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과 랜딩 문학동네 시인선 173
이원석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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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여길 보라구 우리가 던지는 술병이

저 아래 깜빡이는 불빛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유리처럼 부서지는 게 뭔지 똑똑히 봐두라구

(-)

겁에 질려 사방으로 도망치는 실금이

표정처럼 하얗게 번질 때

(-)


「로이의 미로」 부분



당신이 나를 만들었습니다

파이프렌치를 사랑하게 됐을 때

양철 대야에 손을 씻기고 

렌즈가 반짝일 때

그건 눈물이라고 당신이 가르쳤지요


(-)


로이가 로이를 만들었을 때 떠올린 것은

가장 일치하는 로이로 하나가 되는 것

같은 규격의 나사를 씁니다 같은 크기의 기판에

같은 마음을 꽂습니다 잘못 이어진 전선은

그대로 둡니다 잘못은 그대로 전해집니다

같이 틀리고 같이 잘못하여 같은 곳에 도착합시다

로이는 서로의 다른 점이 맞물려 하나의 온전한 외곽을 이루는

그런 사랑을 원하였으나

이가 맞물리지 못하면 서로를 물게 된다는 것을

어렵게 깨달은 후에

로이를 만들었다 가장 일치하는 부속들로 이루어진

로이를 로이는 사랑했다


「로이가 로이에게」 부분

 


(-)

g는 테이블에 앉아 손상되지 않은 기억

그대로인 케이크를 자른다

포크가 조심스레 잘라낸 작은 조각을 입에 물고

창가를 오래 바라본다

혀에 시간이 작은 알갱이로 머문다

아주 조금만 갖는 것이

더 오래 가질 수 있는 것

케이크가 절반이 남았을 때

g는 이전의 절반만큼만 포크로 떼어내

이전보다 더 오래 맛본다

다시 절반이 남는다면

더 작은 조각으로 나눌 것이다

절반과 절반이 더 가질 수 없는 절반으로 나뉘고

결국 더 나눌 수 없는 조각 하나가 흰 접시 위에 남은 날

g는 포크를 들고 케이크를 끝없이 바라볼 것이다

나무 테이블은 흰 접시를

흰 접시는 나눌 수 없는 한 조각의 케이크를

케이크는 남은 시간을 받치고 있다

(-)


「자기장 위의 발굽소리」 부분



내려다보면

내려가는 줄 알았던 개수대의 물이 천천히 차오른다

바닥을 디디던 그릇들이 일시에 떠오른다

찌꺼기를 긁어낸다고 좋아질까?

여기가 아니라 손이 닿지 않는 곳부터 잘못된 거야

지금이 아니라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망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

오늘이 지나면 모든 것을 부정할 거야

그러니 오늘까지는 견뎌도 되겠지

(-)


「그릇이 떠오르는 순간」 부분



당신은 차고 단단한 찻잔 옆에 나를 놓아둔다

오래도록 들여다보지 않는 비닐봉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앉아 있다 가만히 가만히

주문을 외우며

맞다 거기에 두었지 네가 문득 들추어볼 때까지

(-)


무심히 버려진 비닐봉지 안에 내가 앉아서

네가 사온 것이 나야

좀더 기다릴 수 있게 냉장고 안에 넣어주렴

나는 추위를 많이 타

하지만 아픔을 견디는 건 잘할 수 있지

네가 나를 냉장고에 보관한다면 고통을 느끼겠지만

더 오래 널 기다릴 수 있어

네가 사흘 후에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면 사흘 전부터

네 손에서 봉지째 흔들리던 귀가의 오후부터

진열대에서 눈빛이 마주치던 순간부터


「당신의 주방」 부분



널 떠날 거라고 언제나 생각해

그래야 시간을 견딜 수 있으니까

나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다시 너를 찾으면

햇살이 눈처럼 쌓인 오르막은 오른쪽으로 휘어 있다


「잊지 않는 방안」 부분




지구가 멸망했으면 좋겠어

모두의 성이 고통 없이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은 나를 용서해


「마야코프스키」 부분




보고 싶지도 않도록 쥐어짜다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생각하다가

넌 지옥에 있고

난 지옥에 있지 못해서 지옥인데

그보다 더 바닥에 있다는 너의 문자에

다시 지옥에 홀로 남겨진 나에 대해 생각한다


나라고 생각했다 아시다시피

너의 기쁨이, 차분히 너의 손이 만지는 표면이

죽어서 슬퍼할 존재가, 뜨겁고 차가운 오르내림이

이까짓 걸 왜, 그까짓 걸 그토록, 저까짓 걸 진작에

뱉어버리지 않고 머금고 있는지 아시다시피

내가 아닌데 내가 되도록 기뻐한다 얼뜬 표정으로


내가 알려주기로 약속했는데

어느새 너는 나 없이 모든 걸 해낸다

그럼 나는? 그럼 나는? 자꾸 질문을 해대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구석으로 밀어놓는

무신경한 네 손이 쥐어짜는 세계란


간절함 없이

왼쪽으로

간절함 없이

오른쪽으로

굴려도 굴려도 결국은

오렌지가 만나는 세상에서 썩고 짓무른

그럼 오렌지는?

(-)


분명히 오렌지를 열었는데

먼지로 뒤덮인 하늘

도로를 달리고 있다

와이퍼를 작동시켜도 시야가 뿌옇기만 하다


우리는 약속했어

비밀하지 않는 사이가 되기로

모든 걸 발음하는 혀로 진실하기를

(-)


작은 벽들이 하나씩 망가지면 결국엔

폭삭 주저앉는 거야

근데 넌 자꾸 벽을 두드리지

두드리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까

고통을 울게 하려고


그걸 네게 쥐여준다면 넌 결코 꺼내지 않겠지

그걸 알아 넌 남은 한 방울까지 짜내며

내 마지막 순종을 거두기로 한 사람

원치 않지 고가도로 위에서 차가 멈추는 꼴을

그렇다면 모든 게 순조롭지 네가 미리 알고 짐짓

핸들을 꺾는 친절 속에 내 몸이 잠기는 추락


(-)


「스퀴즈 오렌지」 부분



flyby는 주변 행성의 중력을 이용해서 다가가는 거야

너무 멀어 다가갈 수 없을 때 내가 가진 힘이 없을 때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고 궤도를 유지해서

닿을 수 있을 때까지 살아남아야지

하지만 선의 속에 남겨진 행성들

(-)


(-)

생각했어

영원히 생각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지 하지만

들었어야 하는 말들은 들었어야 해

이상하기도 하지

높은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 회수하는 순간

금세 낮은 곳으로 떨어지지만

낮은 말은 아무리 아니었다고 해도

더 낮게 낮게 아래로만 가라앉는 게

떠오르지 않는 게


로제타는 죽기 위해 결국 그 오랜 비행을 감수한 거야?

눈을 감은 채 떠도는 게 싫어서 67P에 충돌한 거야?


「로제타(Rosetta)」 부분



당신의 요구가 당신이 원하는 바를 얻는 데 충분하지 못했다면

나는 당신의 요구보다 당신이 원하는 바에 집중했을 것이오

당신이 나를 회의하고 다른 손을 쓰기 원한다면

나는 당신이 다시 나를 빼들 때까지 당신의 주머니 속에서 기다릴 거요

당신이 당신의 주머니 속에서마저 나를 버리려 한다면

나는 잘려서 떨구어진 바로 그곳에서

당신이 길을 되짚어오길 기다리며

바닥을 꼭 쥐고 있을 것입니다


「심문B」 부분



스토리 있는 BDSM은 어떻게 세 번 부정하며 서정시가 되는가, 를 보여주는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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