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 김무명들이 남긴 생의 흔적
이정식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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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정식의 에세이. 폭력을 겪은 사람에게 피해 경험은 역설적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방어할 수 있었던 사회적 자원과 관계가 부재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우리 사회에선 보호가 필요없는 사람에게 과도한 선택적 보호가 작동하고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취약성은 그를 외려 폭력의 표적으로 전시해버린다. 이하는 본문.


새벽 세 시의 평일이었다. 손님이 없어 가게 문을 일찍 닫은 날에 나는 차비가 없어 집까지 걸어가야 했다. 언덕의 오르막길을 걸으면서 몹시 피곤한 나머지 신발을 벗고 바닥 위에 쓰러져 누워버리고 싶었다. 섬유질의 종이가 되면 어떨까. 종이가 돼서 종이파쇄기로 걸어 들어가 누군가 나를 읽지 못하도록 흔적들을 지워버리자.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더니 곧 앞을 온통 가려버릴 만큼의 기세로 쏟아져 내렸다. 옆으로 늘어선 빌라의 주차장으로 뛰어 들어가 담배를 피우며 빗줄기를 응시했다.

내가 종이라면 저 빗속으로 걸어 들어갈 텐데. 저 은색의 장막 속으로 들어갈수록 내 몸은 녹아들 거야. 머리카락은 땅에 떨어지고 눈썹과 속눈썹, 콧방울부터 녹을 거야. 손톱과 손도 녹고 발가락도 녹아들어갈 거야. 내 키는 점점 작아질 거야. 내가 사라지고 비가 그친 그 길을 누군가 걸어간다면 내가 신었던 하이힐을 보게 될 거야.

내가 종이라면 그 위에 적힌 나의 기억들도 지워질 거야. 누군가와 함께했던 곳엔 진하고 굵은 표시로 밑줄도 그었을 테고 또 어떤 곳은 빨간, 파란 펜으로 쓰이기도 했을 거야. 하이힐 옆으로 검고 빨갛고 파란 잉크들은 하수구로 빨려들어갈 거야.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 아픔과 통증 없이 사라지면서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소멸한다면 난 행복할 거야. 그런데 내 위엔 어떤 문장들이 쓰여 있는 걸까?

그래 이런 생각을 했었지, 내가 한 권의 책이라면….



내 항문은 예쁘고 특별해요. 엉덩이 골 사이에 손가락으로 만지기 좋은 곳에 있거든요. 축축해요. 두 개의 손가락이 들어갔다 나왔어요. 어떤 남자가 혀끝으로 미끄러지듯 원을 그려주었어요. (-)

(-)

신은 저에게 우주를 주었어요. 확장하는 어둠과 그 안으로 떨어지는 빛들 그리고 뜨거움.

남자의 힘들은 내 안에서 폭발하고 전 그것을 바다처럼 받아들여요.

아름다워요. 내 항문, 내 엉덩이, 벌어진 가랑이 사이가. 

(-)

전 날개를 달고 천국으로 날아갈 거예요. (-)

천장의 조명이 신의 계시처럼 나체들 위로 떨어지고, 나체들은 사람의 품속에서 껍질이 깨지길 기다리는 알이었어요. (-)

(-)

어떤 날엔 기도를 했어요. 손가락, 수염이 난 입술, 단단한 두 개의 성기가 제 창자를 꿰뚫고 나간 이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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