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 얼마 후 코즈모가 실제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사람들이 어디를 얼마나 오래 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국 할아버지가 이삼일 후에 그 집의 맨 위층에서 코즈모를 발견했다. 오랫동안 잠가두었던 아이들 방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작은 스툴 위에 앉아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가끔씩 보스턴이나 헬리팩스(-)로 가는 증기선들이 느릿느릿 지나가는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왜 거기로 올라갔느냐는 할아버지의 물음에 코즈모는 형이 잘 지내는지 보려고 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그에게 형은 없었다. 코즈모의 상태가 다소 호전되자 암브로스 할아버지는 (-) 의사의 권유에 따라 코즈모와 함께 캐나다 고산지대에 있는 밴프로 갔다. 두 사람은 유명한 밴프 스프링스 호텔에서 여름 내내 머물렀는데, 코즈모는 고분고분하지만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멍한 아이처럼 행동했다. (-) 10월 중순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데, 코즈모는 창가에 서서 호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엄청나게 큰 전나무숲과 까마득한 높이에서 고르게 쏟아지는 눈송이들을 몇 시간이고 쳐다보았다. 그는 손수건을 말아서 쥐고 있다가 절망감이 밀려올 때마다 그것을 깨물었다. (-) 코즈모는 (-) 그해가 저물기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

 

 

  (-)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방갈로 앞 보도에 서 있는 피니 이모의 모습은 그 전날 이모 자신이 내게 그려주었던 아델바르트 할아버지의 모습과 똑같았다. 너무 무거워 보이는 검은 겨울외투를 입고 나를 향해 손짓하다가 이모는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차의 백미러를 통해 보이는 이모의 모습이 하얀 배기가스 속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이후로 누군가가 나와 이별하면서 손수건을 꺼내들었던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뒤 며칠 동안 뉴욕에 머무르면서 나는 눈물 마를 날이 없던 테레스 이모의 삶과, 아욱스부르크의 유대인 회당 지붕에서 일하는 카지미르 외삼촌의 모습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나의 관심을 끌었던 사람은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가 생을 마감한 병원으로 직접 가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당시로서는 곧장 그 병원에 갈 생각까지는 없었다. (-) 1984년 초여름이 되어서야 나는 이타카에 가보기로 했다. 지독하게 알아보기 어려운 필체로 적어놓은 아델바르트 할아버지의 1913년 여행일기를 겨우 해독하고 나자, 이타카로 가는 일을 더 미루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갔고, 도착하자마자 자동차를 빌려 17번 고속도로를 타고 북서쪽으로 차를 몰았다. 도로 주변으로는 크고 작은 고장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름만 귀에 익은 고장들도 있었지만 실은 어디 박혀 있는지도 몰랐던 곳들이었다. 먼로, 몬티첼로, 미들타운, 우츠보로, 워워씽, 콜체스터, 카도씨아, 디포짓, 델하이, 네버씽크, 니니베 등의 이름을 스쳐지나면서 나는 내가 자동차와 함께 원격 조종을 받으며 거대한 장난감공원을 누비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거인족의 아이가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다른 세계의 폐허에서 마을 이름들을 골라 거기에 갖다 붙여놓은 것 같았다. (-) 차들의 속도가 거의 똑같았기 때문에 다른 차를 추월하는 일도 드물었는데, 그래도 추월하는 경우에는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나란히 달리는 두 대의 차에 탄 사람들이 서로 제법 면식을 쌓을 정도였다. 나 역시 반시간가량 어떤 흑인 가족의 차와 나란히 달리게 되었는데, 내게 온갖 신호와 웃음을 보내는 그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내가 그 집 식구들의 좋은 친구라도 된 듯했다. 헐리빌로 빠져나가는 출구에서 그 차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내게서 멀어져갈 때, 아이들은 뒤쪽 차창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고 어릿광대 같은 표정을 지어 나를 웃겼다. 결국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한동안 버림받은 사람처럼 몹시 허전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도로는 거대한 고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오른쪽으로 늘어선 언덕들과 작고 둥근 산들이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며 북쪽 지평선 근처에 있는 중간 규모의 산맥으로 이어져 있었다. (-) 인적이 거의 없는 고지대를 바라보고 있자니, 어릴 적 수도원학교를 다닐 때 세계지도 위로 몸을 수그리고 미국의 여러 주들을 돌아다니는 상상을 하면서 아릿한 동경을 느꼈던 기억이 났다. 당시에 나는 미국의 주 이름들을 알파벳 순서에 따라 모두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미국에 몰입했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지루하던 지리 시간, 대낮인데도 창밖이 새벽처럼 침침하던 그때, 나는 지금 내가 달리고 있는 이 지방뿐만 아니라 북쪽의 고지대에 있는 아디론덱 산맥까지 샅샅이 훑어보았다. 이 지방의 풍경이 고향과 아주 흡사하다고 카지미르 외삼촌이 내게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 애브램스키 박사에게서 맨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극도로 흥분한 사람처럼 잔뜩 치솟아 있는, 촘촘하고 새빨간 머리카락이었다. (-) 박사는 내가 갑자기 나타난 것에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내게 고리 세공 의자를 내밀어주더니, 다시 양봉 작업을 계속하면서 내가 하는 말을 들었다. 이윽고 내가 말을 끝내자, 그는 도구들을 옆으로 치우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코즈모 쏠로몬은 직접 보지 못했지만, 당신의 할아버지는 압니다. 1949년, 그러니까 내가 서른한살 때 수련의로 판슈톡 교수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아델바르트 씨의 경우를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내 생각이 완전히 바뀌기 시작하던 즈음에 그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은 덕택에 나는 판슈톡 교수가 죽고 난 뒤 몇십년 동안 정신과의사로서의 활동을 차츰 줄여나가다가 결국 완전히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깥 생활을 시작한 것이 1969년의 일이니, 얼마 전에 퇴직 십오주년을 맞았지요. 날씨에 따라 보트 창고나 양봉장에서 지내면서 이른바 현실세계의 일은 잊고 삽니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내가 영락없는 미친 사람이겠지만, 당신도 아시다시피 이런 문제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지요. 사마리아 병원이 텅 비어 있는 것은 보셨을 겁니다. 내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병원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이 호화로운 나무궁전 안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불행이 쌓여갔는지 아마 아무도 제대로 모를 겁니다. (-)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씨가 친척들의 뜻에 따라 입원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의 감독을 받겠다고 나섰던 것은 사실입니다. (-) 판슈톡 교수는 그가 노년의 중증우울증이 무감각한 긴장병과 결합한 경우라고 진단했지만, 보통 이런 상태에 수반되는 육체적인 퇴락현상이 그에게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딘가 모순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외양에 지극히 공을 들였지요. 언제나 완벽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나비넥타이를 깔끔하게 맨 모습이었어요. 그런데도 그가 그냥 창가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만 보아도 어떤 극심한 불치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지요. 당신의 할아버지만큼 심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의 사소한 말들, 몸짓들, 죽는 날까지 그대로 유지하던 습관들, 이 모든 것들이 실은 세상에 거듭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으려던 분이어서 식사때만 되면 어김없이 식당에 나타나 음식을 받기는 했지만, 그분이 실제로 먹는 양은 옛날 사람들이 사자(死者)의 시신과 함께 무덤에 묻었던 상징적인 식량만큼이나 적었지요. 당시 아델바르트 씨가 얼마나 기꺼이 충격요법을 받아들이는지, 그런 모습이 내 눈에도 띄었어요. 그때는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1950년대 초반에 시행되었던 충격요법은 실로 고문이나 학대에 가까웠습니다. 다른 환자들의 경우에는 대개 완력을 써서 강제로 기구실로 끌고 가야 했는데(-), 아델바르트 씨는 예정된 시각만 되면 정확하게 나타나 기구실 문앞에 앉아서 머리를 벽에 기대고 눈을 감은 채 자신에게 닥칠 일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 처음 정신과의사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충격요법이 인간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지요. 판슈톡 교수가 내게 ‘실제 경험들’을 여러 번 생생하게 설명해주기도 했고, 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인슐린 투여를 통해 간질병과 유사한 발작을 일으키는 방법을 쓰면 환자들이 퍼렇게 변한 일그러진 얼굴로 몇분 동안 웅크린 채, 이를테면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인다는 보고도 들었으니까요. 이런 방법과 비교하자면 전기치료의 도입은 그 자체로서 이미 상당한 진보였다고 할 수 있었지요. 충격의 양을 정확하게 조절하고, 심한 반응이 나타나면 치료를 즉각 중단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 판슈톡 교수는 1차 세계대전 직전에 렘베르크(-)의 병원에서 신경정신과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정신의학이 주로 입원환자들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억제하는 데에 집중하던 시기였지요. 그 때문에 그는 이를테면 태생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고의 경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충격요법을 받은 환자들이 대부분 정신이 황폐해지고, 기능저하를 보이고, 의기소침한 태도가 현저해지고, 사고능력이 저하되고, 근육의 긴장도 떨어지고, 심지어 전혀 말을 하지 않게 되어도 그런 것을 치료의 성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병원의 첫 환자 중 한사람이었던 아델바르트 씨가 여러 달에 걸쳐 진행된 일련의 충격요법을 받으면서 다른 환자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지극히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을 새로운 요법의 성과로 치부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당시에 이미 나는 아델바르트 씨의 그런 태도가 실은 자신의 사고능력과 기억능력을 가능한 한 근본적이고 철저하게 말살시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 내가 당초에 판슈톡 교수를 믿게 된 것은 아마도 그의 오스트리아 억양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의 억양을 들으니 (-) 나의 아버지 생각이 났던 것이지요. 판슈톡 교수는 고향 린츠(-)에서 자리잡아보려고 했고, 내 아버지는 빈의 레오폴트슈타트(-)에서 술장사를 하며 살아보려고 했었는데, 두 사람 모두 당시의 열악한 상황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1921년초에 미국을 향해 떠났고, 판슈톡 교수도 그해 여름에 뉴욕으로 갔지요. 판슈톡 교수는 곧 의사로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 같은 시기에 내 아버지는 로우어 이스트 싸이드의 소다수 공장에서 일어난 보일러 폭발사건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고 뒤, 군데군데 몸이 탄 아버지의 시체가 발견되었지요. 브루클린에서 자라면서 나는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했습니다. (-)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산송장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사마리아 병원의 수련의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 판슈톡 교수가 내 아버지와 여러모로 비슷했기 때문에 일체의 비판적인 태도를 버리고 무조건 그를 따르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

  (-) 당신의 할아버지는 운명하시기 전에 관절과 사지가 점점 마비되는 증세를 보였는데, 아마도 충격요법 때문이었을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델바르트 씨는 자기 몸을 추스르는 것조차 아주 힘들어했지요. 옷을 입는 데에만 거의 하루가 걸렸습니다. 소매 단추를 채우고 나비넥타이를 매는 데에만 몇시간이 걸렸어요. 그렇게 겨우 옷을 입자마자 다시 옷을 벗을 생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게다가 지속적인 시력장애와 심한 두통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도박장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녹색 쎌로판으로 눈을 가리고 다닐 때가 많았습니다. 그가 운명하던 날, 처음으로 치료 시간에 그가 나타나지 않아서 나는 그의 방으로 가보았지요. 아델바르트 씨는 쎌로판으로 눈을 가린 채 창가에 서서 공원 너머의 습지를 바라보고 있더군요. (-) 왜 평소처럼 약속한 시간에 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 (나비 잡는 사람을 기다리다가 무심결에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 아델바르트 씨는 이렇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한 뒤에 즉시 나와 함께 치료실의 판슈톡 교수에게로 가서 여느 때처럼 모든 조치들을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누워 있던 모습이 떠오르는군요. 이마에는 전극들을 달고, 이로 고무쐐기를 물고, 치료용 침대에 박음질해놓은 범포(帆布)로 꽁꽁 묶여 바다 한 가운데 곧 수장될 사람처럼 누워 있었지요. 충격요법은 문제없이 진행되었습니다. 판슈톡 교수는 아주 낙관적인 소견을 작성했지요. 하지만 나는 아델바르트 씨의 얼굴을 보고 그에게는 아주 미약한 힘만 남아 있을 뿐, 이미 완전히 파괴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눈은 기묘하게 초점을 잃은 상태였고, 그의 가슴에서 한숨이 새어나왔습니다. 그 한숨소리가 지금까지도 귀에 생생하군요. (-) 다음날 새벽,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나는 그의 방으로 올라가보았습니다. 그는 에나멜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고 정장을 말끔하게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죽어 있더군요. 여기까지 말한 후 애브램스키 박사는 입을 다물고 길이 끝나는 곳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 작별할 때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

 


가뭄이 극심하던 1991년 9월 중순, 나는 영국에서 출발하여 도빌로 갔다. 씨즌은 벌써 끝난 지 오래였고, 수입이 좋은 여름 씨즌을 조금 더 연장해볼 심산으로 그곳 사람들이 개최하는 미국영화 페스티벌도 이미 끝나 있었다. (-) 나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한때는 전설적이었던 해수욕장이 이제 가망없이 몰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어느 나라에 가든, 지구상의 어디를 가든 다를 바가 없다. 자동차와 부띠끄 상업, 그리고 온갖 방식으로 점점 더 확산되어가는 파괴중독증으로 인해 살아남은 곳이 없다. (-) 내가 도빌에서 맞은 첫날 아침에 거리를 산책하면서 (-) 아무도 살지 않는 듯한 이러한 빌라들 앞에 한동안 가만히 서 있으면 신기하게도 거의 예외없이 (-) 창문의 덧문 하나가 살짝 열리고 손 하나가 밖으로 나와 천천히 걸레를 털어댄다. 그런 광경들을 보고 있자면 도빌의 모든 건물 내부는 컴컴하고, 그 안에는 영원히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고 영원히 먼지만 털어야 하는 저주받은 여자들이 소리도 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우연히 그녀들의 감옥 앞에 서서 물끄러미 건물을 쳐다보는 낯선 행인들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 노르망디 호텔은 여전히 고급호텔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 직원들은 겉으로는 아주 깍듯해 보였지만 실은 냉정하면서도 때로는 거의 모욕에 가까운 예절로 그들을 대하면서 정확하게 짜인 일과에 따라 그들을 조종했다. (-) 

 

 

비망록에 적힌 할아버지의 마지막 기록은 성 스테판의 날에 쓴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뒤 코즈모는 심한 열병을 앓았지만 차츰 회복되는 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할아버지는 그 전날 오후 늦게 눈이 내리기 시작했으며, 호텔 창가에 서서 찬찬히 내려앉는 어스름 속에 하얗게 떠 있는 도시를 보자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고도 적어놓았다. 그는 나중에 이런 글귀를 추가했다.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 누구도 이런 도시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건물도 참으로 많고, 식물들도 다채롭기 그지없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소나무 우듬지들. 아카시아, 코르크나무, 무화가나무, 유칼리나무, 노간주나무, 월계수, 실로 나무들의 천국이다. 그늘진 비탈들, 졸졸거리는 개울과 우물이 있는 작은 숲 들. 산책할 때마다 나를 놀라게 하는, 아니 경악하게 하는 것들이 나타난다. (-) 궁전 같은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가 갑자기 협곡에서 끝난다. 극장에 갔다가 대기실의 문을 열고 나오면 뜻밖에도 작은 숲으로 들어서게 된다. 갈수록 좁아지는 어두운 골목을 따라가다가 막다른 골목을 만난 줄 알고 낭패감에 휩싸여, 마지막 희망을 걸고 모서리를 돌아서면 돌연 연단처럼 생긴 곳이 나타나 광활한 파노라마를 조망하게 된다. 벌거벗은 언덕을 끝없이 올라가다 보면 문득 그늘진 계곡에 들어서 있음을 깨닫게 되고, 어떤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길거리가 나오는가 하면, 시장을 돌아다니던 중 갑자기 묘비명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죽음 자체와 마찬가지로 묘지 또한 삶의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싸이프러스 나무를 한그루씩 심는다고 한다. 그 촘촘한 가지들 사이에 터키의 비둘기들이 집을 짓는다. (-) 오늘 그곳을 지나갈 때, 길모퉁이에서 돌연 시야가 탁 트이더니 산의 푸른 능선과 눈 덮인 올림포스 산의 정상이 보였다. 나는 한순간 내가 스위스나 고향에 와 있는 줄 알고 가슴이 메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