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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
최현숙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평점 :
글쓰기 강의중 “젊은 시절 여러분은 자기 자신이 이해가 좀 되셨나요?” “그 시절의 자신이 이해되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가요?”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 자신을 이해하는 것에 어떤 고민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특히 태생이 착해 보이는 사람들이, 부럽고 싫었다. 도무지 나를 이해할 수 없었고, 수긍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자신을 죽이고 싶지는 않아 두 개의 나로 분리해, 맨정신의 내가 미쳐가는 나를 데리고 사는 느낌이었다. 도벽이 발각된 후 망신의 시절을 그냥 견딜 수 있었던 것도, 그 유체이탈과 선 긋기 덕이었으리라. 파열할 것 같은 뇌를 목 위에 얹고 길거리를 지나며 쇼윈도에 비친 나를 보면서, 나중 언젠가의 나를 무작정 믿었다.
방황이 시작되었던 중학교 1학년 시절, 맨 앞자리에 앉은 나를 지목한 수학 선생님의 질문에 무어라 답을 했는데, 늙은 신경질쟁이였던 그가 지나가는 말로 “너는 좋은 아이구나”라고 말했다. 질문도 답도 기억에 없는데, 그가 흘린 한 문장을 주워 몰래 간직해서 지독한 혼돈의 시절을 건너왔다. 지나고 보니 그 방황과 혼돈과 시행착오들이야말로 내 길을 만드는 힘이었고, 내 글이 흘러나오는 옹달샘이었다. 이제야 어리고 젊은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를 심리적으로 연결해서 이해하고, 하여 나를 수긍한다. 그 연결 덕에 그 중간 35년여의 사회운동 시절의 열정도 뒤늦게 믿어지고, 앞으로도 그 길 위에 있으리라 믿게 된다.
이 책에 실은 글들 중 한 부류는 지금 혼돈하고 아파하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건네는 먼저 늙어가는 사람의 말이다. 다른 한 부류는 노년 역시 살아볼 만한 시절이니 오는 대로 살아보자는 말이다. 쓸데없는 소문에 속아 노년을 대비하느라 젊은 시절을 종종거리지 말고, ‘지금 여기’의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면 된다. 모든 생명이 결국은 늙어 죽는데, 나 하나 나이들어 늙고 죽는 게 두려울 게 뭐란 말인가. 끝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궁극의 위안이다. 먼저 죽은 사람들 소식에 내 죽음을 떠올리며, 남은 삶에 더 자유롭고 충실해지기를 욕망한다.
특히 이번 작업을 통해 십대와 이십대 시절의 무저갱들을 제대로 까발려서 속이 후련하다. 내 무저갱에서 직립해 걸어나오며 까발리면서 얻은 힘줄로, 내게 시비를 거는 세상의 갖은 정상 타령과 불안과 혐오, 소문과 속임수에 맞서나가는 이야기들도 모았다. 나를 까발린 이유는 우선 나부터 좀 후련해지기 위해서고, 까발려야 제대로 통과하기 때문이며, 내 사례를 통해 혹 각자가 처했었거나 처해 있는 수렁과 두려움에서 직립하여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자는 제안을 하고 싶어서다. (-)
(-) 양손에 식재료 보따리를 들고 언덕을 오를 때마다 “먹고살자고 이 무거운 짐을……” 하는 생각이 들더니, 올해부터는 “아유, 지겨워!” 하는 소리가 입 밖으로 툭툭 튀어나온다. 매번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마는 바위를 하염없이 다시 밀어올리는 시시포스가 떠오르고, 그럴 때마다 왜 사는가를 다시금 떠올리며, 언제까지 살 것인지 가늠한다. 노쇠의 단계마다 잠깐 섭섭하다가 입으로 글로 떠들고 나면 한결 나아진다. 같이 늙어가는 사람들과는 수다를 떠는 재미가 있고, 젊은 사람들에게는 너네도 곧 그러리라는 걸 예고하는 맛이 고소하다. 많은 할머니들이 “그래도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이라고 말하는데, 나 또한 그러하다.
_최현숙, 소문과 속임수에 맞서나가는 이야기
(-) 해명의 상대는 우선 나 자신이며, 해명의 목적은 그 시절에서부터 계속 이어져 현재에 닿은 나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 내 도벽을 이야기할 때 함께 불려나오곤 하는 타인들도 개인적 존재이자 사회적 존재로 이해하고 해석하고자 한다. 사과, 용서, 화해 등의 단어는 너무 애매해서, 나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다른 필요라면 나와 관련자들의 아픔과 시행착오의 기록이 읽는 이들에게 다양한 쓸모가 되는 것이고, 그러길 바란다.
(-) 1978년이다. (-) 나는 가정학과 3학년이다. (-) 의상 실습을 하느라 실습실 작업대들이 번잡하다. 30명 정도의 학생들 모두 각자의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가방은 실습실 뒤쪽 책상에 모아져 있다. 모두가 바쁜 틈을 타 내 가방에 볼일이 있는 듯 가방 쪽으로 간다. 내 가방을 열어놓고 주변 아무 가방이나 연다. 무작위여서 누구 가방인지 모른다. 그날 지퍼를 열고 화들짝 놀랐다. 이제 막 은행에서 뽑은 듯 빳빳한 만원짜리로면 5센티미터 두께로 가지런한 돈다발이 있다. 심장과 손이 떨리지만 물러설 수 없고, 서둘러야 한다. (-) 2센티미터 정도를 뽑아들어 내 가방에 넣고, 가방을 들고 실습실을 나와, 같은 층 복도에 있는 내 사물함으로 간다. 자물쇠를 따로 문을 열어 책들 뒤쪽에 돈다발을 넣어 가린다. (-) 실습실 쪽에서 같은 과 아이 하나가 나를 향해 오고 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얼굴 근육은 그 아이를 향해 옅은 웃음을 만든다. 눈빛은 의도한 것처럼 무심하게 비쳤을까? 그 아이의 표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누구였는지도 기억에 없다.
“돌려줘. 엄마 계 탄 돈 심부름하는 거야.”
아무 말도 안 하고 돌아서서, 내 사물함으로 간다. 그 아이가 따라온다. 돈다발을 꺼내 돌려준다. 아이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선다. 나는 반대 방향으로 돌아 복도 끝 계단을 빠르게 내려간다. (-)
_최현숙, 나는 도둑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