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영월에 가면 세수하고 싶다
영월에 가면
먼저 서강에 가서
이 마을 처녀처럼 세수하고 싶다
비누가 없어도
비누거품 하나 일지 않아도
물처럼 만져지는
내 맨얼굴 같은 거
_이홍섭 「영월」 부분 『터미널』
로맹가리 소설은 감상을 말하려고 하면 스포가 된다. 즉, 초반에 선보인 매혹될 것 같은 섬세한 감성으로 구성한 문장의 맨얼굴이 뒤에 가서 비참하게 까발려진다는 뜻이다. 자기가 애타게 보고 싶어했고 구축하고팠던 희망의 이미지를 자신의 욕구로, 늘 후회하고 후회했지만 고치지 못한 습관으로, 자기 존재의 포기할 수 없는 버릇으로 박살낸다. 이야기 속에서 인물들은 서로 이해될 수 있는 것처럼 연출된다. 그 연출에 맞서는 것은 다름아닌 그 연출을 가능하게 했던 욕구다. 낭만적으로 치장할 수 있었던 고독은 타인을 만나면서 허위성을 드러내고 무대 위 배우일 수밖에 없는 초조함,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도구로 바뀌어버린다. 그걸 받아들이고 배우로서 살아가거나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죽는 것. 그 인간(최소한 자기 자신)이 비참함의 바닥을 드러내는 존재임을, 그게 진짜 자기임을 받아들이는 걸 선택하라고 말이다. 즉 이것도 자기 자신이 되는 이야기다. 자신이라고 믿었던 한 인물, 허구의 아름다움이 완전히 박살나는 걸 보아야 하는 이야기. 그게 내가 아니었다는 이야기. 내가 가져본 적 없는 나이고, 저 인물-배우의 연기 속에서만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거짓 자기라는 깨달음. 그게 다다.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모습으로 될 수 없고, 나에 대해 갖는 낭만이 얼마나 허위인지 알고 있을 때 사람은 혼자 있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음을 로맹가리는 보여준다. 타인과 관계맺지 않는 고독. 그것이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가 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실 된다, 라는 말도 정확하지 않다. 일시적으로 이룰 수 있을 뿐이다. 허나 남들을 다 속여도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그 자기기만의 의식이 그를 냉소하게 하고 동시에 그 냉소만큼 애타게, 거짓 자기를 확인해줄 운명을 기다리게 한다. 그 운명, 우연한 사건처럼 보이는 한 여자의 등장, 그 여자가 겪은 '충격적'인 사건에 보내는 감정적 동요는, 무의식중 이 여자 역시 같은 무대에 선 배우임을 의식한 동정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변호인>은 나쁜 영화이다. 그러나 그 몫을 <변호인>에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 나쁜 서사를 보고 '감동'을 요구받고, 의심없이 감동을 수행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 나쁜 영화가 된다. <변호인>, 거기에서 송변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지만, 진정한 자신이 되는 데 실패하고 만다. 그 존재의 셈은 '잃어버린 것<얻은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키려 했던 것의 허위성, 유지해오고 있던 삶의 의미를 의심하고 되물을 수 있었던 기회를 감독은 매끈하게 봉합해버린다. '실화'니까. 실제로 그랬으니까. 여기에서 장정일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모든 권력과 독재는 리얼리즘에서 나온다. '내가 보았다'는데 그리고 '내가 본 대로 된다'는데 누가 이길 것인가."
"변호인의 서사를 내가 좋아하는 유의 이야기로 바꾼다면, 변호인은 이 사건을 위해 결국 자신의 아들도 잃게 되고, 지위도 잃으며, 재판에서도 져 학생들은 긴 징역, 혹은 죽음을 겪게 될 것이다. 즉 겉으로는 모든 걸 잃은 듯이 보이는, 승리하지 않은 서사가 될 것이다. 남는 것은, 재판이 시작되기 전, 그러니까 결단하기 전의 안온했던 삶에서 빠르게 이탈하여 많은 것을 회복할 수 없이 잃어버린 송변의 모습일 것이다. 그것만이 내가 추구하는 서사인데, 영화상에서 그의 노력이 작게나마 보상(1년 징역 후 가석방되기로 한 학생들이나 후에 그의 재판에 참석한 변호사들의 숫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보상 없이, 모든 것을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야만, 그의 용기가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그 용기 자체를 내었다는 것이 그에게 가장 큰 보상이 된다고, 그 무엇을 잃어버렸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새로운 삶인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잃은 뒤 확인할 수 있는 용기만으로는 대중영화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만족감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강조하되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그 모든 것을 잃는 것이어야 했다. 그것은 송변이 갖게 될 그후의 삶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삶은 아무것도 아닌, 심지어 허위일 수도 있는 것이며, 그만큼의 대가를 각오하지 않고서는-혹은 그 잃음에 대한 보상을 원한다면, 그의 용기가 '안전했을지 모른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안전벨트를 하고 탑승한 놀이기구나, 영화관에서의 대리체험처럼."
변호인이 변호하지 못한 것
http://blog.naver.com/paranoia_a/80204837418
다시 로맹가리. 거짓 자기임을 확인받고 싶어한다는 것은 결국 그의 소망이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이 되고 싶다-될 수 없다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를 그렇게 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에서 그를 구해줄 이야기를 기다리는 거다. 이야기는 도착하지만, 그것은 그를 이루어지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작가의 재능이고 재미이다. 작가의 손 안에서 인물은 파괴된다. 작가가 이룬 것을, 작중인물은 이루지 못하며,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을, 작중인물은 하지 못한다. 그것이 이야기하고픈 충동과 닿아 있는 지점일까?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떠들게 하는가와 닿아 있는가? 도착한 이야기 속 배우와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지탱해주는 것이 삶이라면, 서로를 서로이게, 서로가 서로라고 믿는 거짓 자기를 강화해주고 유지해주는 것이 삶이라면, 그렇게 사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진짜 나, 드러내지 못하고 받아들여지지 못한 진짜 나에 대한 유감이 늘 존재해서, 배우로 구성된 '나', 그런 '나'를 가능하게 한 상대에 대한 적의를 더는 감추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 파괴적인 충동은 매혹적인 우울감으로 덧칠되지만 결국 인물을 죽인다. 그래서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이야기는 이제 이야기 바깥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이야기는 작가에게로, 작가에게서 읽는 나에게로 넘어오기 때문에, 자, 네가 되고 싶어하는 '너', 네가 '너'라고 생각하는 '너'는 누구냐, 묻기 때문에. 내가 나이게끔 구성해주는 상대는 누구이며, 인물이 아닌 일, 사물이라면 정확히 무엇이지? 어떤 것이 나의 거짓을 지탱하며 받아들여지지 않는 진짜 나에 대한 유감을 달래는가? 나에게 그것은 기본적으로 수치심이다. 자책이다. 내가 노력했다면 할 수 있었을 일, 이라는 생각. 나의 탓이다. 내 탓이었다. 더 강렬하게 내 탓이었다. 그래야 그 잘못이 내 것이 되기 때문에.
나는 진짜 내가 되고자 한다고 믿는 강박을 다른 말로 소망에 대한 결벽이라고 불러도 될까? 소망된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소망은 강철 로봇을 그린 종이이다. 그것은 강철을 그리게 한 소망과 달리 물에 젖고 불에 타고 찢어질 수 있는 위태로움, 훼손될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강철' 로봇이 될 수 없는 종이 속 로봇은 간절함으로 마음 속에서 타오른다. 그것은 쥐어보아도 손을 태우지 않는 소망의 불이며 살아 있는 동안 거듭 타올라야 하는 존재의 불, 지금 여기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생생하게 불러내는 마법의 불이기도 하다. 그 불은 축축한 현재의 모욕과 끝없이 맞선다. 꺼짐으로써. 젖어가며 연기를 뿜고 식어버림으로써. 그 식어버린 불, 꺼져버린 불만이 역설적으로 영원히 타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