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82호 - 2015.봄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을 쓰는 일은 외롭고도 묘한 일입니다. 한 소설을 시작해 첫 몇 쪽을 쓰는 동안은 절망의 순간들을 통과해야 합니다. 길을 잘못 든 것 같다는 생각이 날이면 날마다 들지요. 그러니 되돌아가 다른 길로 접어들고 싶다는 유혹이 거셉니다. 이 유혹에 지지 말고 가던 길을 가야 합니다. 한겨울 한밤중에 차를 몰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빙판길을 가는 일과 얼마간 비슷하다 보면 됩니다. 선택의 여지란 없지요.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언젠가는 안전한 길이 나올 것이며 안개도 걷힐 거라고 자신을 타이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작가와 독자 사이에 이런 조화로운 관계가 존재하려면, 작가는 절대로 독자를 혹사하지 말아야 하며─가수가 제 목소리를 혹사한다고 말할 때의 의미와 같이 썼습니다─독자를 본인도 모르는 사이 아주 서서히 이끌어 책이 차츰차츰 독자에게 스며들 수 있도록 충분한 여백을 남겨주어야 합니다. 침술에서, 정확한 한 지점에 침을 놓기만 하면 거기서 유발된 흐름이 신경계로 퍼져나가는 것과 흡사한 기술이 여기에서도 통하는 것입니다.

 

(-)

점령기의 파리는 참 이상한 도시였습니다. 겉보기에는 ‘이전 같은’ 삶이 계속됐습니다. 극장이, 영화관이, 연주회장이, 식당이 문을 열었지요. 라디오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심지어 극장과 영화관에는 전전(戰前)보다 사람이 더 많이 들었습니다. 그 장소들이 마치 함께 모여 서로 바싹 다가들며 안도를 나눌 피난처이기라도 한 양 말입니다. 하지만 파리가 더이상 전과는 같은 곳이 될 수 없음을 일러주는, 사소해 보여도 기괴한 사실들이 있었습니다. 자동차가 없는 까닭에 도시는 적막했습니다. 그 적막 속에서 나무가 살랑거리는 소리, 말발굽이 또각대는 소리, 대로를 걷는 군중의 발소리와 웅성거리는 이야기 소리가 들렸습니다. 거리의 적막과 겨울철 오후 다섯시부터는 손바닥만한 빛줄기도 창문으로 새나가지 못하게 하던 등화관제의 적막 속에서 이 도시는 저 자신이 결핍한 도시, 나치 점령군이 일렀듯 “눈(目) 없는 도시” 같았습니다.


_파트릭 모디아노_거대한 망각의 백지 앞에서_문학동네 2015 봄

 

 

길을 잘못 든 것 같다는 생각과 싸워야 하고, 이만 되돌아가 다른 길로 접어들고 말 것 같아 시작도 하지 못한 어떤 글을 써보고 싶다. 무얼 그려내고 싶은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출발하라고, 그래도 된다고 괜찮다고 하는 듯한 목소리와 마주친 느낌. 독자는 가수의 목소리와 같아서 혹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충분한 여백을 남겨주라는 말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전과 같은 삶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적막 속의 소리를 따라 밖으로 나가고 싶어지는 봄. 고개만 내미는 것이 아니라 큰걸음으로 쭉쭉 걸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