 반면, 왜 어떤 사람은 그것을 실행에 옮기게 되는 걸까?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일부러 해친다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은 무엇의 지배를 받을까? ‘악’이란 양심의 부재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어떻게 사람이 양심을 잊게 되는가?
무릎을 다치면 걸을 수 없을 지경이 될 때까지 병원을 찾지 않고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관절에 얼음찜질을 하고, 다리를 높이 괴고, 운동을 쉬다가 며칠 지나도 차도가 없으면 정형외과에 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신건강 문제에 있어서는 진짜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병원을 찾지 않는다. 아무도 다친 무릎을 의지와 용기로 낫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낙인을 피하려고 스스로 벗어날 방법을 찾으려고만 한다.
사람들이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왜?’이다.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 나는 ‘어떻게?’라고 묻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지 설명하다 보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해결책 없이 단순한 해답에 안주하고 만다. 이미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자살에 대한 취약성이 있는 사람만이 죽음을 삶의 고통을 끝낼 논리적 해결책으로 떠올린다. 자살은 병의 결과물인데, 마치 좌절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바라보게끔 만드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