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연습 _죽지 않고 살아가기




김승옥의 등단작인 「생명연습」(1962)은 ‘죽을 것인가 아니면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본격적으로 던지기 전에 일단 다음과 같은 예비 물음을 묻고 있는 소설이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어째서 그럴 수 있는 것인가.’ _신형철 _청년문학의 생명연습



김승옥의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는 사춘기였는데, 당시 내 상황을 이입해서 읽었다. 특히 「생명연습」은 내 경우와 비슷했는데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와 생활하다 보니 형의 태도에 공감할 수 있었다. 작문으로 마지막까지 그를 설득하려던 누이, 그들의 파국을 초조와 야릇한 설렘으로 기다리던 화자인 나마저도 모두 분리된 내 자아들 같았다. 황석영의 한국명단편 연재글에 보면 김승옥의 가족사가 나온다. 그가 여덟 살이 됐을 무렵 삼십대 초반이던 아버지가 여순사건에 휘말려 총살당한다. 그후, 맨날 업고 다닐 정도로 예뻐했던 세 살짜리 여동생은 심한 열병으로 갑자기 죽는다. 그때 그는 삶과 죽음의 의미라는 피할 수 없는 물음 앞에 서게 된다. 김승옥의 세대는 전쟁을 겪으면서 살고 싶은 사람이 죽었던 시기다. 저 사람은 죽었는데 나는 살아 있고, 저 사람을 누군가 죽였는데, 그 죽인 사람은 살아 있는 이 문제상황,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 공간 자체가 압도적이어서, 어떻게든 그 죽음에 대해 탐구하고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주려 노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승옥은 굉장한 독서광이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한국에 있는 책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할 정도로. 순천에 있던 한 서점에 대고 김승옥의 어머니는, 우리 아들이 읽고 싶어하는 책이 있으면 일단 다 보게 해라 나중에 와서 값을 치르겠다, 말했다고 한다. 김승옥은 그렇게 맹렬하게 책을 읽었고, 스물둘이 되던 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생명연습」이 당선되어 소설가가 된다. 이때 내가 궁금한 건 그것이다. 왜 이 사람은 그렇게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을까.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책을 읽게 했고 글을 쓰게 했으며 그 글에 드러난 세계는 이런 모습인가. 호기심을 갖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사람의 삶에서 내가 겪고 있는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예를 들어 내가 소설 속 인물들이 느끼는 죄의식이나 수치심에 공감하고 그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면 그건 어디에서 오고, 다른 사람이 그걸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어째서 그럴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이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어째서 그럴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과 비슷하다고 본다. 저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든 내가 잘못된 것이든, 그 대립을 넘어선 다른 영역의 문제이든, 그게 내 문제상황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나는 죄의식과 수치심을 왜 느낄까, 아버지가 없는 상태라는 건 상징적으로도 큰 존재조건이지만 현실에서도 끊임없이 문제가 된다. 남자인 내 경우는 수염이 나기 전에, ‘수염이 나면 어떡하지?’ 이게 고민거리였다. ‘가르쳐달라고 부탁할 사람도 없는데 수염이 나기 시작하면, 배우지 않고도 혼자 면도를 잘할 수 있을까?’ ‘면도기는 슈퍼에서 어떤 것으로 사야 하나? 그걸 턱에 대고 그냥 그으면 살이 베이진 않을까?’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은 고민이지만 어린 나이엔 그 물음이 내게 중요한 불안 중 하나였다. 솜털이 가시고 거뭇거뭇 굵은 수염이 나기 시작할 때 아버지가 없다면 누가 나에게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줄까, 라는 것이. 하지만 면도는 다른 사람들이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고 있어 문제도 될 수 없는, 물어볼 수도 없는 거라고 느껴야 한다는 죄의식, 수치심, 그런 게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랑 같아 보여야 해. 같지 않다는 걸 드러내면 안 돼, 라는 명령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가 놀라운 생활력을 발휘해 나를 보살펴주며, ‘너는 잘될 거야’ ‘너는 괜찮은 사람이야’ 라고 끊임없이 암시를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암시, “운명적인 요구”를 알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고 수락해야만 했다. 동시에 내가 느껴야 하는 불안, 무력감에 대해서 어머니를 미워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나에게 옷을 입혀주고 밥을 먹여주고 나를 살려주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나의 가장 중요한 아버지 없음이란 존재조건에 대해서 누구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그럴 때 내가 느끼는 원망이 있었다. 다시 김승옥 소설로 돌아와서, 어머니와 방황하는 아이들, 그 “꾸며놓은 왕국”의 서사를 읽으면서 확인하는 것은 끝없는 자기처벌의 욕망, 그것뿐이었다. 아버지가 만약 있다면, 아버지를 죽일 마음을 먹을 수 있다. 존재하는 대상이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없다면 어떻게 아버지를 죽일 수 있을까. 지목할 수 있는 고통의 원인이 부재한 상황, 나는 그게 이 인물들로 하여금 방황하게 하는 근원이라고 보았다.



어머니가 내게 골루아즈 담뱃갑을 내밀었다.
“담배 피울래?”
“아니.”
어머니는 나를 어른 취급하려 애썼다. 아마 마음이 급했겠지. 어머닌 벌써 쉰한 살이었다. 어려운 나이였다. 삶 가운데 의지할 만한 것이라곤 어린아이 하나밖에 없을 때에는 말이다.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에는, 홀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담배 피울래? 하고 담뱃갑을 내미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아들은 그 장면을 이해한다. 어머니가 왜 자기한테 담배를 권하는지. 그 어머니는 그 순간, 자기도 뭔가 의지할 대상, 남편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바람을 어린 아들에게 일시적으로 투사하는 것이다. 아들은 언뜻 비친 존재의 빈틈으로, 예술가가 되지 못한 어머니, 강렬한 열정과 요구로 뭉친 듯했던 그녀의 연약함을 목격한다. 「생명연습」에서도 어머니가 외부 남자를 끌어들이는 건, 여성성에 대한 확인이라거나 외로움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겠지만, 부재하는 남편을 장남인 네가 대신해달라는 암시, 병약하지만 장남인 네가 부재한 남편을 대신해 나를 단죄해주고 화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영원한 복종과 야릇한 환희와 그러나 약간의 억울함"(31쪽)을 담은 파란 불의 눈빛으로. 우리가 막연하게 이 세상에 던져져 있을 때, 살아야 한다는 삶의 요구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할 때 누구는 종교를 찾고, 어떤 이는 부모의 권위에 기대는데, 그런 지지대가 부재한 사람일 경우에는 처벌의 상황을 회복하기 위해서, 마조히즘적인 제스처를 하게 된다. 누군가 나의 존재를 감당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죄를 짓고, 누군가 나를 혼낸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켜주는, 존재의 불안을 다스리고자 하는 그 욕망은 누이의 눈물겨운 노력, ‘작문’으로 등장한다.



"내 어머니의 ‘남자관계’를 내가 어렸을 때는 막연한 어떤 심리에 사로잡혀 미워하고 심지어 내 어머니는 ‘갈보’라고까지 욕을 했고 (…)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어머니를 더욱 미워하게 됐고 그래서 혹시 그런 남자가 집에 오기라도 하면 나는 일부러 방문을 탁 닫기도 하고 큰 장독으로 돌을 가져가서 차마 독을 쾅 깨어버리지는 못하고 땅땅 두들겨보고 그러다가 그 독아지 속에서 울려오는 무거운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며 어머니에 관한 일은 잊어버리기로 하곤 하였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처럼도 어머니를 못 이해하고 있었다니, 하는 후회만이 앞선다. 어머니가 사귀던 몇 남자들의 (…) 용모에는 공통된 점이 많았다. 눈이 쌍꺼풀이라든지 콧날이 오똑하고 얼굴색이 비교적 창백하다든지, (…) 거슬러올라가면 그것은 놀랍게도 아버지의 얼굴과 거의 일치되는 것이다. (…) 아아, 어머니는 얼마나 아버지를 찾아 헤매었던 것일까." _36~37쪽.


"물론 이 작문은 거의 완전한 허구였다. 그러나 최후의 노력이었다." _38쪽



글쓰기, 그것은 무엇일까? 작가에게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 충격을 준 세계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은근한 것이었다고는 하나 (…) 이것의 어떤 해결 없이는 새로운 생활―새롭다고 한들, 남들은 별생각 없이 예사로 사는 그런 생활을 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었다.” _36쪽



“어머니의 나에 대한 운명적인 요구에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형의 말이 누이의 “작문”을 읽고 내뱉어진 것이라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아마 그 알쏭달쏭함은 이렇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허구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만들어주며 그것이 현실과 같지 않은 “자기만의 왕국”일 수 있음을 받아들이며 살아내기와, 그 무의미성에 전 존재로 응답하여 현실과 허구 사이의 거리를 폭파하는 길을 택함으로써 자기에게 주어진 의미를 성취해내는 길, ‘엄청난 허망 속으로 자신을 내던진’ 자살이라는 형의 선택은 이해할 수 없는 바보의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의 의사를 조금만 더 확대해 들여다보자.



만화로써 일가를 이룬 오선생 같은 분도, 좀 이상한 얘기지만 일을 하다가 문득 윤리의 위기 같은 걸 느낄 때가 있다, 라고 내게 말씀하시는 때가 있다. 윤리의 위기라는 거창한 말을 쓰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작은 실패담이라고나 할 수밖에 없는 일인데, 당사자에겐 퍽 심각한 문제인 모양이다. 이야기인즉, 하얀 켄트지를 펴놓고 먼저 연필로 만화 초를 뜬다. 그러고 나면 펜에 먹물을 찍어 연필 자국을 덮어 그리는데, 직선을 그려야 할 경우에 어쩐지 손이 떨려서 그만 자를 갖다대고 그려버릴 때가 가끔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다 그리고 난 뒤에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자꾸 그 직선 부분에만 눈이 가고, 죄의식이 꿈틀거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이 이렇게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 한다. 그건 당신의 선이 아니다. 그것은 직선이라는 의사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는 자의 선이다. 당신은 우리를 속이려 하는구나, 라고. _39~40쪽



다시 면도로 돌아와서. 수염이 자랄 것이라는 불안은 어릴 적 내게, 물음에 답해줄 대상이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억울한 예감이 뭉쳐져 있는 현상이었다. 그것은 내가 살아갈 모습을 압축해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지금의 나는 "그는 분명히 환상적인 기준을 만들어주고 거기에 자기를 맞추려고 애썼던 모양인데 참 바보 같은 놈이었다. (…) 산다는 것, 우선 살아내야 한다는 것, (…) 그것은 이제야 출발하는 것이다"라는 「환상수첩」 속 임수영의 문장에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차게 빛나는 왕국의 바닷가를 헤매는 인물들이 왜 어린아이들이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아마 그 운명적인 요구는 형, 그에게 일시적으로나마 진실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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