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광 창비시선 492
채길우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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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



채길우



야생 완두는

오랫동안 인간에게 길들여지면서

열매가 다 익은 후에도

자발적으로 깍지가 열려

씨앗을 퍼뜨리는 능력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었으므로

식용작물이 되었다.


꼬투리를 잡은 누군가의 손이

비틀린 멱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줄 때까지

입 꽉 다물어 속을 비치지

않았기에 사랑받았고

함부로 옷이 벗겨져

다섯알 중 서너개를 잃고도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다는 산술로

계약을 따냈다.


완두는 좀처럼 터지지 않는다.

분노하지 않는 초록의 순종으로서

동일한 껍질 속 똑같이 생긴 얼굴로

가지런히 줄 서 기다리며

선별과 배제는 우연이거나

더 높은 곳의 뜻임을

순순하게 다짐하는 겸손한 위치에서조차

간택되기 위해 무거워진 목을 늘어뜨린

비산도 탈출도 없이 동그랗게 어여쁜 두상들




채길우, 『측광』, 창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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